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5 / 0240 ----------------------------------------------
8장. 허물벗기
“반갑습니다. 오늘부로 ‘정령 실습’수업을 맡아 학생 여러분과 함께할 교사 코르토반 옌입니다.”
“콜 선생님.”
리베흐가 그를 가리키며 짤막하게 덧붙였다. 7살 소녀를 향해 호탕하게 웃어준 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기억해 주었구나, 꼬마 아가씨. 그 말대로, 간단히 콜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아직 10살이 되지 않은 리베흐는 정식으로 입학한 학생이 아니었으므로 학생 대 교사 신분이 성립되지 않았다.
다만 희귀한 정령술사로서의 자질이 뛰어났기에 학교 측에서 일찍부터 지원해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학생들 중 가장 꼬마인 게 사실이었기에 리베흐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꼬마 취급을 받아들였다.
자리를 비운 사이 약간이나마 친해져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본 쥬다스는 살짝 목례하며 답했다.
“예, 스승님. 쥬다스입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과 한때 잘 알았던 사람을 모르는 척 대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살면서 처음 겪는 기묘한 상황이었지만 쥬다스는 일단 현 상황에 맞는 태도로 태연하게 상대했다.
사실상 스승이 제자를 스승이라 부르는 황당한 광경이 벌어졌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한 사람과 정령 넷뿐이었다.
“예, 예에.”
루바흐에서 본래 신분 고하를 떠나 학생이 교사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쥬다스의 목례를 받은 콜은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함께 고개를 숙였다.
‘……뭐지? 이거 뭔가 굉장히 불편한데. 황자 전하이셔서 그런가?’
거의 본능처럼 불편을 느낀 콜의 속내에 혼란이 일었다.
황실 정식 정령술사로 일했던 그였기에 황족을 만남에 있어 크게 부담을 가질 리 없었다.
그러니 굳이 황자라는 존재를 앞에 두고 떨리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전무했다.
아리송한 시선으로 황자를 내려다보았으나 딱히 짚이는 점은 없었다. 오히려 따뜻함을 담고 부드럽게 빛나는 금안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해줄 뿐이었다.
그들은 마주본 채 허허롭게 웃었다. 곁에서 비비를 머리에 얹은 채 둘을 번갈아본 리베흐는 강한 정령의 기운뿐 아니라 그들이 닮아 있는 점을 한 가지 더 찾아냈다.
하지만 그 공통점을 단어로 정의하기는 무척 애매했다.
“……분위기? 뭘까?”
갸우뚱.
겨울바람의 정령 역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쥬다스를 마지막으로 모든 학생과 인사를 나눈 콜은 이사벨이 가르치는 이론 수업과 별개로 실습에 관련된 수업을 간단히 진행했다.
수업이라고 칭해지긴 했으나 P/N(Pass or Non pass)으로 학점이 인정되는 출석형 과목이었다.
이미 학기의 반이 지나간 상황에서 추가된 수업이니만큼 정식 교과목과는 차이가 있었다.
어찌 보면 정령술이란 이능을 지닌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추가 학점이자 배움의 기회를 늘려주는 특혜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특수 과목 중에 P/N수업이 추가되는 경우는 흔하진 않아도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학생들은 놀라기보단 기쁘게 추가 수업을 받아들였다.
더구나 실습 과목은 무예과로 따지자면 훈련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다.
상위의 술사가 안전성을 책임지고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이 실력을 늘리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본래 이론 수업 교사였던 이사벨이 보조로 참여했고 연구원 자격으로 함께 머물고 있는 아벨 역시 실습 과정에 참여했다.
“자, 학생 여러분. 정령을 다루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술사의 정신력입니다. 이 정신력을 요구하는 활동이 또 무엇이 있을 것 같습니까?”
“배고플 때 음식을 앞에 두고 참는 것?”
한 학생의 발언을 시작으로 너도 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정신력이 높으면 졸릴 때 참고 버틸 수 있습니다!”
“세계 역사서를 3시간 이상 읽는 거요.”
“복잡한 행동을 한 번에 해야 할 때?”
아직 십 대 아이들다운 순진한 발상이었다. 콜은 부드럽게 웃으며 모노클을 한 번 문질러 닦았다.
