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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허물벗기
그러나 만티코어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곧장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놈의 공격은 꼬리뼈를 이용한 원거리 공격만이 다가 아니었다.
2중으로 자라나 주둥이 밖으로 튀어나온 이빨이며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가 전부 갖춰진 몬스터가 만티코어다.
“흠.”
이를 본 쥬다스는 가뿐히 손을 들어 올렸다.
화륵.
“케에엑!”
몬스터를 중심으로 화염이 치솟아 흡사 감옥처럼 불벽이 형성되었다.
불벽에 부딪혀 후끈한 화상과 함께 바닥에 나뒹군 만티코어는 벌떡 일어나 다시 돌격했다.
쿵! 쿠웅!
사자만한 몸집이 불벽을 뚫기 위해 돌격을 하니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냥 불길도 아니고 정령왕의 힘이 작용한 불벽이 단순 박치기만으로 뚫릴 리는 없었다.
나방처럼 불을 뚫으려 달려들던 만티코어는 결국 온몸이 시뻘겋게 그을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 만티코어를 내버려 둔 채 쥬다스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환상일 뿐이라지만 굳이 그 안에서 몸부림을 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면 해를 입지 않아도 될 ‘불의 감옥’이었다. 결국 제 목숨을 제 스스로 갉아먹은 격이다.
만티코어를 지나고 나자 오르막길이 나왔다.
빙글빙글 이어지는 원형계단을 밟고 오르자 파닥거리는 날갯소리와 함께 하나둘씩 깃털이 떨어져 내렸다.
파삭.
깃털이 내려앉은 부분은 마치 덜 익은 달걀노른자처럼 녹아 흐물흐물 흘렀다.
맹독으로 이루어진 독 깃털이었다. 바람의 보호를 받는 쥬다스에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자칫 끔찍한 상황으로 이어질 법한 장치였다.
「아무리 봐도 여기, 단순히 훈련용은 아닌 것 같아.」
「응, 내가 보기에도 영 아니네요.」
유니와 카니가 중얼거리기 무섭게 다음 상황이 일어났다.
삐이익―
경보음이 울리며 트랩이 발동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황했을 일이지만 쥬다스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물의 힘을 사용했다.
무섭게 파도치며 차오르던 워터트랩이 잠잠히 그 기세를 가라앉혔다.
층계 밑까지 차올라 찰랑이는 물결을 힐끗 내려다본 그는 이어 계단을 오르며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던전 난이도가 ‘자동’에 맞춰져 있는 모양이구나.”
「‘자동’?」
“던전에 입장한 자의 능력에 따라 박스가 자동으로 난이도를 조절하는 게지. 하나 이 자동 모드는 측정 오류에 따른 밸런스 붕괴가 일어나기 쉬워.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박스를 사용할 때에는 지정한 난이도가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도록 미리 맞춰 놓는 편이었다.
하지만 콜이 맡은 수업에는 어린 학생들이 대상이라 일괄 ‘자동’에 맡긴 것이다.
박스는 쥬다스가 가지고 있는 힘을 대략적으로 측정해 냈고, 그 수치가 완벽하진 않더라도 던전 난이도를 최고 수준으로 잡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 결과.
「우와앙! 엄청 바글바글하다요. 저게 다 뭐다요?」
「……응, 새 떼네.」
계단을 다 오르기가 무섭게 아까부터 깃털을 떨어뜨리던 조류들이 그를 발견하고 퍼더덕 날아들었다.
문제는 한두 마리 수준이 아니라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질 정도로 거대한 무리를 짓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가까이 온 조류들의 생김새는 단순히 새의 형상이 아니었다.
마법 연구팀에서 정식 기재한 이름은 ‘하르피아’. 날개와 하반신은 독수리의 것을 닮았지만 상반신은 인간 여성으로, 얼핏 보기에 천사와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날개 깃털에는 닿으면 곧장 녹아버리는 맹독이 스며있었고 손에 든 날카로운 창을 휘둘러 침입자를 공격했다.
쥬다스는 개미 떼처럼 몰려든 조류형 몬스터들을 향해 이번엔 땅의 기운을 발동시켰다.
쿠웅.
허공을 점령했던 새들이 아무것도 못해 보고 바닥에 콰득 추락해 버린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추락했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하르피아가 바닥에 널브러져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렸다.
