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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재회
정령은 기본적으로 ‘충성심’이란 심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인간을 좋아하고 어여삐 여기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둥지에서 알을 깨고 나온 아기 새를 귀여워하듯 소중한 마음으로 품어주는 게 그들의 기초 태도였다.
정령의 입장에서야 인간도 자연의 일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계약 내용을 이해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부르는 친화력 강한 개가 있다면 정령은 그 개와도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계약’을 이해할 만한 이지가 주로 인간에게 있었기에 전례가 많을 뿐, 딱히 인간이란 종족만을 특별히 여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그레트의 경우는 지금까지 있었던 그 모든 계약 사례를 뒤집고도 남을 특별함이 있었다.
그를 만난 정령은 무조건 사랑에 빠졌다. 마치 모성애나 연인에 대한 애정, 아기가 부모에게 느끼는 일차원적인 사랑처럼 그렇게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니 만일 그가 다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어쩌면 정령들은 전에 없는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확실히 그렇네…….」
유니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그레트가 지금 ‘쥬다스’로 존재하는 이유도 어찌 보면 이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정령의 힘이 지금 상황에 일조한 건 사실이었다.
“사방신이라.”
쥬다스는 아벨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거울의 정령에게 한 번 시선을 주었다.
물질계 정령조차도 이리 생소한데 동물계 정령은 또 어떨지 작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가 빤히 쳐다보자 아벨은 우물쭈물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하, 하실 말씀이 있으신.”
“루바흐로 돌아가면 바로 네 정령과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마.”
“……!”
그 말에 아벨의 침침하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눈에 띄게 확 밝아진 표정을 본 에단이 조심스레 쥬다스를 향해 물었다.
“그의 정령이라면, 거울의 정령 말씀이십니까.”
“그래, 에단. 기억하느냐. 그 정령이 아직도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으니 그대로 두고 보기 안타깝구나. 마음에 아무 거리낄 것이 없을 때가 적기 아니겠누.”
“……뜻은 좋으신데, 거 두 번 보고 싶진 않은 정령이었죠.”
바이칼이 부들부들 입가를 떨며 중얼거렸다. 확연한 거부감을 느낀 아벨이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어, 어떻게, 생겼기에……?”
“…….”
“…….”
에단과 바이칼은 동시에 미간을 구겼다.
“그냥……. 넌 안 보는 편이 좋을지도.”
“그, 그 정도라니.”
외형이 흉측하다기보단 능력 측면에서 치를 떠는 두 사람이었지만 아벨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시간이 되자 쥬다스는 다시 복장을 정돈하고 황제와의 만찬 장소로 향했다.
부자지간이라 한들 평범한 가족이 아닌 만큼 지금까지의 어떤 만남보다 신중해야만 했다.
더구나 현황은 즉위 이래 루바르잔 제국을 실수 한 번 없이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는 군주였다.
지배자답게 마법이란 이능에서도 그 권위를 보였으며 치열한 서열 싸움의 승리자인 만큼 사람을 읽는 눈썰미가 보통 사람과 비할 바 없이 뛰어날 터였다.
귀족 사회라는 야생에서 닳고 닳은 지배층을 전부 그 발아래 충성하도록 만든 노련한 제왕의 눈에 그릇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얕보여서도 안 되겠지만, 너무 눈에 띄어서도 곤란하다.’
쥬다스는 자신이 품고 있는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힘이 있으나 그 힘을 사익에 쓰지 않으려는 절제력.
이는 자리에 걸맞은 오만함을 품고 아랫사람을 다스려야 할 지도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성품이었다.
적당히 쓸 만한 힘을 가진, 그러나 군주로서 서기엔 부족한 존재. 그 모습을 황제에게 적절하게 내보여야 했다.
황제를 만난다는 사실은 별달리 긴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그의 눈을 속여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 부분에선 살짝 부담이 되었다.
쥬다스는 신중한 태도로 황제 궁에 들어섰다.
좋은 향을 내는 초가 입구에서부터 은은히 타오르고 있었고 이어지는 바닥은 걷는 모습이 비칠 정도로 매끈했다.