“여러분은 지금 정신력에 대한 개념이 너무 광범위합니다. 물론 일상에서 필요한 정신력도 있겠지만 우리가 정령술을 익힐 때 사용하는 정신력이란 좀 더 전문적이고, 때론 파괴적일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부드러운 어투였지만 내용만큼은 단호했다. 아직 정령이 품고 있는 무궁무진한 힘에 대해 체감하지 못했을 어린 학생들을 위해 콜은 다소 과격한 수업 방식을 택했다.
“이제부터 ‘세미-던전(Semi-Dungeon)’을 오픈할 겁니다. 세미 던전 안은 전부 마법으로 만들어진 홀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 던전은 각자 한 사람씩 활동구역이 주어지는 1인용입니다. 이 던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던전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보물 상자를 찾아 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콜이 품 안에서 작은 박스를 꺼내들었다. 사면이 검게 물든 손바닥만 한 박스였다.
“죽어서 나오는 방법이 있지요. 마법으로 꾸며진 환상이라지만 죽는 과정은 꽤 사실적이니 일부러 죽어서 나올 생각은 마시길 바랍니다.”
“…….”
처음 겪어보는 수업 방식에 학생들은 불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안심하라는 뜻에서 빙긋 웃어준 콜은 들고 있던 박스를 허공에 붕 띄웠다.
휘이잉.
최상급 바람의 힘이 주변을 감돌았다. 박스는 세미 던전을 저장해 둔 마법 도구였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시동어에 따라 컨트롤할 수 있으므로 간단히 활용 가능했다.
“스위치 온.”
콜이 시동어를 읊자 박스에서 하얀 빛이 확 솟구쳐 나오더니, 이내 커다란 문을 하나 형성해 냈다.
그는 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마치 포탈 내부처럼 마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포탈과 다른 점이라면 마력의 색깔이 흰색이라는 점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위험하다거나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싶으면 제가 개입하겠습니다. 실제 정신력 향상 훈련에 쓰이는 던전이니 불안해하실 필요는 없지만 진지하게 임해 주십시오.”
쥬다스는 예전에 이미 저 세미 던전을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무서울 법한 구조였지만 어차피 실제가 아닌 환상. 그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강제 정령 실체화.’
던전에 입장하는 순간 술사와 계약한 정령은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실체화한 채 따라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쥬다스는 자연체로 그 곁에 머물고 있던 네 정령을 슬쩍 돌아보았다.
멀뚱멀뚱.
“…….”
「왜애?」
가뜩이나 최근 프리드와의 일을 겪었던 그로서는 이들을 정령계로 돌려보내는 자체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는 4속 정령을 한 차례 빤히 응시한 그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어쩔 수 없나.’
어차피 다른 학생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아니라 각자 다른 공간에서 움직이는 1인용 던전이었다.
교사가 직접 던전에 개입하지 않는 이상에야 굳이 걸릴 일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빠른 시간 내에 보물 상자를 찾아 빠져나오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의 고민을 모르는 콜은 다들 겁에 질려 표정이 굳었다고만 여기고 따뜻한 음성으로 그들을 격려했다.
“자자, 막상 해보면 그리 무서운 체험은 아닐 겁니다. 한 사람씩 세미 던전에 입장해 주십시오.”
아이들은 주춤거리며 하얀색 던전입구로 다가갔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그 안에 발을 디딜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가장 용감하게 먼저 입장을 원하는 소녀가 있었다.
“으음, 꼬마 아가씨는 다음 기회에.”
“…….”
리베흐였다. 하지만 아무리 안전하게 설계된 마법 도구라고 해도 이제 겨우 7살 된 소녀를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콜의 제지에 불만스럽게 그를 올려다본 리베흐는 그 곁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순순히 뜻을 따라주는 소녀의 연분홍색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준 콜이 다시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자신들보다 어린 소녀가 먼저 나섰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아이들은 하나둘 용기 내어 던전 입구에 들어섰다.
하얀 문 너머로 발을 디디자 신기루처럼 학생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허공에 떠있는 박스 위로 숫자가 생겨났다.
<8>
던전에 입장한 총원을 표기하는 숫자였다. 아직 어린 리베흐를 제외하고 전원이 세미 던전에 입장했음을 확인한 콜은 팔짱을 낀 채 흥미롭게 박스를 응시했다.
