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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재회
「3황자 ‘세이지 루바르잔 아르키디온’. 9살. 밝은 성격에 똑똑하기까지 해서 주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꼬마래.」
“……그래, 만나보자꾸나. 독대가 아니라 내 학우들과 함께 있어도 상관없다면야 들이도록 하거라.”
로한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주인의 뜻을 전하러 사라졌다.
식지 않는 마법이 걸린 찻잔을 들어 태연히 그 풍미를 음미하는 쥬다스를 향해 마르젠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외람된 질문이오나 전하, 본래 두 분께서 자주 왕래하시던 사이셨습니까?”
사실 마르젠이 알기에도 두 황자 사이에는 우애는커녕 아무런 친분이 없었다.
단순히 친분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1황자 측에서 누구와의 만남도 거부했다 알려졌다.
쥬다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쓴 찻물을 머금고 웃었다.
“왕래라. 어찌 형제가 만남에 있어 그런 표현이 필요할꼬.”
“……흐음.”
그 말을 들은 마르젠은 생각에 잠겨 티스푼으로 찻잔을 빙글빙글 휘저었다.
하늘빛으로 찻물을 우려낸 귀한 꽃잎이 스푼을 따라 하늘하늘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3황자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왔다.
올해 9살이라던 3황자는 어린 만큼 자리에 모인 이들에 비해 훨씬 작았고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이 뽀얗게 올라있었다.
“형님?”
그렇지만 품은 분위기만큼은 남달랐다.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붉은색 머리카락과 황조를 상징하는 금안이 전체적인 인상을 환하게 돋웠다.
쥬다스와 같은 금색 계열의 눈이었지만 그 빛깔이 좀 더 침전하여 온전한 금색이라 하기보단 짙은 호박색이라 볼 수 있었다.
날 때부터 제국 군주의 혈통답게 받들어 모셔진 3황자는 자신감이 담긴 당당한 미소를 지은 채로 쥬다스를 향해 다가왔다.
그런 와중에도 예법은 똑 부러지게 지키고 있었다.
원탁에 둘러앉아 있던 전원이 일어나 그를 향해 목례했다. 그리고 이중 가장 윗선인 쥬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이지’더냐. 이리 보니 반갑구나.”
실제론 3황자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아무렇지 않게 말을 붙이긴 어려웠다.
대신 그는 초면이든지 오랜만에 본 구면이든 간에 모두 할 수 있는 애매한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그들이 잠깐이나마 스치듯 얼굴을 본 건 5년 전 전 황후 하윤의 장례식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별로 어색한 인사말은 아니었다.
세이지는 아이다운 해맑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정말 형님이세요? 와아,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꼭 다른 사람 같네요.”
“…….”
아무것도 모르는 양 말하긴 했지만 쥬다스는 아이가 둘러쓴 미소가 거짓임을 곧장 알아차렸다.
순수해 보이는 금안 너머로 꽁꽁 숨겨놓은 감정이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의 파편은 쥬다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바로 ‘혐오감’이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구나. 5년이나 지났으니.”
“어? 형님도 기억하고 계셨어요? 헤에…….”
3황자는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제가 아는 형님이라면, 절대로 기억 못하실 줄 알았는데.”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하지만 3황자는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환한 웃음으로 이를 덮었다. 9살답지 않은 빠른 태세 변환이었다.
“루바흐에서 잘 지내셨다고 들었어요. 저리 멋진 친우들도 사귀시고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변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형님이 참 자랑스러워요. 아직 졸업까진 머셨지요?”
친근한 낯으로 물어오고는 있었으나 그 내용을 뜯어보면 은근슬쩍 우위를 점하려 드는 기색이 엿보였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연장자인 상대를 칭찬하듯 표현하거나 굳이 한참 먼 졸업에 대해 언급하여 1황자라는 신분을 입고서 홀로 루바흐에 보내져 있는 현 상황을 짚어내는 등 신경을 긁는 내용이었다.
황자 간의 대화인지라 끼어들지 않고 지켜만 보던 5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대놓고 불편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바닥을 내려다보는 에단의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분노가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5명 중 유일하게 쥬다스의 예전 모습을 모르고 있던 그였기에 더욱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 정도로…….’
심지어 어린 동생마저도 그를 우습게보고 있다니.
이를 보고 나서야 에단은 1황자를 향한 인식이 어느 수준인가를 체감했다.
분하기로는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단은 참았다.
