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61화 (6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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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

“우, 아.”

“……아니야, 아가. 듣지 마. 듣지 말렴…….”

이미 황비는 떠났지만 하윤은 울먹이며 아이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스르륵.

이 장면을 빠짐없이 관찰한 이그레트의 앞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그는 잠시 흐느끼는 하윤과 멍하니 그녀에게 안겨 있는 어린 쥬다스를 바라보다 문을 열었다.

이번엔 그에게도 익숙한 장면이었다.

짝!

아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창백한 뺨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는다. 그걸로도 모자라 하윤은 손에 잡히는 대로 가구며 잡기를 쓰러뜨리고 집어던졌다.

고국에서부터 가지고 온 석조화병과 색을 입힌 자기 인형들이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간 자주 있었던 일이었기에 어린 황자의 안위를 위하여 위험한 것들은 미리 치워놓았는데도 소용없었다.

아기 천사가 새겨진 시계가 바닥으로 추락했고, 유아용 받침대며 고급스럽게 깎아 만든 장식장이 엎어졌다.

아수라장이 된 방 안에서 아이는 폭력에 방치됐다.

‘……아니, 본인 의지가 아니야. 조종당하고 있다.’

이그레트는 즉시 그녀의 이상을 알아챘다. 하윤은 마법에 걸려 있었다. 원인은 조금 전 지나온 방에서 마셨던 물약이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인과에 따라 하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아이를 폭행했다.

부서지고 깨진 방 안에서 그녀가 잠깐이나마 정신을 차린 건, 자기 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는 스스로의 손을 봤을 때였다.

“……!”

하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목이 졸리던 아이는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채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자국이 난 아이의 볼에 떨리는 손끝을 가져다대던 하윤은 이내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아…… 가.”

황비가 준 물약을 마신 이후로 그녀는 종종 정신을 놓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몽롱하게 흐려진 정신이 다시 돌아올 때쯤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폭력과 폭언이 이루어진 다음이었다.

뒤늦게 함정에 빠졌음을 알았지만 물릴 수도 없었다.

‘울어요? 왜?’

어린 쥬다스가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이그레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나쁜 아이라서?’

‘잘못했어요.’

‘울지 마요.’

‘엄마…….’

그리고 아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충격을 견디다 못해 기절한 것이다.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일 뻔했음을 알게 된 하윤은 끔찍한 공포에 휩싸였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 가다간 내가…….’

그녀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깨진 유리 조각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결단은 빨랐다.

푹.

붉은 피가 흘렀다.

눈앞에서 펼쳐진 비극에 이그레트는 주먹을 콱 쥐었다. 그녀의 마지막은 소문대로 자결이 맞았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뒤틀려 있었다.

그다음은 뻔한 수순이었다.

황비는 당시 7살이던 1황자에게 독이 든 차를 먹였다. 하지만 독의 효과는 즉시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1황자는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히 건강을 잃어갔다.

본래부터 타고나길 유약하게 태어난 아이였으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주 열이 올랐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늘어났다. 서서히 몸에 퍼져 나간 독기는 몸의 성장을 완전히 멈추어버렸다.

10살이 되자 황자는 황명에 따라 루바흐에 보내졌고, 그사이 결국 독은 1황자의 육신을 모조리 장악했다.

조롱과 멸시 속에서 황자는 남은 생명력을 모두 소진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안에 고요히 잠들어 있던 이그레트의 힘과 기억이 깨어났다.

쥬다스의 과거가 파도처럼 그의 머릿속에 범람했다.

그는 못 박힌 듯 선 채 휑한 방 안에 남아 있었다. 어미의 시신도 깨어져 나간 잡기와 가구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어째서 1황자의 방이 황량하게 비어 있었는지 이젠 알 수 있었다.

남은 건 그와 방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어린 쥬다스뿐이었다.

“그랬구나.”

“…….”

“그랬으이.”

이그레트는 서서히 아이에게 다가가 꿇어앉았다.

“지금까지 혼자서 버티느라 얼마나 속상했누. 잘 견뎌왔다.”

죽어 있던 금안이 눈앞의 노인을 담았다. 아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손바닥이 그의 머리에 폭 얹어졌다.

