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64화 (6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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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허물벗기

무사히 루바흐로 돌아온 쥬다스 일행은 각자 여독을 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열흘 만에 다시 찾은 숙소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아침에 세탁하여 갈아놓은 하얀 이불 위에 앉자, 황궁에서보다 훨씬 안락한 느낌이 찾아왔다.

루바흐도 역시 하나의 작은 사회인 만큼 마냥 평화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슬픈 추억으로 가득하던 황궁에 비하면 온실에 들어온 것처럼 주변 공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애초에 홀로 지내는 걸 더 선호했던 이그레트였으므로, 적어도 자신의 숙소에서 혼자 쉬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이젠 제법 여기도 익숙해지는 모양이야.”

「……너한테 편하다면 우리도 좋아.」

어깨에서 내려온 유니가 하얀 이불 위에 포록 내려앉았다. 유니처럼 크기를 줄여 따라다니던 카니 역시 그 곁에 함께 내려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 보니 아이들이 많던데, 여긴 무얼 하는 곳인가요?」

「학교다요!」

「……학교?」

카니는 사슴 같은 다홍색 눈망울을 깜빡이다 아, 하고 손바닥을 마주쳤다.

「‘집단 단일체제 교육소’ 말이죠?」

「……뜻은 얼추 맞는데 어감이 좀.」

「흐흥~ 아무렴 어때요. 아, 그럼 옛날처럼 선생님 역인가요?」

“허허, 학생이란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쥬다스를 보며 카니가 신기한 눈을 했다.

「이그레트에게 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인간이 있단 말이에요?」

“으음, 카니. 이 세상에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걸 알지 않느냐. 또한 꼭 지식이 아니더라도 사람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단다.”

그가 ‘이그레트’였던 시절, 사람들 틈에서 떠난 게 약 60세를 전후해서였다.

변해가는 주변인들과 쓰디쓴 배신, 그리고 그의 이능을 이용하고자 하는 검은 손길에 지쳐 모든 걸 포기했던 때.

그즈음 제자가 되겠다며 쫄랑쫄랑 쫓아다니던 한 아이가 있긴 했다.

딱 지금의 쥬다스와 주변 아이들 정도 또래였던 그 소년은 정령술에도 꽤 큰 재능을 보였고 열의도 강한 편이었다.

이미 사람들 틈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이그레트는 제자를 거두지 않으려 했지만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그것도 제법 영향력 큰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아이였건만 계속되는 내침에도 굴하지 않고 그를 따르며 ‘스승님’이라고 불렀다.

종래엔 한 고집하던 이그레트도 묵인할 지경까지 따라다녔으니 참 굉장한 집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료였던 자들로부터 배신의 칼날이 꽂혔을 때 이 모든 걸 지켜본 것도 그 아이였다.

아이는 하늘이 무너진 듯 울었고 펑펑 우는 낯을 달래줄 체력과 마음이 전부 남아 있지 않았던 이그레트는 피가 흐르는 상처를 품은 채 그대로 종적을 감추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나는 진실로 부족한 인간이었구나.’

한 번 죽고 나서야 자신이 보지 못했던 관계가 보였다. 제 상처 돌보기 급급하여 다른 이 가슴에 난 상처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본래 남의 베인 상처보다 자기 새끼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이라지만, 그는 그간 유독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고작해야 우물 안 개구리였던 셈이야.”

이제와 좀 더 넓은 세상이 보였다. 모든 기억을 통틀어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였으나 결국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쥬다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너무도 부끄러웠다.

문득 유니가 제 무릎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난 네가 계속 우물 안에 있는 것도 좋은데.」

“…….”

「아, 아니, 그냥. 지금은 왠지 우리만의 이그레트란 기분이 들어서. 근데 네가 이 우물에서 나가고 나면…….」

녹색으로 빛나는 바람의 정령은 약간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으음, 그러면 뭔가 허무하달까? 아, 허전! 허전할 것 같아. 왜냐면 우린 너라는 맹목적인 우물에서 나가지 않을 테니까.」

유니의 말에 다른 정령들도 모두 동조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연을 아우르며 계약자의 소망을 듣는 정령이란 그 섭리가 인간의 생과는 달랐다.