눈에 보이는 공격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들의 몸통 위로는 강력한 중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날개가 있어봤자 철가루가 자석에 붙듯 땅이 끌어당기는 힘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쥬다스는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우수수 추락해 ‘끼익’거리는 하르피아 떼를 가뿐히 지나쳤다. 이어지는 길은 상당히 길었다.
그 앞으로도 특이한 몬스터나 트랩이 튀어나와 그를 공격했으며 대부분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날 수 있었지만 던전을 나가기 위한 열쇠인 보물 상자가 도통 보이질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시간이 꽤 흘렀음을 감지한 쥬다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턱을 짚었다.
‘이대로라면 시간이 너무 걸리는데.’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곤란했다.
그의 짐작대로 이미 다른 7명의 학생은 미션을 클리어하고 전원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만약 너무 오래 나오지 않는 황자를 염려한 콜이 박스 안으로 들어와 4속성 정령들이 실체화한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었다.
코르토반 옌은 제자를 받지 않으려던 이그레트에게 막무가내로 찾아와 받아줄 때까지 따라다닌 소년이었다.
당시에도 정령들은 지금처럼 그의 곁을 딱 붙어 지키고 있었고 콜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니 4속 정령의 생김새를 아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고, 다시 마주한다면 분명히 기억해 낼 수 있을 터였다.
‘환생’이라는 특이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은 둘째 치고, 제자를 내버려 두고 말없이 떠났던 지난날의 과오가 남아 있어 그가 알아본다면 어찌 해야 할지가 제일 관건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주변 관계를 다루는 법에 미숙했다. 특히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상처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드르륵.
2속성 이상 정령 동조술을 사용해야지만 열리는 문이 거칠게 진동하며 입을 벌렸다.
「어머나.」
「직접 본 건 짱짱 오랜만이다요!」
「……끙, 인간 마법사가 만든 홀로그램일 뿐이니까 직접 본다고 하긴 좀 뭐하긴 해도…….」
「…….」
그곳에는 끝도 없이 펼쳐진 하얀색 공간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상단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들을 맞이하고 있는 존재는 실제 인간 역사상 기록된 지 수백 년이 넘게 지나가는 전설적인 생물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으음, 아까 얘기한 ‘자동’ 난이도의 장점이자 단점이지. 측정 결과에 따라 저런 상대도 나올 수도 있는 거란다.”
마치 왕좌에 앉아 있듯 던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평안히 웅크리고 있던 존재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루비처럼 붉은색으로 빛나는 비늘이 번뜩였다.
긴 목을 들어 올려 침입자를 확인한 상대가 훅 숨결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철 같은 단단한 비늘로 뒤덮인 네 개의 날개가 구김살 없이 동시에 쫙 펼쳐졌다.
수백 년 전 인간 역사서에서조차 그 기록이 끊긴 전설의 종족, 레드 드래곤이었다.
‘어차피 훈련용 박스에 저장된 환상 중 하나. 겉보기는 그럴듯하지만 그리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지는 못했을 터.’
쥬다스는 침착하게 상대의 역량을 가늠했다. 진짜 드래곤이라면 눈이 마주친 순간 졸도하거나 무릎이라도 꿇었어야 정상이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환상은 그 정도 사실감까지는 재현하지 못했다.
드래곤은 물리력, 마법력, 지능 및 모든 것을 통틀어 지상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 드래곤만이 가진 특별한 이능이 있어 절대로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존재기도 했다.
쿠아아.
산만한 몸을 일으킨 레드 드래곤이 순식간에 마력을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떠다니던 마력이 모여 거대한 운석을 십여 개 형성해 냈다.
시전부터 발동까지 가장 오래 걸리며 소모되는 마력도 어마어마하여 대규모 전쟁이 아니라면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광범위 살상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였다.
이글거리며 나타난 운석들은 그대로 괘씸한 침입자를 처단하듯 일제히 내리꽂혔다.
콰가가각.
텅 빈 공간에 쏟아져 내린 운석이 바닥과 충돌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꽂혔을 뿐이었다.
잠깐 사이 냉기를 담은 바람과 물의 힘이 작용한 탓이었다.