빙긋.

그가 늘 짓던 것과 같은 미소가 아이의 입가에 지어졌다. 생기를 찾은 쥬다스의 금안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리고 아이는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래, 너는 즉.’

이그레트는 꿈에서 깨어나며 비로소 깨달았다.

“……나였구나.”

아이의 무의식은 곧 자신의 기억이었다. 서로 다른 자아였으나 같은 혼을 공유한 삶이다.

본래대로라면 ‘이그레트’의 자아는 깨어나지 못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황실이 낳은 비극이 아이를 죽였으니 웅크리고 있던 전생의 자아가 대신 빈자리를 차지했다.

후웅.

그에게 감응한 정령의 힘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불안하게 일렁거리는 녹색 바람이 커튼을 펄럭였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응축된 자연에너지였지만 이도 잠시였다.

그는 가볍게 손을 저어 모든 힘을 흩어버렸다.

1황자의 몸에서 깨어난 지 약 두 달.

지금의 삶이 그의 영혼을 토대로 이루어진 두 번째 삶이었음을 온전히 인식하기까지의 기간이었다.

* * *

그날 1황자는 좀 이상했다.

딱히 무언가 특별한 행동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잠잠했다.

깊은 상념에 잠겨 멍하니 있거나 누가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 등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언제나 총명하고 매사에 태연자약했던 그였기에 그 태도 변화는 주변인들의 불안을 샀다.

루바흐를 나와 있는 상태지만 공부를 게을리할 수는 없어 챙겨온 교재를 함께 읽기 위해 모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바이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쥬다스가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거꾸로 들고 계십니다만.”

“……아.”

이를 본 전원 웃지도 울지도 못할 괴상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아’ 따위의 무감동한 대답으로 바이칼의 지적을 받아들인 쥬다스는 아예 책을 덮어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죽 그를 주시하고 있던 에단도 덩달아 책을 덮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글쎄다. 있다 하면 있고 없다하면 없지.”

“……?”

해괴한 대답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서로 아리송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또 한 가지의 이상 행동은 여기에 있었다. 오늘 그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찡그린 것도 아니었지만 넋 나간 사람처럼 구는 그 태도는 보는 사람들에겐 충분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책을 놓은 김에 쥬다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보자, 벌써 오늘이 마지막 날이로구나.”

황제가 명한 사흘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그들은 다시 루바흐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 사실에 모두가 안도했다.

황궁은 분명 호화롭고 편리한 생활이 가능했다. 귀족으로 살아온 아이들조차 진귀하다 여길 정도로 모든 것이 최상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음식과 건물 구조, 하다못해 벽마다 걸려 있는 황실의 문장조차 황금과 백금을 섞어 조각한 장인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손님 자격으로 황궁에 머물러 있는 며칠간 아이들은 그 하루하루가 통 좌불안석이었다.

어릴 때부터 귀족으로 훈련받아 자라왔으며 루바흐라는 작은 귀족 사회에서 적응을 마친 그들은 눈치가 빨랐다.

애초에 황실의 부름을 받은 순간 알았다.

자신들이 따르고자 하는 어린 황자가 황실의 알력과 분쟁의 중심이 될 것이란 사실을.

그랬기에 곁을 지키고자 따라온 것이고 최대한 그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력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당초 결심했던 것과 달리 지배층의 자녀로 태어나긴 했으나 아직 그 권력을 손에 쥐지 못한 아이들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력감과 박탈감으로 인해 입안이 썼다. 이는 달콤한 과자만 먹다가 처음 매운 맛을 접해 본 어린아이처럼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 매운 맛은 그들로 하여금 제 위치를 깨닫고 좀 더 성장하고자 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나가시는 겁니까?”

“여 앞에 산보를 가려던 참이란다.”

“따르겠습니다.”

에단이 당연하다는 듯 황자를 따라 일어섰다. 한 박자 늦게나마 바이칼도 한숨을 쉬며 그 뒤를 쫓았고, 크리스티나와 아벨, 마르젠은 자리에 남았다.

황자가 자리를 떠나자 크리스티나는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마르젠을 바라보았다.

“……이거이거. 그렇게 강렬한 눈빛으로 보시면 부끄럽습니다?”

