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63화 (63/252)

0063 / 0240 ----------------------------------------------

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

내내 어깨 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유니가 그 대신 표정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와, 저 인간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게 분명해.」

「에에엥, 피가 없는 인간도 있다요?」

「그러니까 인간도 아니란 소리야.」

「……!?」

유니와 토니의 호들갑에 쥬다스는 쓰게 웃고 들고 있던 코코아를 홀짝 목으로 넘겼다.

“……달구나.”

황제의 생각처럼 보통 열두 살 어린아이일 수 없는 그에게는, 지독하게 달았다. 단맛이 지나치면 오히려 쓰게 느껴지는 것처럼.

* * *

그날 저녁, 루바르잔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황제가 황태자위에 올릴 후계자로 1황자를 언급한 탓이었다. 공식 발표는 아니었고 사석에서 이루어진 선언이었으나 그 파급력은 상당했다.

지배계층은 단순히 서로 견제하던 수준에서 급격히 그 흐름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순풍을 타고 항해하던 배가 급류를 만나 그 방향이 전혀 엉뚱한 쪽으로 꺾였다.

중립에 서 있던 귀족들이야 크게 반발하지 않고 황제의 뜻에 순종했다.

하지만 황후의 손에 매여 있는 귀족들은 바위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도저도 반응하지 않고 서로 음습한 시선을 교류했다.

1황자가 황태자 자리에 오를 것이란 소문은 다음 날 아침이 될 때 즈음에는 수도를 비롯해 그 인접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이를 접한 사람들은 크게 술렁였다.

‘1황자? 3황자 전하가 아니라?’

‘1황자는 힘없는 도자기 인형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간 침몰한 수준이 깊었던 만큼 당연히 소문에 더해 의문이 일었고, 한발 늦게 최근 1황자의 동향에 대한 소문이 추가적으로 따라붙었다.

‘사실은 힘을 숨기고 있었다더라.’

루바흐에서 보여준 뛰어난 성적과 그를 따르는 인재들에 대한 소문도 함께 돌고 있었다.

특히 그가 가진 이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엄청난 것이었다.

자연계 3속성을 한꺼번에 다루는 정령술사.

마치 제국에서 별처럼 떠올라 지금은 종적을 감춘 대현자 이그레트가 아직도 위인으로 칭송받듯, 정령의 힘이란 늘 제국민들에게 경외를 안겨주었다.

그에 따라 무수한 시선이 1황자에게로 향했다. 거기엔 긍정과 부정이 뒤섞여 있었으나 수면 위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소식을 접하고 놀란 건 그를 따라온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에단과 바이칼은 그가 미리 각오를 언질한 바가 있어 비교적 침착했지만 나머지 셋은 상당히 놀라워했다.

그중 크리스티나는 쥬다스의 결단을 듣고 걱정스럽게 그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역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게 틀림없어.’

그녀가 알기로 본디 쥬다스는 먼저 나서는 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도 아직 3황자와 맞붙기에는 일렀다. 3황자의 외척 세력인 캐슬롯 후작가를 중심으로 하여 지배 계층의 큰 축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1황자는 정식으로 따르는 세력이 아예 없다시피 했다.

에단이나 크리스티나가 아무리 공작가 자제라 한들 그들은 아직 아이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층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황제의 이능을 물려받아 마법에 조예가 깊은 2황자가 기대를 받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좀 더 힘을 기르고 세력을 모을 때였다.

물론 예상보다 결단이 빨랐을 뿐이지 크리스티나는 그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는 자체는 당연하다 여겼다.

걱정되는 건 그 결단을 시기보다 앞당겨 이행하도록 쥬다스를 재촉한 정체 모를 사건들이었다.

“하.”

크리스티나는 답답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뱉었다. 그러다 돌아본 쥬다스와 허공에서 시선이 딱 마주쳤다.

한숨을 쉬던 입을 닫고 바라보자 황자는 평소처럼 빙그레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

역시 저 영민한 황자는 자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다.

오히려 걱정에 빠져 있는 그들을 다독여 주는 부드러운 음성에 크리스티나는 조금 울컥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심리를 겉으로 드러낼 만큼 어수룩한 소녀가 아니었다. 고양된 감정을 티내지 않으며 겉으로나마 냉철을 유지했다.

공식적인 태자 책봉식은 루바흐의 한 학기가 끝나는 7월로 잡혔다. 그때까지 이들은 루바흐로 돌아가 학업에 정진하게 된다.

