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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
황궁은 넓었다.
갖가지 명목으로 지어진 궁만 해도 크고 작은 것을 합치자면 열 손가락에 또 열 손가락을 더해도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마차가 다니는 차로와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따로 구분지어 놓여 있었다.
인도에는 하얀 자갈을 깔아두었고 양옆으로 제국 국화(國花)인 황색 장미가 가득 피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치는 화원은 금으로 채워놓은 호수 같았다.
봄 햇살에 바삭하게 달궈진 장미향이 달았다.
“생각해 보면 말이다.”
느린 걸음으로 앞장서던 쥬다스가 꽃밭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스스로 좋은 것을 쫓는 것보다, 더 싫은 것을 피해 덜 싫은 것을 택하며 살아왔지 무어냐.”
흰나비가 팔랑팔랑 날아와 근처의 장미에 내려앉았다. 쥬다스는 그에 시선을 주었다.
하물며 저 나비조차 수없이 늘어선 꽃 중에 마음에 드는 꽃을 찾아 꿀을 얻는다.
“쟁반 위에 사탕이 종류 별로 있었다. 아무나 골라먹을 수 있는 사탕이었지. 나는 고르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 남은 하나가 내 몫이 되었단다.”
욕심이 없다는 말은 즉 수동적이란 말과도 같았다. 스스로 골라본 적 없는 삶이었다.
주면 받고, 찌르면 찔렸으며, 썩 싫은 게 아니라면 모조리 수용했다.
그가 가진 힘은 구원이 될 수도 있고 재앙이 될 수도 있었으니,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수용하는 게 옳다 여겼다.
섣불리 분노를 표출하여 모든 걸 잃느니 불합리를 수용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랬던 그가 유일하게 선택한 행동이 있다면 그건 바로 ‘포기’였다.
더 상처를 입느니 바라던 삶을 포기하는 편이 옳았다. 과거에 그는 그리 여겼다.
바이칼이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어, 그럼 전하께서 좋아하는 맛은 그중 어떤 것이었습니까?”
“…….”
꼭 무언가를 좋아해야 하는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그 자신조차 관심 없던 욕심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욕심이란 긍정과 부정의 속성을 모두 띠고 있는 인간 행동의 원동력이다.
쥬다스는 지금에 와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결여되어 있던 일부가 살아나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래도 지금 바이칼이 보기에 사탕 이야기를 하는 쥬다스는 제법 또래 아이 같았다.
“그중엔 없었지만 박하사탕이란다. 향이 정말 좋더구나.”
‘……아니, 의외로 어르신 취향…….’
바이칼은 어색하게 뒷목을 매만지며 조금 전의 감상을 취소했다.
쥬다스는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이제 선택함에 있어 ‘덜 싫은 것’이 아닌 ‘좋은 것’을 고르고자 한단다. 빼앗긴 게 있다면 되찾아오고, 내 하고자 하는 일에 욕심을 낼 것이며.”
에단과 바이칼은 조용히 그 말을 경청했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 피를 볼지도 모른다. 괜찮겠느냐.”
전에 없이 단호한 눈이었다. 황자는 각오를 정했다. 그리고 그 각오를 두 사람에게 솔직히 열어두고 마지막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단호한 일면 너머로 자신들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함을 엿보았다.
“예, 신(臣)은 전하께서 쓰실 검이 되고자 합니다.”
에단이 먼저 답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명확히 뜻을 정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바이칼은 의외로 선뜻 동의를 표했다.
“예, 뭐. 전 사실 정계에 크게 관심이 없긴 했습니다. 보통은 힘이 있어도 써야 할 데에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저도 귀족이지만 지배하는 자들은 추구하는 바가 좀 성질에 안 맞더라고요.”
아직 십 대 소년답게 개방된 사상이었다. 그는 연구를 할 때에도 혁명학파를 주로 추구하는 편이었다.
한때 프리드가 만든 학파에 가입하고자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령술을 쓴다는 점만 가려놓고 본다면 그의 이론과 사상은 바이칼의 성향과 딱 일치했다.
그래서 학파의 수장이 사령술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바이칼은 크게 실망했다.
“힘이 있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앞으로 흘릴 피에 신경 쓰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전에 보여드린 과오를 용서해 주신다면 저 역시 전하를 따르고 싶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의 1황자는 일종의 정의였다.
힘을 가졌으나 쓸데없는 피를 보지 않으려 하며, 그렇다고 뻔히 목을 노리는 적을 봐주지만은 않는 단호함이 있었다. 또한 격 높은 자리에 걸맞은 품위가 있었으며 현명했다.
그로 인해 배운 점도 많았다. 바이칼은 한때 멸시하고 조롱했던 그 앞에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구나.”