마법이 다루는 힘과 자연 원소는 그 성질이 조금 달랐다. 겉보기엔 똑같이 불이나 물을 사용한다 해도 마법의 발원지는 자연이 아니라 마력이다. 그래서 마법이 만들어낸 현상을 정령술로 파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 효과를 절감시키거나 여파를 차단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전부 엇나가게 내려앉은 운석 사이에 가만 서 있던 쥬다스가 반격을 시작했다.
드래곤의 방어력을 어느 정도 흉내라도 냈다면 단순한 공격 가지고는 레드 드래곤의 비늘에 흠집도 낼 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수준에 맞추어 4속 정령의 힘을 전부 끌어냈다.
마법이 일으키는 파괴력과 정령의 힘이 맞부딪혀 허공에서 몇 차례 큰 폭발을 일으켰다.
아무리 큰 마법이 발동되어도 전부 속수무책으로 가로막혔다.
침입자가 쉬이 쓰러지지 않자 마침내 드래곤은 크게 포효하며 날개를 펄럭였다.
고오오오.
허공으로 날아오른 레드 드래곤의 주둥이 앞으로 마법과는 다른 뜨거운 열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체내에 내장되어 있는 열에너지, 즉 ‘용의 숨결’. 브레스였다.
“……확실히 던전 자체는 훈련용이구나.”
브레스를 눈치챈 쥬다스는 조금 다른 의미로 황당함을 느끼고 퍼뜨려놓은 정령의 힘을 불러들였다.
저 브레스는 분명 드래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이능이며 직격할 경우 작은 나라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4속 정령왕의 힘을 다루는 강한 상대에게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체내에서 끌어 올린 브레스를 쓰는 순간만큼은 드래곤의 모든 방어력이 감소된다.
콰아아아!
그리고 브레스를 뿜은 지금, 역습을 가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 갖추어졌다.
녹색 바람에 휩싸여 훌쩍 드래곤의 뒤편으로 이동한 쥬다스는 얼음과 금속이 뒤섞인 거대한 창을 허공에 형성해 냈다.
콰직!
두 정령왕의 힘이 실린 창은 붉은 비늘을 관통하여 드래곤의 심장을 터뜨렸다.
실제로는 이 정도로 쓰러지지 않겠지만 훈련용으로 만들어진 홀로그램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쓰러진 레드 드래곤의 사체 위로 반짝이는 보물 상자가 둥실 떠올랐다.
쥬다스는 사뿐히 드래곤의 등 위에 내려서서 그 보물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애초에 드래곤은 이거처럼 던전에나 등장하는 저급한 몬스터가 아니라구. 세상에서 처음 마법이란 걸 발견해 낸 게 쟤들인데 오죽 똑똑하고 강했겠어. 지금은 전부 용계로 이사 갔지만.」
유니가 레드 드래곤의 주변을 빙글 날며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게다가 용언을 못 쓴다는 게 제일 빵꾸지, 뭐. 드래곤이 무서운 진짜 이유는 용언 때문이거든. 그게 없는 이상 쟨 그냥 독 없는 전갈이자 이빨 빠진 사자랄까.」
「으응, 바퀴 빠진 마차일까요?」
「변기 없는 화장실!」
「……그만해, 니들.」
저들끼리 신나 조잘거리고 있는 정령들을 보며 작게 미소 지은 쥬다스가 보물 상자를 막 열려던 찰나였다.
“……박스에서 ‘드래곤’이 매칭되었다니?”
경악에 물든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게다가…… 그 정령들은.”
“…….”
콜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안녕하세요, 늘 그렇듯 오늘은 불금입니다...ㅎ 오탈자나 비문, 막장전개가 보이신다면 살포시 알려주시면 됩니다.(...)
뭔가 후기에 쓸 말이 되게 많았던 것 같은데.. 한참 달렸더니 싹 잊어버렸네요. 하하...
늘 과분한 사랑 주시는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연참이라도 해드리고 싶은데 요즘 유독 시간이 없네요 ㅠㅠ 끄어어ㅓ
아참, 지난 편에서 '검은 마력'이라 서술된 부분은 원래 포탈 내부 에너지가 검게 요동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ㅎ
어... 혹시 다른 질문 있으신 독자님이 계시다면 @표시를 붙이고 질문해주시면 기억해두었다가 답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에너지(?)와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매번 힘을 얻고 있습니다.ㅎ 당근과 채찍은 늘 좋은 원동력이 됩니다...흐흐.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