1황자에게 짧게나마 내려진 준비 기간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교복을 차려입은 쥬다스는 일행과 함께 포탈로 향했다. 아들이 떠나는 날이었지만 황제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그만큼 바쁘기도 했지만 일일이 오고 가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한 면모이기도 했다.

장엄한 포탈 관리실에 도착한 일행은 그 앞에서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쥬다스가 대표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다른 아이들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3황자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난 황후는 우아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벌써 떠나는 겝니까, 황자? 좀 더 머문다면 좋았을 것을요.”

황제의 부인이 되기 전 이름은 ‘사야 캐슬롯’.

위명이 드높은 캐슬롯 후작가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극진한 관리를 받고 자란 황후는 제국에서 추구하는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

고고하고 선명한 이목구비는 물론이거니와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그녀의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으며 체형 역시 처녀처럼 늘씬했다.

“우리 황자가 모처럼 학우들을 데려온 참인데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보내다니. 이 사람은 정말 아쉽습니다.”

그녀는 매우 안타까운 낯을 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진심이었다.

1황자가 황궁에 머무는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그를 처리하는 시간이 단축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후는 쥬다스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기 전에 그를 제거하고자 했으므로 그 과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루바흐처럼 관리가 철저하며 눈이 닿지 않는 장소에선 아무래도 손을 쓰기가 좀 더 복잡해진다. 그렇다 한들 황후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리는 없었다.

속내야 어찌 되었든 겉으로 만큼은 정녕 어린 황자의 출궁을 안타까워하는 황후의 낯빛이었으니 지켜보는 이들은 아무도 그 내막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루바흐의 교복을 입고 있는 여섯 아이만 그 진실을 꿰뚫어 볼 뿐이었다.

“하면, 책봉식 때 뵙겠습니다.”

“그러지요, 황자.”

책봉식이란 말에 황후의 눈이 차게 굳었다. 하지만 웃는 입매만큼은 변하지 않고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서 있던 3황자 세이지도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다녀오세요.”

지난번의 그 표정 관리 실력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 건네는 형식적인 인사였다.

두 사람의 배웅 아닌 배웅을 뒤로하고 일행은 포탈에 올랐다. 굳이 쥬다스가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황실 정식 정령술사가 포탈의 동력을 증폭시켜 주었다.

곧장 좌표를 루바흐 학원으로 잡은 그들은 검게 진동하는 포탈로 천천히 진입했다.

진입하기 직전 살짝 돌아본 쥬다스의 시야에 고혹적으로 웃고 있는 황후의 붉은 입술이 보였다.

‘……수 있으면.’

그녀의 입 모양을 읽어낸 쥬다스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고 포탈에 들어섰다.

콰우우우.

검은 마력이 그들을 삼키는 걸 보며 황후는 미소 짓고 있던 입꼬리를 서서히 내렸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면야 환영해 드리지요. 황자.’

“……그런데 어머니.”

황후는 자애로운 얼굴로 자신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9살 난 아들은 또래보다 영특했으며 어미의 말을 잘 따르는 착실한 성향이었다.

세이지는 조금 우물쭈물하다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형님은…… 정말 ‘가짜’가 맞는 거지요?”

“……세이지.”

황후는 사랑스러운 손길로 아이의 옷깃을 정돈해 주었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 겝니까. 내 늘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가요.”

자상한 어투와는 다르게 날이 선 눈빛을 마주본 세이지는 입을 핫 다물었다.

그의 어머니는 1황자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면서 결코 바깥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당부했었다.

금기를 어긴 느낌에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세이지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금술로 만들어진 가짜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영혼이 없는 인형 주제에 화를 내기도 하는 거야?’

혼란스러웠다.

빗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고 가만 자신을 바라보던 1황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무덤덤해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화를 내는 듯하여 더 따질 수가 없었다.

‘하나 나는 죽지 않고 이리 살아 있지’.

그리 말하던 쥬다스는 영혼이 없는 인형 따위와는 분명 달랐다.

그걸 본 세이지는 처음으로 어미의 말에 의심을 품었다.

“혹시 아니면 어떡하죠, 어머니?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다면요?”

“…….”

아들의 의구심 어린 금안에 황후는 조용히 그 볼을 쓰다듬었다.

“세이지……. 이 어미가 거짓을 고했다는 말인가요.”

“그, 그 뜻이 아니라.”

“혹 그가 가엾나요?”

가여웠다. 세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자라온 세이지는 밝고 활달했으며 당연한 순리대로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강하게 가진 아이였다.

그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1황자는 어미의 말대로 혐오스러운 황실의 수치기도 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동정을 줄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욕심에 의해 태어나 제 생모의 손에 학대당하다 죽을 뻔했다.