타인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타인의 잣대에 신경 쓸 이유도 없다. 그저, 지금까지의 이그레트가 그래 왔듯 흘러야 할 때 흐르고 멈춰야 할 때 멈출 뿐이었다.

아마도 정령들이 그라는 한 존재에 머물렀던 건 강렬한 동질감에 의한 이끌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만일 그가 그 동질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나간다 해도 이를 막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반해 있었으니 그가 어떻게 변하든 그 변화에 맞추어 움직이면 되었다.

다만 아주 조금.

「유니, 서운한 거다요?」

「……어……? 그런가? 조금은 그런 걸지도.」

아무리 평소에 투닥거렸던 사이라지만 같은 정령끼리라 그런지 토니는 유니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냈다.

시무룩한 바람의 정령왕을 빤히 쳐다보던 토니는 짧은 팔로 팔짱을 끼며 엣헴 헛기침을 했다.

「그거 ‘빈 둥지 증후군’이다요. 다 키운 새끼가 둥지를 떠나면 남은 어미 새가 느끼는 허전함을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요!」

「빈 둥지…….」

멍하니 토니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던 유니는 부드러운 눈으로 자신들이 하는 얘기를 가만 듣고 있는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따뜻함이 깃든 금안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유니는 풋 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리곤 샐쭉하니 토니를 향해 눈을 흘겼다.

「……나도 알거든? 것보다 토니 주제에 뭘 그렇게 똑똑하게 떠들고 있어?」

「에엥, 땅 무시하지 마라요! 바람만큼은 아니어도 알 건 다 안다요!」

「웃겨 정말. 지 나이도 못 세는 게.」

「……!」

인간들의 기준으로는 나이를 못 세는 것이 사실이었기에 말문이 막힌 토니가 어벙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쥬다스는 이내 빼앵 터진 토니와 깔깔거리는 유니, 말똥말똥 지켜보던 카니를 양손에 받쳐 안아들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엎드려 있던 루니 앞에 꿇어앉았다.

푸른 늑대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가까이 이마를 가져다댄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고맙다. 늘 곁에 있어준 너희에게 말도 못하게 고마워. 그리고 이런 나를 필요로 해주어서,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보듬어 주어서. 지금 내게 소원이 있다면.”

「…….」

상처투성이였던 새끼 백로에게 어느덧 하늘을 날 수 있는 깨끗한 깃이 돋았다.

그리고 커다랗고 깨끗한 날개를 펼쳐 자신을 돌보아준 작은 정령들을 다시금 덮어준다.

자연계를 다스리는 4원소 정령왕들은 이날 동시에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너희와 친구로 남을 수 있기를.”

「우린-」

결코 이 아름다운 영혼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라고.

* * *

쥬다스는 황궁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정상적으로 수업에 출석했다.

그가 황태자 자리에 오를 것이란 소문은 이미 루바흐에도 퍼져 있었기에 대부분의 학생은 이제 그를 어려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잘 보이려 애를 쓰긴 했지만 이제 함부로 잘못 보였다가는 오히려 아무 짓도 안 하느니만 못할 거라 여기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게다가 학생들은 모두 과거 그를 조롱하거나 혹은 이를 방관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안면몰수하고 꼬리를 흔들기 어려웠다.

그 바람에 똥마려운 개처럼 주변을 서성일 뿐 더 이상 막무가내로 몰려들지 못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쥬다스는 편안하게 수업을 들었다.

몸이 건강해지니 봉술 수업에서도 그간 열심히 머릿속에 익혀둔 성과를 톡톡히 보였다.

그간 속으로만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해본 동작이 실제로 재현이 가능해지니 완벽한 자세로 수업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타고난 무인으로서 밥 먹는 것보다 무술 훈련을 더 근접한 일상으로 여겨온 에단만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를 상대로 그럴듯한 합을 맞출 수 있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문과 과목뿐 아니라 무예과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1황자는 이제 더 이상 못난 백로가 아니었다.