그는 천천히 걸어 만찬이 준비되어 있는 회장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술 장식을 제치니 길게 이어진 저녁 식탁이 보였다.
‘만찬’에 초대됐을 때 이미 눈치챈 쥬다스의 예상대로 이번 만남은 황제와의 독대가 아니었다.
미리 도착해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1황자의 등장에 눈을 모았다.
“루바르잔에 영광을. 전하를 뵙습니다.”
아직 황제석은 비어 있었다. 귀족들이 일어나 인사하는 걸 예법에 맞게 받아준 쥬다스는 자연스레 제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그를 보고 일어섰던 귀족들이 전원 착석했다.
모인 귀족은 총 7명이었으며 각자 다른 분야에서 중임을 맡은 이들이었다.
루바흐의 어리숙한 아이들과 다르게 표정과 태도가 철갑처럼 단단히 관리되어 상호 간 쉽사리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집단이었다.
그들의 모든 언행은 식전 빵으로 바구니에 담겨 식탁에 올라온 고급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둘러싼 체계적인 계산하에 이루어졌다.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1황자를 대우함 역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함부로 접근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저 소년이 바로 소문의 1황자 전하. 정말 많이 달라지셨군.’
슬슬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는 나이대의 케이베른 후작이 두 손을 깍지 껴 무릎에 얹은 채 곁눈으로 쥬다스를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관심을 끊은 게 전 황후 하윤 리가 사망한 5년 전이었다.
당시에만 해도 도무지 써먹지 못할 최약체였던 황자가 척 보기에도 반짝이는 보석이 되어 돌아왔다.
후작뿐 아니라 만찬 자리에 모인 7명의 귀족은 한눈에 달라진 싹을 알아보았다.
‘폐기(廢器)인 줄로만 알았더니. 출발이 남다른 대기만성이었단 말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대귀족 사이에서 1황자는 만장일치로 버린 수였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알쏭달쏭한 심정이 되었다.
한둘도 아니고 모든 이가 포기했던 싹이 실은 저토록 장성할 수 있는 그릇이었다니?
마치 누렇게 말라죽은 묘목을 뽑아 던져 버리고 신경을 껐더니 이듬해 봄 푸르게 자라나 하늘로 우뚝 솟은 거목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이 자리에 나와 떨지 않고 그들을 가만 바라보는 또렷한 금안을 마주하자니 저절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복잡한 상념을 가다듬고 있던 귀족들은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에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일어서서 예를 갖추는 쥬다스의 시야로 드디어 황제의 발끝이 들어왔다.
펄럭.
회장에 들어선 황제는 어깨를 감싸던 붉은 망토를 벗어 종에게 넘겼다.
레위스 G.루바르잔 아르키디온.
그는 아직 불혹도 채 지나지 않은 젊은 황제였다.
저벅저벅.
잘 닦인 백색 부츠가 반질반질한 바닥을 딛는 소리만이 회장을 울렸다.
“…….”
허무에 잠긴 금색 눈동자가 무심히 쥬다스를 향하다 이내 지나쳤다. 황제가 착석하며 앉으라 손짓하자 다른 이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황제는 쥬다스와 같은 금안이었지만 머리색은 미묘하게 달랐다. 쥬다스처럼 빛나는 은발이 아니라 물탄 듯 진한 회은발이었다.
초대 황제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전에는 쥬다스가 가진 보석 같은 은발이 더 적합했다.
황제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포크를 움직이다 종종 와인을 들이켤 뿐이었다.
그런 그가 불쑥 질문을 던진 건 식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서였다.
“루바흐에서.”
디저트로 나온 꿀과 견과류가 섞인 셔벗을 반 스푼 정도 퍼낸 황제가 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재차 말했다.
“네 배움은 어디에 있더냐.”
“……존귀하신 황제 폐하, 소자 미욱하여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배움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망설임 없이 되돌아온 대답에 황제는 무미건조하게 셔벗을 삼켰다.
“그중 가장 큰 배움은.”
“후회입니다.”
딸각.
황제가 툭 디저트 스푼을 내려놓았다.
드디어 황제의 눈이 1황자에게로 향했다.
동색의 금안이었으나 태산같이 무거운 빛으로 상대를 담고 있었다.