쥬다스는 그들의 충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때 황제 직속 기사가 그들보다 조금 뒤에서 쥬다스의 뒤를 따르던 시종 로한에게 무언가를 전달했다.
로한이 살짝 표정을 굳히며 이를 제 주인에게로 다가가 전했다.
“전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황제는 쥬다스를 황실 미술관으로 불렀다. 이번에는 독대를 하고자 함이었다.
입구까지 따라온 에단과 바이칼은 밖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들을 뒤로하고 미술관으로 들어가자 푸른 수정을 섞어 마치 얼음 조각처럼 빛나는 복도가 보였다.
쥬다스는 천천히 이 복도 위로 걸어갔다.
건물 내부는 가히 장관이었다. 자연물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인공미가 흘렀다.
마법 전구로 밝힌 등불이며 색깔을 입힌 유리, 아름답게 깎아놓은 수정 기둥 등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신비롭게 돋웠다.
벽부터 천장까지 미술관 전체가 유리와 수정으로 조화롭게 지어져 있었으며 유리마다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형형색색의 빛깔이 들어 있었다.
또한 특수 제작된 이 유리는 관내에서는 밖이 투명하게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일방경이었다. 이곳에 전시된 모든 작품은 황족만 관람할 수 있었다.
쥬다스는 천천히 벽에 걸린 그림을 훑어보았다.
‘천사…… 인간…… 전쟁.’
주로 신성과 인간을 접목시켜 그린 그림이 많았다. 전쟁이나 죽음처럼 어두운 측면에 천사와 빛줄기를 그려 넣어 희망을 새기고 신성을 부각시켰다.
수도에 교황청을 세우고 그 신성을 국교로 삼아 국력을 드높인 루바르잔 제국다운 작품들이었다.
모든 그림은 화가에 대한 단서 없이 제목과 그린 날짜만 적어 익명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주로 타락보다는 구원이, 전쟁은 승리로 이끌어내는 게 작품의 주제였다.
벌거벗은 인간이 어둠 속에서 빛이 가득한 하늘을 향해 간절히 손을 뻗고 있는 그림을 지나친 다음, 쥬다스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소재가 뱀이었다. 천사도 빛줄기도 없었다. 새빨간 혀를 날름이며 무덤을 에워싼 거대한 뱀이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새카만 먹물로 뒤덮였으며 무덤 뒤로는 일어난 시체들이 휑하게 빈 눈구멍을 드러내놓고 몰려드는 장면이었다.
‘사령술.’
그림이 상징하는 바를 알아본 쥬다스의 금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독 이 그림만 이질적이었다.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화가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앞에 멈춰 뚫어져라 그림을 응시하던 그의 귓가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동류로 가득한 무리에서 홀로 이질적인 것은 눈에 띄게 마련이지.”
“……존귀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둘뿐인 자리였으니 ‘아버지’라 칭해도 좋았지만 쥬다스는 군신 간의 예를 갖추었다. 황제 역시 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마치 제국을 지배하는 믿음이 하늘에 닿아 있고, 생명이 죽음을 배척하듯. 무릇 살아 있는 자는 죽음의 권속을 두려워할지니.”
“…….”
“이 아름다운 작품들 중 제일 추악한 모습을 담은 화폭인데도 결국 이 앞에 멈춰 설 수밖에 없다.”
그는 황제의 말에 동의했다.
평화와 경외를 가져다주는 그림 사이에서 유독 홀로 죽음과 저주를 그린 저 그림은 홀로 거북했으며 그 거북함을 느끼는 한, 사람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었다.
하나는 이를 무시하려 애쓰며 억지로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떠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조금 전 쥬다스 자신처럼 그 앞에 머물러 관찰하게 된다.
황제는 그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까마귀 떼에 섞인 백로든, 백로 떼에 섞여든 까마귀든 이형은 주목을 받게 되어 있다. 좋은 관심이든 나쁜 관심이든 만인의 시선이 그 뒤를 따르지.”
언뜻 감상과도 같았으나 그림 얘기가 아니었다.
“너는 그중 어느 쪽이었겠느냐. 혹 둘 다였던가.”
달그락.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었으므로 황제는 곧장 그림 옆의 벽장으로 손을 뻗었다.
황실 미술관은 황족만이 관람하는 특별한 시설이었으므로 칸마다 벽장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안에 귀한 와인과 잔이 들어 있었다.
원할 때면 언제든 꺼내 마실 수 있도록 시원한 온도로 보관되고 있는 와인은 흔히 볼 수 없는 고가의 품목이었다.
그는 잔도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열두 살. 그래, 아쉽게도 술을 마실 나이는 아니군.”
두 잔의 와인을 따라놓고 쥬다스를 슥 내려다본 황제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알면서도 두 잔을 따른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쥬다스를 향해 보란 듯 잔을 내려보였다.