“음…….”

그런 그가 난처하게 턱을 짚도록 만든 곳이 있었다.

“왜? 요?”

리베흐가 연분홍 곱슬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이 정령학 연구소가 루바흐에서의 모든 일과를 훌륭하게 수행해 낸 쥬다스에게 복병을 안겨준 유일한 장소였다.

쥬다스는 난처한 눈으로 정령술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 틈에서 허허로이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콜.”

“어? 오빠도 알아요?”

물론 그가 기억하는 코르토반은 저렇게 흰머리가 나고 모노클을 낀 중후한 중년의 생김새가 아니었다.

당시 코르토반은 흰머리는커녕 주름살 하나 없던 십 대 소년이었다. 싹싹한 성격에 제자를 받지 않는 자신을 따라다니며 ‘스승님’이라 부르던 당돌한 아이.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며 쥬다스는 기묘한 감회에 젖었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으며 또한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 옛날에 콜에게서 느꼈던 정령의 기운은 무척 강한 것이었으니 당연히 최상급 정령까지는 계약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다른 도움 없이 불과 바람을 동시에 최상의 힘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열정과 노력이 뒷받침되었다는 뜻이었다.

정령술은 자질에 따라 그 능력치가 크게 달라지지만 이를 끌어 올리는 건 술사의 바람과 노력에 있었다.

어릴 적부터 끈질긴 구석이 있던 코르토반이 결국 불과 바람을 다루는 정상급 술사로 우뚝 자리매김한 걸 두 눈으로 보게 된 쥬다스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저 아이도 내게 버림받았다고 느꼈을까.’

그가 등을 찔려 쏟은 피와 어찌할 바 모르고 펑펑 울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등을 돌렸던 자신을 떠올리며 속으로나마 사죄했다.

그리고 똘망똘망 올려다보는 리베흐에게 마주 시선을 주었다.

과거 연이 있다 한들 지금은 아는 척하기도 뭐한 입장인지라 감회를 뒤로하고 이를 얼버무렸다.

“……예전에 이름을 들어본 적 있단다.”

“응, 네. 유명한 사람. 이사벨 선생님이 그랬어요.”

그 정도 능력이면 당연히 이름이 알려졌을 것이란 짐작대로 콜은 제국 내에서 이름난 정령술사였다.

본래 황실 정식 정령술사로 소임을 다하던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험한 일을 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루바흐의 교사로 업무를 바꾸었다.

마침 실체화하지 않고 자연 상태로 있던 정령들은 일제히 앗 하는 반응을 했다.

「익숙한데, 저 기운.」

「……예전에 봤던 꼬마로군.」

루니가 콧등을 찡긋거리며 콜의 기운을 읽었다.

당시 콜의 끈질김은 이그레트 외의 인간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는 정령들이 알아볼 정도였다.

정령들이 묘한 눈길로 주시하는 사이 콜도 쥬다스를 발견했다.

‘……저 아이는?’

마력을 몸에 쌓거나 훈련된 움직임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는 여타 이능과 다르게 정령술은 술사 본인이 숨기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 경지를 숨길 수 있었다.

다만 자질만큼은 감추기가 어려웠는데 최상급 정령을 2속성이나 계약한 콜은 특히 이에 대한 눈썰미가 좋았다.

한눈에 쥬다스가 가진 강대한 정령친화력을 알아본 콜이 조금 감탄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쥬다스가 황태자자리를 택함으로써 황후에게 선빵을 날렸습니다.(?)

이쯤에서 중간점검, 지금까지 나온 악역으로만 치면 최대 악역은 누굴까요?ㅎ

1. 프리드

2. 황후

3. 점쟁이할머니(?)

....저는 3...농담입니다. 쿨럭(...)

참, 이그레트1부는 카카오 기다리면무료에 등록된다고 합니다.ㅎ

저도 출판사 선생님께 전달받는 내용인지라 나머지 일정은 잘 모르겠고... 어... 따로 확정되는 부분이 있으면 종종 추가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하고도 차가운 역설적인(?)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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