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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
죽일 생각으로 덤벼드는 적으로부터 피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맞선다.
둘 중 하나가 피하지 않는 이상 부딪침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이 파멸할 게 뻔했다.
달리는 말이 서로를 교차하지 않고 그대로 충돌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쥬다스는 이 충돌에서 피할 생각이 없었다.
찰박찰박.
비에 젖은 풀밭이 밟고 지나갈 때마다 물기를 튀겼다. 어찌나 비가 많이 내리는지 앞도 잘 안 보일 지경이었다. 빗물을 한껏 머금고 늘어진 케이프가 그의 느린 걸음걸이에 따라 흔들렸다.
단편적이나마 떠오른 본래 ‘쥬다스’의 기억이 더해져 머릿속이 갑갑해져 왔다. 쥬다스는 비를 맞으며 이를 하나하나 정리했다.
“전 황후…… ‘하윤 리’는 어찌 숨을 거두었지.”
「……자살했어. 스스로.」
유니가 조심스레 답했다.
「그녀는 이미 반쯤 미쳐 있었거든. 죽기 직전, 아들인 1황자와 함께 죽으려고 했었대. 알려지기로는 동반 자살을 시도했지만 혼자 죽은 셈이라고…….」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어미의 자살, 이때 함께 죽을 위기에 처했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1황자.
“…….”
하지만 그렇게만 정리하기엔 무언가 찜찜했다.
단순히 자살이라고만 생각하기엔 오늘 본 황후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여기에도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생각하며 걸어오다 보니 어느샌가 1황자 궁의 벚나무 앞에 다다랐다.
쥬다스는 커다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앉았다.
「계속 이대로 비 맞고 있을 거야?」
유니가 걱정스레 그 뺨을 쓸었다.
지금 이 갑작스러운 호우의 원인이 바로 쥬다스였다. 그의 바람에 따라 물의 정령은 황궁을 뒤덮고도 남을 비구름을 불러왔다.
때아닌 소나기에 여기저기 웅덩이가 고였다.
“……이상하구나.”
「뭐가?」
“처음엔 나와 전혀 무관하다 느꼈던 것들이 이제와 신경 쓰이다니 말이다.”
「그게 왜?」
“누군가의 어미를, 누군가의 아내를, 그리고 어쩌면 이와 관련된 수많은 이의 인생을 짓밟을 수도 있는 일.”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그게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다.”
「이그레트.」
“어쩌면 프리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나는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인 것을.”
그의 자조적인 중얼거림에 정령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기적인 게 뭐 어때서.」
「맞다요.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요.」
「……네가 말하는 게 ‘이기’라면 우리 정령도 마찬가지.」
「우린 이그레트를 위해서만 움직일 테니까요.」
유니, 토니, 루니, 카니 순으로 이어진 말이었다. 그 바람에 쥬다스는 조금 우울했던 것도 잊고 쿡쿡 웃고 말았다.
“루니.”
스윽.
그의 부름에 정갈히 앉아 있던 푸른 늑대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 다시 한 번 이 아이의 정신세계에 접촉해 주련. 꿈의 형태를 통해 숨겨진 기억을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힘을 사용해서 말이야.”
「……억지로 닫힌 무의식에 접촉하면 네게 무리가 갈지도 모른다.」
“부탁한다.”
「…….」
「하지만 이그레트…… 어?」
토독, 톡.
하염없이 퍼붓던 빗줄기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그의 머리 위에서만 사라졌고, 여전히 굵은 장대비가 사방에 퍼부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때리는 소리만이 파도처럼 머리 위에서 울려댔다. 쥬다스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바닷빛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찰랑였다.
“……쥬다스 님.”
크리스티나가 그의 앞에 서서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그녀는 황궁에 오고 나서부터 죽 ‘전하’라 불렀던 호칭 대신, 학교에서처럼 이름을 불렀다.
아침부터 그가 황후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은 모두 그를 기다렸다.
한참 기다리다 비가 오는 소릴 듣고 밖으로 나온 크리스티나가 벚나무 아래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쥬다스의 표정을 보니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크리스티나는 하려던 질문 대신 살짝 무릎을 굽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다녀왔단다.”
