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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
황제와의 만찬에서 돌아온 쥬다스를 반긴 건 시종 로한이었다. 이미 시간이 상당히 늦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은 모두 취침을 위해 각자 방에 돌아간 상태였다.
“내일 오전 황후께 찾아뵙겠다 전해다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로한에게 지시를 내리고 방으로 들어간 쥬다스는 소파에 털썩 기댔다.
초콜릿색 양모로 제작된 소파 겉면이 지친 몸을 푹신하게 감싸주었다.
「이그레트, 그런 데서 잠들면 감기 걸려!」
포록 코앞으로 날아와 쫑알대는 유니의 잔소리에 그는 감았던 눈을 흐릿하게 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수마가 몰려들고 있었다.
쥬다스는 부드러운 양모에 머리를 기댄 채 작게 한숨을 뱉었다.
“……잠시만, 유니.”
육신이 성장했다곤 해도 아직 썩 튼튼하다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루바흐를 나온 뒤 줄곧 무리해 왔다.
프리드의 간계에 의해 받았던 정령 역소환 충격도 아직 남아 있었다.
한평생을 평민으로 살아왔던 그가 1황자라는 위치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 역시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애초에 권력을 탐하지 않아 작위를 거절하고 종래엔 사회를 떠나 은둔했던 이그레트가 권력의 최정상에 가까이 서 있다는 자체가 모순적이었다.
쥬다스는 손등으로 눈가를 터억 덮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현자라 칭송받은 자조차 스스로가 걷는 길에 객관적이긴 어려웠다. 곁을 지키는 정령들이 대신 활발히 답을 내려주었다.
「잘하고 못하고 할 게 뭐 있다요?」
「응, 응.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잖아.」
‘하고 싶은 대로.’
사실 그는 지금껏 충분히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죽는 순간 후회한 바가 있기는 했으나 썩 불행하다 느낀 건 아니었다. 충분히 많이 가졌고 충분히 많은 힘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부족한 게 있다면.
“‘인간다운 삶’이던가.”
「으음, 네가 생각하는 인간다운 게 뭔데?」
“…….”
쥬다스는 소파에 기댄 채 침묵했다.
파앗.
술사의 의식이 점멸함과 동시에 정령들의 실체화가 풀렸다.
「아, 정말! 이대로 잠들면 안 된다니까.」
유니가 팔짱을 낀 채 투덜거렸다. 실체화가 풀린 이상 자연체의 정령들은 힘을 사용할 수 없다.
뚱하니 볼을 부풀린 유니를 지나쳐 잠든 쥬다스에게 다가간 카니가 그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폭 안아주었다.
「인간답지 않아도 돼요.」
“…….”
「좀 더 욕심을 부려도 괜찮으니까.」
다홍색 눈망울에 어린 따뜻한 애정을 힐끔 엿본 유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다들 이그레트한테 너무 약해.」
「그렇다면 네가 좀 더 세게 나가보지 그런가.」
「……는 나도 포함이거든.」
푸른 늑대를 향해 헹 코웃음 친 유니가 소파 등받이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현계에 거의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느릿느릿 일어난 따뜻한 녹색 바람이 가볍게 주변을 감싸 안았다.
「좋은 꿈 꾸길, 이그레트.」
* * *
아침이 밝자 쥬다스는 미리 언질했던 대로 황후의 궁에 찾아갔다.
흔쾌히 그의 방문을 허가한 황후는 3황자 세이지와 함께 튤립 정원에서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사적인 자리인 만큼 편안한 차림으로 실외에 나와 있던 그들은 쥬다스를 발견하고 상반된 표정을 지었다.
3황자 세이지는 순간 찌푸린 얼굴로 불쾌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가 가까스로 이를 수습했다. 반면 황후는 품위 있게 미소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어서 와요. 낯빛이 맑고 밝으니 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군요, 1황자.”
“염려해 주신 덕입니다.”
“호호. 이리 보니 마음이 놓이는 군요. 그간 이 사람이 황자에 관해 걱정이 많았습니다.”
겉보기론 평온하게 주고받은 인사말이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녹색 바람을 멀거니 응시했다.