3황자의 어투가 과한 수준이 아니었으며 그 나이 또래에 호기심이 있을 법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거칠어진 감정 곡선과는 다르게 쥬다스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래, 졸업 학점을 전부 채우려면 아직 한참 더 남았단다. 하여 다음 학기부터는 수업을 좀 더 많이 들어볼 생각이다.”
“수업을 늘리시겠다고요? 너무 무리하시진 마세요, 형님. 루바흐에서 가르치는 공부는 하나같이 몹시 어렵다고 하던데요.”
“들어보련. 3학기 간 총 60학점을 빠짐없이 A등급 이상 받는다면 조기 졸업이 가능하다 하더구나.”
“조기 졸업……?”
세이지가 눈을 깜빡이며 그가 말한 네 글자를 따라 중얼거렸다. 한 과목 나오기도 힘들다는 A등급.
수업마다 2학점이나 3학점씩 배분이 되니 골고루 나누어 들어도 한 학기 당 최소 7과목 이상을 신청하여 일명 ‘올 A’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는 교칙상으로만 존재할 뿐, 루바흐가 설립된 이래로 그 누구도 달성한 적 없는 수치였다.
조기 졸업이 아니라면 정석대로 낙제만을 피해 총 140학점을 채워 들어야 한다.
과목 낙제 점수인 F등급은 사실 꽤 흔히 찍혀 나오는 점수였으므로 이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엘리트들이야 4~5년 만에 졸업한다지만 일반적인 학생들은 평균 6년가량 걸렸고 좀 둔한 아이일 경우 무려 8년씩 걸려 졸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앞으로 최대 2년. 졸업까지 남은 시간이 되겠지.”
동색(同色)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걸 보면서 쥬다스는 덤덤히 말을 맺었다.
입학한 지 2년이 지났으니 따지고 보면 루바흐 입학 4년 만에 졸업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최선을 다해 학업에 임하고 돌아오마.”
감정을 제어하고 필요한 수를 계산하는 일에 있어선 9살 세이지보다는 쥬다스가 월등히 우위였다.
마냥 태연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표정을 하고서도 쉬이 부러뜨릴 수 없는 강한 의지를 전달한다. 흡사 꺾이지 않는 버드나무를 연상케 하는 눈빛이었다.
세이지는 복잡한 낯빛으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많이, 달라지셨네요. 형님.”
바람의 정보에 따르면 세이지는 고작 4살에 1황자를 만났다.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어릴 시절에 만난 형제에 대해 뚜렷이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정도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바람은 오랜 세월이 지난 정보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밖에 읽어내지 못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아직 어린아이답게 흔들리는 표정을 짓던 세이지가 곧 꾸벅 고개를 숙였다.
“친우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해요, 형님. 오랜만에 오신 형님께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온 것이니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래, 떠나기 전 네게 한 번 들리마.”
간단히 인사를 나눈 세이지는 자리에 동석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1황자궁을 나왔다.
‘돌아오지 않으시는 편이 좋았을 텐데.’
밖에서 기다리던 호위들을 대동한 채 궁을 등지고 선 3황자 세이지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참고 있던 혐오감을 드러낸 세이지는 힐끔 고개를 돌려 1황자 궁에서 펄럭이는 루바르잔 제국기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형님은 그냥 멍청한 백치로 죽 남아 있어 줬어야 했어요. 왜냐하면.’
꾹 쥐어진 주먹을 옷자락 사이로 숨긴 3황자는 경멸을 담아 중얼거렸다.
“……당신은 가짜잖아.”
휙.
그리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 *
3황자가 다녀간 후 쥬다스를 중심으로 한 일행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소한 잡담이 오갔다.
황궁에 온 목적인 황제와의 만남이 하루 뒤 저녁으로 잡혔기 때문에 그들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학업도 정치적인 눈치 싸움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조합이었다.
계산적인 이유로 쥬다스에게 접근한 마르젠을 제외한다면 에단과 크리스티나, 바이칼, 아벨은 전심으로 쥬다스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제일 눈칫밥을 먹는 건 마르젠뿐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유들유들한 태도를 보였다.
1황자를 지지하기로 한 동기는 달랐어도 엄연히 한배를 탄 사이였다.
꼭두각시 군주를 만들지 못할 바엔 그의 최측근들 사이에서 신임을 얻어 중직에 서야 했다.
어떤 목적에서든 따르는 선장은 하나였으니 배가 기울 일은 없었다.