쥬다스는 비에 젖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차가운 손바닥에 따뜻한 온기가 전달되었다. 줄곧 냉혹하기만 하던 궁 안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전해 주는 손이었다.
비에 젖은 몸을 씻고 따뜻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쥬다스를 중심으로 일행이 다시 방 안에 모였다.
“그래, 오늘 내가 황후마마를 찾아 뵌 건 말이다.”
쥬다스는 할아버지가 손자손녀를 모아놓고 옛날이야기를 하듯 허허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분께서 내 목을 노렸기 때문이란다.”
“……?”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예에에?!”
평이하게 흘러나온 폭탄 발언이었기에 인식이 늦어졌다.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르젠이 손을 떨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화, 화, 황후께서……?”
“그래, 이번 자객의 배후란 뜻이지.”
“그런!”
‘말도 안 된다’고 외치려던 마르젠이 멈칫했다. 현 황후는 1황자의 친모가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황태자 자리의 주인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분히 인과관계가 있을 법한 내용이었다.
더구나 그가 아는 한 저 백로황자는 결코 허언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마르젠을 제치고 바이칼이 끼어들었다.
“맙소사! 전하, 그걸 알고 계셨다면 왜 당장 폐하께 알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알린다면 어찌 될 것 같으냐?”
“그야…….”
늘 이런 식으로 되물어오는 쥬다스의 패턴에 익숙해진 바이칼은 이번에는 섣불리 열을 내는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쥬다스가 이번 암살 미수 사건을 황후의 소행이라 확언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뛰어난 정령술에 기인했을 테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 한들 물증이 없었다.
자객들은 이미 폭사하여 흔적도 남지 않았고, 상대는 제국의 지고한 황후였다.
1황자라 한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정령의 힘을 내세워 불미스러운 사건의 배후로 황후를 지목했다간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바이칼은 그 사실을 깨닫고 낮게 침음을 흘렸다. 같은 생각을 한 에단도 굳은 얼굴로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하면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찌할 것이란 없다.”
쥬다스는 이미 결단을 내렸다. 흔들림 없이 모두를 담은 금안은 마치 고요한 수심과도 같았다.
“다시 기어코 칼을 들겠다면 이에 대응할 뿐이야.”
“그 말씀은.”
본디 군주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나 선택지는 그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게임이다. 만일 황후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그를 피해서 지나간다면 양쪽 모두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뛰어난 1황자의 그림자에 가려 3황자가 빛을 받지 못할지도 몰랐다.
반대로 빛을 보기 위해 1황자를 꺾으려 든다면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한쪽은 쥐고 있던 권력을 잃을 것이며, 반대편에 서 있던 자신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겠지.’
그때엔 추구하던 자유를 잃는다.
* * *
그날 밤, 그는 물의 정령왕 루니의 도움을 받아 ‘쥬다스’의 무의식에 접촉을 시도했다. 종종 의도치 않게 이루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꿈을 통한 접근이었다.
‘……역시 닫혀 있군.’
꿈속에서, 이번에도 역시 그는 본래의 노인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그레트는 굳게 닫혀 있는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어린 쥬다스가 꽁꽁 숨겨 놓은 기억이 이 안에 있을 터였다.
이그레트는 가만히 손을 들어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탁, 끼이익.
‘……?’
생각보다 문은 쉽게 열렸다.
조금 의아하게 여겨지긴 했으나 그는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한 여인이 포대에 싸인 아기를 안아 들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단아하게 비녀를 꽂아 틀어 올린 검은 머리와 황빛 도는 피부가 제국민과는 다르게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그레트는 저 여인이 초상화 속에 그려져 있던 쥬다스의 생모, ‘하윤 리’임을 곧바로 눈치챘다.
그렇다면 그녀가 안고 있는 저 아기는.
“일어났니?”
“아― 우.”
“우리 귀여운 아가, 쥬디.”
아주 어린 아기일 적의 쥬다스와 그 어미였다. 가까이서 직접 본 하윤은 이제 갓 스물을 넘었을까 싶은 외향으로 한 아이의 어머니치고는 어려 보였다.
부드러운 손길로 아기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진 하윤은 이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아가야.”