「와, 진짜 뻔뻔해. 죽이려고 할 땐 언제고 걱정은 무슨?」
「히에에, 막 두 얼굴의 사나이 그런 거 아니다요?」
「……황후가 사나이면 그게 제일 반전…….」
정령들의 숙덕거림이 들리지 않는 황후는 고운 갈색 눈동자 가득 호기심을 담고 실체화된 유니와 토니, 루니를 향해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이들이 황자의 정령입니까?”
“예.”
“정말 편리하겠군요. 부럽습니다. 세이지는 정령술에는 자질이 없으니 말이요.”
“황후마마, 이중 바람은 기류를 읽어 길을 안내하는 역할도 합니다.”
“……?”
차로 붉은 입술을 적시던 황후는 쥬다스가 갑작스레 꺼낸 말에 멈칫 손을 정지했다. 의도를 읽으려는 차분한 눈길에 쥬다스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소자는 오늘 그 안내를 따라왔을 뿐입니다.”
“…….”
황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아직 어린 세이지는 무슨 말인지 눈치채지 못하였으나 황후는 저 말이 내포하는 경고를 알아들었다.
1황자가 다루는 정령술은 그녀의 짐작보다 훨씬 수준급이었다. 특히 바람의 경우 보기 드문 최상의 힘.
자폭하여 흔적을 없애 버린 자객들의 정보를 대충이나마 캐낼 수 있었으며 이미 배후로 확신한 상태에서 그녀를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쥬다스의 확신대로 황후는 직접 수하를 움직여 암살자를 보냈다.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보통 12살 꼬마였다면 이능을 사용해 보기도 전에 숨을 거둬갔을 엄선된 실력자들이었다.
“……그래요? 유감이로군요. 이 사람은 1황자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기뻐 좋은 차를 준비해 두고 새벽부터 기다렸는데 말이어요.”
쪼로록.
황후는 시녀를 시키지 않고 손수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따랐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찻물은 검은색이었다.
황후는 따라놓은 찻잔을 쥬다스를 향해 살짝 밀어주었다.
“들어요, 황자. 입이 짧은 황자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차가 아닙니까?”
쥬다스는 그녀가 건네는 차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를 보니 이상할 정도로 몸이 굳었다. 검은 빛깔로 우려낸 차에선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달달한 향이 났다.
독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인체에 해롭다면 물의 정령왕인 루니가 지금처럼 얌전히 엎드려 있을 리가 없었다.
어렴풋이 뇌리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깜빡이며 되살아났다.
‘마셔요.’
‘편안해질 거랍니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나요, 황자?’
과거의 잔상에서도 황후는 지금처럼 고고하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보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꼬임에 혹해 어린 쥬다스가 잔을 받았었다.
차를 마시고 쓰러졌던 1황자의 기억을 떠올리며 쥬다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도, 죽이려고 했다.’
어린 쥬다스에게 건넸던 건 지금과 다르게 독이 든 차였고, 아이는 이를 남김없이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아마도, ‘죽었다’.
“왜…….”
“으응?”
모르는 척 웃는 입술이 옛날과 같았다. 쥬다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려 살짝 눈을 감았다.
이제야 퍼즐이 조금씩 맞춰졌다.
한 번 죽었던 아이가 살아남은 건 순전히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이그레트의 힘 덕분이었다.
이그레트가 실제 죽었던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어쩌면 그전부터 줄곧 그의 영혼은 쥬다스와 함께였을 것이다.
다만 그는 바로 눈을 뜨지 못했다. 고요히 1황자의 몸에서 잠든 채 지닌 지성과 능력 모두를 잊고 있었다.
그러니 정령도 현계에 소환되지 못했고 황자는 홀로 자신의 숨통을 노리는 세력에게 함락당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기적처럼 그를 가호하던 정령의 힘이 풀려 나와 되살렸다.
아직 의문으로 남은 건 전 황후 하윤 리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와 이상할 정도로 꽁꽁 닫혀 있는 본래 1황자의 정신 세계였다.
죽어버린 아이의 기억을 단편적이나마 떠올린 그의 금안이 분노를 담고 일렁였다.
내내 유해 보이던 쥬다스의 분위기가 돌변하자 황후는 속으로 조소했다.
‘자랐다 한들 여전히 멍청한 꼬마로구나. 작은 도발에 저리도 솔직히 반응하다니.’
그녀는 우아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다 쥬다스에게 손수 건네며 달래듯 입을 열었다.