상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매와 같은 고요한 기다림이 있었다.
모인 귀족들은 참관하듯 숨 죽여 둘의 대화를 경청했다.
“이능이 있다고.”
“예.”
“언제부터.”
“……봄의 시작과 함께 눈을 떴습니다.”
이는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 1황자가 정령술을 부리기 시작한 건 ‘이그레트’가 눈을 뜬 이래였다.
다소 중의적인 표현이었으나 충분히 의미는 전달받은 황제가 가만히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두 금안은 같은 색이었으나 그 안에 짊어진 무게가 달랐다.
황제는 분명 1황자에게 관심은 있었지만 그의 성장에 대해 크게 기뻐하거나 자질을 속단하지 않았다.
‘네게 기대는 많으나.’
갓 태어난 아이를 처음 안은 순간부터 죽 가슴에 품고 있던 기대였다.
아이가 자라며, 또 아이를 낳은 전 황후 하윤이 죽으면서 그 기대는 점차 홧홧하게 가슴을 태우며 사그라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불씨로 남아 1황자를 포기할 수 없게끔 깜빡여 온 그 기대감은 여전히 희미하게 속내를 덥히고 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후계 자리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다른 황자에 비해 군주와 어울리는 재목인지 판별이 필요했다.
“군주가 갖추어야 할 두 가지 덕목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쥬다스는 저 질문이 황제가 대놓고 자신에게 내리는 시험지임을 알고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을 내어놓았다.
“포용과 질서입니다.”
그가 택한 내용은 황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식하거나 생각이 짧은 답이란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혜롭고 넓은 시각으로 위를 바라보는 대답이었다.
‘군주란 위에서 아래를 바라봐야 하는 자리.’
애초부터 쥬다스는 군주에 뜻이 없다는 답과도 같았다. 황제는 서늘하게 눈매를 굳히며 물었다.
“하면 그 질서를 어긴 충직한 병사를 어찌 벌하겠느냐.”
“질서를 어긴 순간부터 그 병사는 충직하지 않습니다. 충의 여부를 떠나 마땅히 질서를 어지럽힌 대가를 치르도록 함이 옳다 생각합니다.”
“하면 네 포용을 벗어날 만큼 도리를 저버린 수하는 어쩌면 좋겠느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내침이 옳다 여깁니다.”
공허하던 황제의 눈빛에 흥미로운 기색이 돌았다. 그는 손등에 턱을 괴며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재미있구나. 너는 군주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종전엔 다른 대답을 내놓았지?”
“이해하는 것과 제가 직접 행함에 있어 그 간극이 크기 때문입니다.”
군주의 정의를 머리로는 알아도 그대로 따를 생각이 없다. 명백한 거부였다. 그리고 황제 역시 그 당돌한 판단에 동의했다.
‘피를 볼 냉혹함이 없다면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나…….’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1황자는 아직 어렸다. 그럼에도 황제와 대등한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다른 황자들은 물론이고 황후나 공작들조차 그 앞에서 이런 분위기를 보이진 못했다.
여유롭고, 또 부드럽다.
황제는 저 여유가 그저 단순한 어린아이 특유의 패기가 아니라 진짜배기임을 꿰뚫어 보았다. 1황자는 진실로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지성, 판단력, 자신감과 정신력. 그리고 뛰어난 이능까지 갖추었으니.’
그렇다면 자신의 위치에 알맞은 냉철만 깨우면 될 일이 아니던가.
황제는 웃음기를 지운 채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너를 좀 더 지켜보고 싶구나. 앞으로 사흘간 더 떠나지 말고 궁에 남아 있도록 하라.”
포식자는 장을 떠났다.
수년 만에 아들을 재회한 아버지는 공허한 눈을 하고 있었으며,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치 씨종자를 평가하듯 그렇게 흥미를 가지고 떡잎을 살펴보았을 뿐이다.
어디에도 정은 없었다.
쥬다스는, ‘쥬다스’가 자신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2)
이제 새벽에는 저도 밀린 수면을 좀 취하고(...)
아마 이따 점심시간 정도에 남은 한 편이 마저 올라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오늘 낮에 이어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메시지와 애정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