쥬다스의 어머니가 저런 식으로 아이를 향해 행복하게 웃어주던 여인이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해 봤던 일이었다. 발에 끈끈한 풀이라도 붙은 듯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이그레트가 뚫어져라 두 모자를 바라보는 사이, 방의 건너편에 문이 하나 더 생겨났다.
스르르.
또 다른 무의식과 연결해 주는 문이었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 꿀렁이는 문으로 다가간 이그레트는, 문을 열기 전 다시 한 번 하윤과 아기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마법이라도 건 듯 둘의 모습은 정지해 있었다. 여기까지가 쥬다스의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인 모양이었다.
이그레트는 문을 열고 다음 방으로 들어섰다.
“……해선 안 되지요. 나는 당신의 비밀을 알아요. 황후마마.”
두 여인이 마주 보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 커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게 된 어린 쥬다스가 어미의 옷자락을 잡고 말간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윤의 앞에는 현 황후, 즉 당시의 황비가 서 있었다.
이제 갓 걷기 시작하는 1황자를 힐끗 내려다본 황비가 고혹적으로 입매를 휘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자란 동쪽 나라에선 연금술을 사용한다지요.”
“……!”
“감히 고귀한 황손을 상대로 더러운 술수를 부리다니.”
황비는 고압적인 눈으로 다시 하윤을 쳐다보았다. 하얗게 질린 하윤이 아이를 안아 올리며 등을 돌렸다.
“그런 게 아니요, 황비. 이만 돌아가 줘요.”
“내가 모를 줄 아나요? 그 아인 완벽한 황족의 유전을 뽑아내기 위해 당신이 만들어냈을 뿐이잖아요?”
“그만해요! 아이가 들어요. 차라리 밖에 나가서 따로 얘기합시다.”
“흥. 어차피 실패작이잖아, 그 아인.”
실패작.
그 말에 하윤이 홱 돌아섰다. 분노로 하얗게 굳어진 면전에 대고 황비가 조소를 흘렸다.
“부작용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죠? 기껏 황조의 상징을 타고난 아이가 연금술로 만들어진 백치라니. 이 사실을 폐하께서 아시면 어찌 될까.”
“……입 조심하세요, 황비.”
하윤이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답했다.
“사실과 다릅니다. 난 연금술을 배운 자랑스러운 해동성국의 왕녀였고, 이를 인간에게 사용해선 안 된다는 사실도 배웠어요. 그러니 하늘에 맹세코 그 술법을 내 아이에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 발뺌할 셈이죠? 증거가 이렇게 있는데.”
팔락.
황비가 품에서 연금술의 진이 적힌 종이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사방에 흩뿌려지며 추락하는 종이에는 복잡한 연금진과 술법들이 해동의 언어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연금술이란 물질을 변환시키는 힘이다. 술사의 지식과 힘, 그리고 술법에 들어가는 재료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종의 유전을 변환시켜 순종에서 키메라를 만들거나, 반대로 혼혈에서 순종의 피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했다.
자신이 고국에서부터 가져온 자료가 그녀의 품에서 나온 걸 확인한 하윤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걸, 언제.”
“내가 눈감아주길 바란다면.”
하윤은 떨리는 눈으로 상대가 내미는 약병을 바라보았다.
“마셔요.”
“…….”
설령 연금술을 아이에게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이와 관련된 연구물이 존재하는 이상 의심을 피해갈 수 없을 터였다.
하윤은 야생 생태계보다 치열한 권력 경쟁에서 살아남기엔 아직 어렸고, 너무 순진하게 자라난 왕녀였다.
황실에서 순진은 곧 독이다.
그녀는 황비가 내민 덫에 걸려 정체 모를 약을 마셨다.
목적을 달성한 황비가 방을 떠났고, 하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정령왕 급이 아닌 자연계 4속 정령들(주로 하급)은 계약자 없이도 현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본체를 유지하고 있고, 간혹 필요에 따라 모습을 바꾸고 있기도 합니다.
이번 7장에선 주인공이 정체성을 찾으면서 조금씩 변한 모습을 보여드릴 것 같습니다. 여기엔 본래 '쥬다스'의 기억과 감정이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에 힘을 얻고 갑니다!ㅎ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