자식을 죽이려던 모친은 자결해 버렸으며 이 세상에 그의 편이라곤 아무도 없다.

세이지는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그를 동정했다.

“게다가 그날 형님이…….”

울 것 같은 얼굴이었어요, 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여린 어깨에 금장식으로 손톱을 꾸민 황후의 손이 얹어졌다.

작은 어깨만큼이나 마음도 약하다. 이제 겨우 9살인 3황자는 아직 큰일을 이루기에 어렸다.

‘조금 더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잠깐의 침묵 후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이에 응답했다.

“그날은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죠. 그리 무턱대고 화부터 내는 상대를 가엾게 여길 수 있다니, 세이지는 마음이 참 넓군요. 과연 군주의 아들답습니다.”

어미의 칭찬에 세이지는 안도하며 활짝 웃었다.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여 준 황후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음에 만나면 그의 허물과 무례를 전부 용서하기로 합시다. 그럼 마음이 편하겠어요?”

“네! 어머니.”

3황자는 당차게 대답했고 황후는 물에 기름 뜨듯 가벼운 미소를 둥실둥실 걸쳤다.

이 황실에서 아이의 생각처럼 아름다운 결말이란 없다.

용서, 화합. 그게 가능한 건 어느 한 쪽이 죽어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때리라.

* * *

한편 루바흐에는 1황자 일행이 자리를 비운 며칠 사이 특별한 손님이 하나 찾아와 있었다.

중년 특유의 중후함을 풍기는 인상의 사내였는데, 겉보기와 달리 이미 60대 후반의 고령이었다.

이능을 가진 자라면 본래 나이보다 젊어 보이거나 일반적인 수명에 비해 오래 살기도 했으니 아주 이상할 정도의 동안은 아니었다.

그는 루바흐로부터 교사 자격으로 초청받아 정식 임명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겨울바람의 정령 비비를 머리에 얹은 채 그에게 다가간 리베흐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누구?”

“음?”

정령학 연구소의 입구에 선 채 멀거니 이를 구경하고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리베흐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안녕, 꼬마야.”

낯을 가리는 7살 아이답게 리베흐는 움찔 한 걸음 물러섰다.

“아, 내 이름은 코르토반 옌이라 한단다. 그냥 ‘콜’이라고도 하고.”

“……콜?”

“그래, 곧 여기 선생님이 될 게야.”

연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희끗한 흰머리가 엿보였다. 길고 가는 눈매와 한쪽 눈에 끼운 모노클이 지적인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차분한 코르토반의 분위기를 마주한 리베흐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닮았어.”

“음?”

“선배 오빠랑.”

희한한 호칭이었으나 남자는 리베흐가 뜻하는 게 루바흐 학원생임을 눈치채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닮은 친구가 있나 보구나. 젊은 학생들과 비슷해 보인다니 이거 영광…….”

“얼굴 말고.”

“……으응?”

7살 소녀는 제법 신랄한 구석이 있었다.

“느낌, 기운? 그런 거.”

“호오.”

코르토반은 무릎을 두들기며 짧게 기른 수염을 매만졌다. 그가 보기에 이 어린 소녀에겐 정령술에 대해 굉장한 재능이 있었다.

그녀와 계약한 겨울바람의 정령만 해도 최상급의 존재였다. 주변을 맴도는 찬 기운을 느끼며 그는 작게 감탄했다.

“그렇다면 그 친구도 정령술사인가 보구만.”

코르토반 옌, 자연계 최상급 정령 2속성과 계약한 듀얼 서머너.

그는 어릴 적 이그레트를 스승으로 따르길 자청했던 제자이며, 스승이 종적을 감추자 혼자서나마 열심히 그 재능을 발굴하여 나라 발전에 이바지한 유능한 인재 중 하나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지난 편에서 떡밥이 다 회수된 건 아닙니다. '쥬다스'의 과거가 드러났을 뿐 프리드나 정령들이 보인 수상함(..)은 좀 더 지나서 해소됩니다.

(+본래 환생개념이 없는 세계관이 맞습니다. 대부분의 "보통" 인간은 환생을 하지 않습니다. 전부 과거에 관련된 일이라 전개상 그다지 중요한 장치는 아니지만 궁금해하시는 독자님께서 계셔서 덧붙여봅니다.ㅎㅎ)

황궁 에피소드는 이번 챕터 안에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무거운 부분 끝내고 얼른 애들끼리 뛰노는(...) 루바흐로 돌려보내고 싶네요.ㅠㅠ

...실은 제가 새드울렁증이 있어서...(?)

매번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