“갑자기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자, 따뜻한 차라도 한 모금 마셔 보도록 해요.”
하지만 이 행동이 실수였음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쩡!
“……!”
찻잔이 깨어지며 흰 장갑 위로 검은 찻물이 쏟아졌다. 온도를 유지해 주는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이는 매우 뜨거웠다.
황후는 재빨리 장갑을 벗어 던졌다. 시녀들이 아연실색하여 달려와 찬 물수건으로 그녀의 손을 감쌌다.
“나는.”
황후는 놀람을 감춘 채 여전히 꼿꼿한 황실 어른의 표정을 유지하며 쥬다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를 넘는 걸 싫어합니다.”
“……황자?”
“사람은 누구나 컵을 깨뜨리는 것과 같은 실수를 하지만.”
존대를 사용하되 존중과는 다른 강한 어조였다.
제 아비를 닮아 깊게 가라앉은 금안을 마주한 황후는 손을 감싼 물수건을 힘주어 꽉 잡았다.
1황자는 고작 작은 도발에 넘어가 감정을 숨기지 못한 애송이가 아니었다.
단지 숨길 필요가 없다 여겼을 뿐이다.
“실수가 아닌 행동에는 응당 대가가 따를 것입니다.”
* * *
갑작스레 잔이 깨져 뜨거운 물에 손을 데인 황후로 인해 티타임자리는 그대로 파했다.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난 쥬다스의 뒤로 3황자 세이지가 쫓아 나왔다.
“형님!”
분기가 실린 부름에 쥬다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표정은 변함없이 온화했으나 전날 세이지가 마주했던 분위기랑은 조금 달랐다. 움찔한 세이지가 조금 수그러든 기세로 물어왔다.
“어머니께 드린 말씀이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란다.”
“설마 어머니가 형님한테 해를 끼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전부 헛소문입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그럴 분이 아니시니까요. 오히려……!”
우르릉.
하늘이 작게 울었다. 어느 틈엔가 하늘을 뒤덮은 구름에서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이지는 힐끗 하늘을 올려다보곤 단호히 말을 맺었다.
“오히려 그런 짓을 잘하는 건 형님의 어머니셨죠.”
“…….”
“전 봤어요. 형님의 어머니가, 형님을 죽였던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솨아아아.
예고도 없이 굵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를 맞는 두 소년을 향해 달려온 시종들이 우산을 펼쳐 들었다.
세이지는 보필을 받았으나 쥬다스는 손을 내저어 그들을 물렸다.
우산 아래 귀히 모셔짐을 당연히 누리는 3황자와 황조를 상징하는 은발이 푹 젖도록 비를 맞고 있는 1황자의 대립은 기이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그르르.
사납게 이를 드러낸 푸른 늑대를 저지시킨 쥬다스가 조용히 대꾸했다.
“하나 나는 죽지 않고 이리 살아 있지. 지금은 그래,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면!”
“나를 향해 달려오는 말을 피하지 않을 뿐이란다.”
오늘은 경고를 위해 찾아갔을 뿐이다.
본래 평화로운 해결을 좋아하는 이그레트의 성정이 아니라 할지라도 제국의 황후 정도 되는 이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쥬다스는 제 어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배다른 동생을 가만 내려다본 후, 발걸음을 돌렸다.
자리를 파하기 직전 황후의 눈은 심상치 않게 쥬다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쥬다스는 황후가 절대로 그를 제거하려는 목적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충돌.’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3)
3연참 완료...!
오늘의 팁 : 이그레트의 경우 모든 미계약 상태의 정령을 ‘본체’로 볼 수 있습니다. 단 그와 계약한 정령들은 술사의 소망에 따라 모습을 변화한 상태입니다.
사족으로 쥬다스는 아직 액션은 취하지 않았지만 암살자들의 배후에 대해서 알아둔 상태입니다.ㅎㅎ 이제 움직일 일만 남았네요.
챕터의 소제목은 <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입니다. ...치킨하면 바삭한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 치킨은 아니고요...ㅎ
*Chicken Game : 두 대의 차가 마주 보고 돌진하다가 먼저 피하는 쪽이 패배하는 게임.
대략 이런 뜻입니다. 자세한 설명이 궁금하시다면 네이버에 치킨게임을 검색하시면 됩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원래대로 12시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