우웅.
황제가 들고 있는 잔 하나가 갑작스럽게 빛에 휩싸였다.
“……!”
쥬다스의 금안에 드물게 놀람이 깃들었다.
‘연금술?’
물체가 가진 속성을 치환하고 추구하는 바를 이룬다.
연금술, 생모인 ‘하윤 리’의 나라에서 유일하게 사용하는 특이한 이능이었다.
요즘에야 제국의 속국으로 도움을 받고 있는 입장인지라 여러모로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해동 자체는 그리 개방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특히 연금술의 경우 술법에 필요한 수식과 이론이 몹시 복잡하고 어려워 타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활용 범위가 넓지 않다고 알려져 연구도 미진한 분야였다.
그런 이능을 하윤 리 본인도 아니고 황제가 익혔으리라곤 쥬다스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잔을 받으라.”
“……예.”
쥬다스는 놀라움을 속으로 감추며 황제가 건넨 잔을 받아 들었다. 들여다본 잔에는 와인 대신 따끈한 코코아가 들어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와인을 머금고 한참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하윤’은,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컸다. 쥬다스는 황제가 굳이 자신의 앞에서 보란 듯이 연금술을 시연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곤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음료는 따뜻했다.
“그녀의 고국에선 인체에 술법을 사용하는 걸 금지시켰다. 그리고 하윤은 눈을 감는다 해도 그 가르침을 어기지 않을 만큼 순수한 여인이었지.”
그걸 그녀 몰래 멋대로 어긴 건 황제 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의지에 따라 1황자가 태어났다. 고결한 황조의 상징을 타고난 완벽한 황자였다.
“이 황실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황제는 작정하고 아들을 부른 셈이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죄를 지었고, 그 죗값을 이어받은 아들 앞이라 한들 제국을 다스리는 군주가 고개를 숙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황실의 정식 치유술사도 그녀의 병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 이유를 왜라 생각하느냐.”
“…….”
쥬다스는 하윤이 먹은 물약을 떠올렸다.
황정 치유술사가 짚어내지 못한다면 그 약은 마법이나 지독한 독약이 아니었다는 뜻이 되었다.
그는 빠르게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다 잠재웠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은 단 한 가지 가능성만이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황성을 다녀오는 길이다.’
‘혈통이니 존엄이니 떠들어대며 썩은 내를 풀풀 풍겨 대는 쓰레기들이 가득한 곳이지.’
‘마침 너에 대해서 재미있는 얘길 듣고 오는 길이거든.’
일전에 만났던 프리드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분명 투르케 사막으로 오기 전 황궁에 들렀다고 했다.
그렇다면 프리드가 이곳에서 접촉한 인물이 바로.
‘황후.’
쥬다스의 눈이 눈앞의 그림으로 향했다. 붉은 혀를 내밀고 있는 뱀이 시야 가득 보였다.
“사령술…….”
아이가 중얼거리는 걸 본 황제는 와인잔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알아내라. 너를 지키고자 피를 흘린 네 어미의 한은 너만이 풀 수 있을 터.”
하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버려 둔 잔혹한 자리.
전부 알고 있었다. 황제는 알면서도 서열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소 과정이 잔혹하더라도 그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우성 인자를 가려내고자 함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더 있는지는 본인만 알고 있을 진실이었다.
“……그러면 제게.”
쥬다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후계의 인을 주십시오.”
황태자 자리를 달라는 말이었다.
동색의 눈이 서로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당돌하기까지 한 어린 황자의 요구에 포식자의 승인이 떨어졌다.
“스스로 미끼가 될 셈이더냐. 좋다. 어디 한번 네 자리를 지킬 수 있는지 증명해 보라.”
1황자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이를 황후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 목을 베려함에 있어 서두르게 될 것이고, 뛰어난 이능을 가지고 있는 쥬다스를 확실히 빠르게 제거하기 위해선 황후 역시 숨겨둔 패를 꺼낼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포석도 없는 지금, 황태자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는 건 제 목숨을 담보로 적을 도발하겠다는 의지였다.
하고자 하는 대화를 마친 황제가 자리를 떠났지만 쥬다스는 여전히 뱀이 그려진 그림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결론 : 자아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영혼을 공유했으니 빙의보다는 환생이 맞습니다.
이 부분은 이그레트가 사기캐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전생+현생을 전부 자각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 굳건한 할아버님ㅎㅎ;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참, 노란손 님과 애쉬 님께서 팬아트를 보내주셨습니다.ㅠㅠ 곧 공지에 추가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아라 서버가 폭주해서 글이 안올라가네요ㅠㅠ; 이건 내일 올리라는 계시인가...!)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