“……자, 그럼 제국 최고라는 루바흐 학생들의 정신력을 기대해 보십시다.”
“어머, 부임 첫날부터 세미 던전이라니. 짓궂으시네요.”
본래 정령술 수업을 홀로 맡고 있던 이사벨이 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 걱정은 하지 않는 겝니까?”
“콜 선생님이 위험하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그랬지만. 정신력이 낮은 친구들은 다소 충격적일 수도…….”
이사벨은 땅의 정령 휴를 품에 안은 채 생글생글 웃었다.
“실례예요, 콜 선생님. 우리 아이들은 그 정도로 나약하지 않답니다.”
오랜 시간 정령술에 자질을 품은 학생들을 돌보아 온 그녀답게 확실한 믿음이었다.
* * *
하얀 마력에 휩싸여 세미 던전에 입장한 쥬다스는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제국 마법 연구팀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구 중 하나인 만큼 박스 안의 던전은 상당히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하얀색 타일을 이어붙인 벽이 한 방향으로 쭉 이어졌다.
등잔이 필요 없을 정도로 벽의 타일이 자체 발광하고 있었으므로 앞길은 환했다.
「어우,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마법 공간은 너무 불편해.」
「빨리 나가고 싶다요.」
「으응. 전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니까요.」
투덜거리는 정령들의 말처럼 이 던전 안에서 자연물이라곤 풀 한 포기 볼 수 없었다.
바닥은 벽과 같이 그저 매끈하고 단단한 타일로 구성되어 있었고 하늘을 볼 수 없도록 천장도 막혀 있었다.
자연물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자연계 정령들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은 평소 수준보다 떨어졌다.
물론 그가 다루는 4속 정령은 전부 정령왕이라는 특수 개체였기에 힘 사용에 크게 어려움을 느끼진 않았지만 전원 불쾌를 느끼고 있었다.
쥬다스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세미 던전이란, 즉 일반적인 던전과 달리 구조가 단순하여 트랩이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강력한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콜이 설명했던 대로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보물 상자를 찾기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 쉬운 던전이었다.
쉬이익.
건조한 공기를 가르고 날아오는 창살을 발견한 유니가 가볍게 돌풍을 일으켜 궤도를 꺾었다.
창살은 바닥에 수직으로 콰직 꽂혔다.
쥬다스는 꽂힌 창살과 앞을 가로막은 상대의 외형을 확인하고는 그 정체를 바로 맞췄다.
‘만티코어.’
날아와 박힌 것은 창살이 아니라 놈의 꼬리뼈였다.
목 주변으로 풍성하게 자란 흰 갈기며 사자를 닮은 몸통에 툭 튀어나온 주둥이는 영락없는 짐승이었지만 평범한 동물들과는 분명 달랐다.
이 만티코어는 일반적인 짐승이 아닌 높은 공격성과 흉포한 성질을 가진 몬스터 중 하나였다.
길게 늘어뜨린 꼬리 끝에는 가시처럼 돋아난 꼬리뼈가 줄기줄기 자라났다.
마치 투창을 하듯 꼬리뼈를 뽑아 순식간에 날리는 원거리 공격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정신력 훈련을 위한 박스에 들어 있을 만한 내용이 아닐 터인데.”
쥬다스는 긴장 대신 의아함을 느끼고 만티코어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들어온 세미 던전은 전투 능력 향상이 목적이 아니었다.
정신력 향상을 목표로 만들어진 박스 안에 만티코어 정도로 공격성이 높은 몬스터가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언가 이상했다.
‘일반적으로는 기껏해야 쟈칼이나 블랙베어 정도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꼬꼬마였던 제자가 늙어서 돌아왔고, 늙은 스승님이 꼬마가 되어서 돌아왔...응?(..)
아, 그보다 지난 화 악역투표는 제가 1등했습니다.ㅎ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더욱 충실한 흑막이 되어보겠습니다! (결심)
오늘 날씨가 무척 추웠지요. 내일은 더 춥다고 하네요ㄷㄷ
독자님들 모두 건강 잘 챙기시고, 즐거운 불금 보내시길 바랍니다.ㅎㅎ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