여섯 학생은 편안히 하루를 보내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각자 쉴 수 있는 방으로 갈라졌다.
쥬다스도 낮에 보았던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지만 넓은 크기에 비해 황량한 내부 구조가 거북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답답함을 거두기 위해 곧장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창밖에 보이는 광경에 의외라는 듯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흠, 저건…….”
「아, 전 황후 하윤 리가 제국에 들어오면서 가져다 심은 벚나무야.」
제국 내에선 보기 드문 커다란 ‘벚나무’였다.
어둠이 내린 가운데에도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은 온통 분홍빛으로 밤하늘을 물들였다.
일정한 길이로 잘라 관리한 낮은 잔디 정원에서 유일하게 피어오른 꽃나무였다.
한들한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서부터 꽃잎이 마치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벚꽃이라……. 책에서 묘사한 걸 읽어본 적은 있다만 직접 보니 색이 아주 곱구나. 허허.”
단 한 그루였다. 그럼에도 부족함 없이 화려해 보였다. 오히려 단조로운 가운데 홀로 가지를 뻗은 모습이 더욱 고고함을 돋보였다.
쥬다스는 물끄러미 벚꽃을 구경하다 살짝 고개를 틀었다.
“한데 거기 자네들은 무슨 볼일인고?”
콱.
자연스레 고개를 꺾는 순간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날카로운 단검이 창틀에 박혔다.
단단한 대리암인데도 두부의 이쑤시개처럼 꽂힌 단검에서 대상을 일격에 살해하고자 하는 의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쥬다스는 단검에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홀연히 방 안에서 나타난 세 명의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당황하지 않는 황자의 모습에 복면을 뒤집어쓴 사내들이 빠른 손놀림으로 두 번째 암기를 던졌다.
“……!”
정확하게 쥬다스의 숨통을 노려 날아오던 날붙이는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히기라도 하듯 그대로 허공에 정지했다.
꽈드득, 까득!
허공에서 시퍼렇게 얼어붙은 단검들이 후드득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쥬다스가 들어 올린 손끝에 단검을 얼린 푸른 기운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내 목을 노렸구만. 자객인가.”
세 자객은 여유를 유지하는 상대의 기세와 자유자재로 부리는 정령술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암살자답게 곧장 등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일반적으로 기사들이 쓰는 무게감 있는 양손검이 아닌 오로지 살상을 목표로 하는 날카롭고 얇은 검이었다.
“……!”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려던 그들은 움찔 놀라 우뚝 멈춰 섰다.
가만히 서 있던 1황자가 신기루처럼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쥐를 쫓던 고양이들이 쥐구멍을 둘러싸고 발톱을 세우듯 의도치 않게 서로를 향해 검을 든 채 멈춰 서게 된 자객들의 뒤통수 너머로 소년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로구나.”
“…….”
바람에 휘감겨 사뿐히 착지하는 쥬다스를 본 세 자객은 두말할 것 없이 임무에 실패했음을 알아차렸다.
1황자가 다루는 정령술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세 자객 역시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온 베테랑이었지만 그 앞에선 아무 의미도 없었다.
보통 인간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이능이다.
동시에 같은 판단을 내린 자객들은 망설임 없이 무기를 내버렸다.
쥬다스가 알기로 이러한 자객들은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다.
보통 임무실패의 상황에서 잘 훈련받은 암살자란 자결을 택하는 법이다.
하지만 자결에도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정령이 하는 말은 실체화를 했더라도 술사 이외엔 들을 수 없습니다.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얘기하고자 하는 대상에게만 정신적으로 전달하는 형식이라... 이를테면 정령들끼리의 카톡대화방에 상대를 초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대사처리가 큰따옴표 대신 특수기호인 「」인 이유기도 합니다.ㅎ
사족으로 이그레트는 로리콘(?!)이 아니라 그냥 어린아이와 동물을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흠흠 (...)
또, 3황자는 아주 영리한 9살꼬마입니다. 기본적으로 이그레트 상대할 깜냥은 아닌데... 옛날에 뭔가(?) 목격한 게 있어서 1황자에 대한 감정이 안좋습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평점,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야광형광등님께서 쥬다스를 그려주셨습니다!ㄷㄷ 큽,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주말연참+1강화를 하고 싶지만 못지킬 약속이 될까봐 그건 다음주 정도로 미루도록...ㅠㅠ 그림은 공지에 추가해두었어요~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