“거두절미하고 확실히 하지, 그대.”

“흐음.”

한기가 실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마르젠의 표정에는 긴장감이라곤 없었다.

그는 크리스티나가 제게 할 말이 있음을 알았기에 일부러 황자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라도 이 대귀족 출신 아가씨의 관심을 받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떤 영양가 있는 이야기가 오고 갈지 기대하는 그에게 크리스티나는 곧장 본론을 꺼내들었다.

“나는 네가 마음에 안 들어.”

“……유감이군요.”

“정확히는 네놈의 그 분수를 넘어선 야망이 짜증나.”

“하하.”

독설을 듣고도 상처받기는커녕 유들유들 웃는 얼굴에 대고 크리스티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인맥을 관리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싫든 좋든 네 그 재능은 인정해. 단, 분수에 맞는 한에서.”

그간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그녀 역시 대귀족의 일원이었다.

학원 내에서 움직이는 흐름 정도는 눈에 전부 담고 있었다. 그런 크리스티나에게 있어 마르젠의 노림수를 읽는 일쯤은 쉬웠다.

그녀는 마르젠이 1황자에게 접근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분을 이용해서 높은 자리에 오를 생각은 버리도록. 네가 함부로 오를 나무가 아니니까.”

“크리스티…….”

“이름으로 부르지 마.”

도도한 게 아주 털 세운 고양이가 따로 없다. 그리 생각한 마르젠은 난감함에 코끝을 찡그렸다.

학교 내에서는 가문명 대신 이름으로 부르는 게 교칙이고 그들은 학생인데 이름을 부르지 말라니.

그렇다고 가문명으로 부르는 것도 역시 달가워할 리 없었다.

한숨을 폭 내쉰 마르젠이 어깨를 들썩였다.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

“저는 전하를 이용할 생각 따윈 진즉에 버렸습니다. 솔직히 직접 뵙기 전까진 크리스…… 당신 말씀이 맞는데. 뵙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죠. 아니 뭐,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분을 이용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할지 자체가 의문이라고요. 전.”

“…….”

크리스티나는 상대가 하는 말이 진심인가 싶어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럼 왜.”

“왜 전하를 선택했냐고요? 하하,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르젠은 펜을 한 자루 집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간단히 손장난을 치자 펜은 빙그르르 제자리에서 돌았다.

“보신 대로 저는 사람을 고를 때 머리를 쓰는 인간입니다. 소위 말해 약았죠. 그런 제가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저버리게 만드는 분입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면 쳐다도 보지 말아라? 에헤이, 아니죠.”

탁.

손가락으로 눌러 멈춰 세우자, 펜촉이 정확히 황자가 앉아 있던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 정도로 대단한 나무엔 매달려라도 봐야죠. 안 그렇습니까? 필요하다면 양분도 날라드리고, 잡초도 뽑아드리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이 나무를 키운 사람 중엔 내가 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겠죠. 그거면 됩니다.”

그 말에 크리스티나의 차갑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더라도, 일단 의도를 알았으니 더 나무랄 건 없었다.

대신 그녀는 마르젠이 한 말 중 한 가지를 정정했다.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야.”

“……?”

멈칫.

크리스티나가 고운 손을 뻗어 펜을 돌려세웠다. 촉과 대가 정반대로 돌려졌다.

“너와 나는 전하께서 하시는 선택을 따른다. 그게 신하 아니던가?”

저 오만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복종을 말한다.

마르젠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킥킥 웃었다.

“…….”

그리고 그들 사이에 존재감 없이 끼어 있던 아벨만이 겁먹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역시 정령이 있으면 길게 돌아갈 일도 이렇게 금방 해결되는군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92년만 모쏠로 사시면...! 쿨럭;;

아참, 그리고... 이그레트 1부가 생각보다 짧아질 계획입니다.

연재초반에 구상했던 폼에 조금(?) 변동이...ㅎ

1부가 <학원생활+정체성 찾기>가 주내용이었다면,

2부에서는 <졸업후+모험>이 주류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잠깐씩 떡밥이 나온 해동이나 사방신이라든지, 물질계 정령 등 다양한 이야기가 포함됩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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