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67화 (67/252)

0067 / 0240 ----------------------------------------------

8장. 허물벗기

루바흐 학생 중에서 자연계 3속 정령을 다루며 정령술사로서의 자질이 제일 뛰어나다고 알려진 1황자에 대해서는 콜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데다 묘하게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좀 더 주시하기로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훈련용 박스의 난이도 조절을 ‘자동’에 맞추어 두었다.

마법을 통해 스캔되는 능력은 그 자질까지 완벽히 간파해 낼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파악에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하에 이루어진 실습이었다.

다른 7명의 학생은 모두 제 수준에 맞게끔 하급이나 중급 난이도의 던전을 클리어했다.

하지만 최단 시간에 던전을 빠져나올 거라 기대했던 쥬다스의 경우 이상할 정도로 그 시간이 늦어졌다.

결국 의아함을 느낀 콜이 관리자 권한을 통해 박스 안으로 진입했고, 그 안에 펼쳐진 것은 상상도 못한 장관이었다.

설령 최상급 정령 2속성과 계약한 콜이 직접 이 박스 안에서 훈련을 받는다 할지라도 보스몬스터로 ‘드래곤’이 매칭될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웨어울프거나 높게 잡혀도 발로그 정도일 것이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훈련용 박스에서 드래곤과 매칭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드래곤은 그저 최고 단계를 암시하기 위해 마법사들이 입력하기는 했지만 능력치를 완성시키지 못한 미시공 홀로그램이었다.

그 레드 드래곤의 사체를 딛고 서 있는 1황자를 발견한 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자연계 4원소 정령왕……. 그들은 분명. 저, 전부 만나 뵌 적 있습니다.”

「어머, 꼬마도 우릴 알아보나 봐.」

유니가 까르르 웃으며 콜의 곁으로 날아갔다. 녹색으로 빛나는 바람의 정령을 눈앞에서 마주한 콜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금안과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으음. 하는 수 없구나.”

후웅.

부드러운 바람에 휘감겨 지상으로 탁 착지한 쥬다스가 미안한 얼굴로 다시금 자신을 소개했다.

“믿기진 않겠지만 네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옳겠지.”

“예, 예?”

“나는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이 나라의 황자임과 동시에 전생의 기억과 힘을 이어받은 내 또 다른 진명은.”

“……?”

“이그레트(Egret)란다.”

콜은 전직 황실 정식 정령술사이자 루바흐의 영예로운 교사로서의 품위도 잊고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훈련용 박스에서 나타난 레드 드래곤, 심지어 그를 처치한 1황자.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자연계 4속성 정령왕들, 그리고 그들의 익숙한 외형.

굳이 쥬다스의 친절한 소개가 아니더라도 이미 모든 정황이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스, 스…… 스…….”

콜은 입술을 달싹이다 주책없이 바닥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스승님―?!”

“원 녀석, 목청도 크구나.”

기억 속 스승의 얼굴과는 달랐지만, 그 부드러운 빛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수십 년도 전에 잃어버린 스승과 꼭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쥬다스를 향해 콜은 멍한 시선을 줄 뿐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밖에서 나누기로 한 두 사람은 일단 박스 밖으로 빠져나왔다.

콜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수업 종료를 알려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아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겠다며 허허롭게 웃던 콜 본인이 더욱 창백하게 질려 있자 같은 정령학 교사인 이사벨이 의아하게 물어왔다.

“왜 그러세요, 콜 선생님?”

“……예?”

“낯빛이 좋지 않으셔요. 어디 아프신가요?”

아픈 건 아니었지만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쇼크 상태였다.

콜이 할 말을 고르지 못해 눈꺼풀만 바르르 떨자 나갈 채비를 하던 쥬다스도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프십니까? 스승님.”

“……!”

이번엔 아예 안색이 새파래졌다. 콜은 히익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숨을 들이켜곤 손을 내저었다.

“스, 스…… 아니…… 예? 아니, 아프긴 무얼요. 저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콜은 척 보기에도 좋지 않아 보이는 몰골로 허둥지둥 연구소를 떠났다.

실습 수업에 상당히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하늘에는 깜깜한 어둠이 내려 있었다.

대신 루바흐 교정을 밝히는 마법 가로등이 은은하게 길을 밝혀주었다.

수십 년 전 스승과 제자였던 두 사람이 다시 사제지간으로 만나 교정을 걸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둘의 역할이 거꾸로 뒤바뀌었다는 부분이다.

시간이 늦어 돌아다니는 학생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된 루바흐에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대신 낙낙한 고요가 자리했다.

초여름에 접어든 푸근한 밤공기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찌륵찌륵 퍼졌다.

“험…….”

콜은 작게 헛기침하여 고요를 깨뜨렸다.

“저, 정말.”

“…….”

“정녕 스승님이 맞으십니까?”

떨리는 물음에 가만 쳐다보는 얼굴은 12살 소년이었다. 하지만 몰라서 물은 게 아닌 만큼 콜은 그 느긋한 표정에서 옛 스승의 잔재를 읽어내고 알아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고, 듣고, 이리 눈앞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미안하다.”

“……!”

콜은 가느다란 눈을 최대한 번쩍 뜨고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던 스승이라면 결코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사과였다.

이그레트는 언제나 자애롭고 현명했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나 공평했으며 자신이 세운 기준에 있어 완고한 면모가 있었다. 좋게 말하면 원칙적이었고 나쁘게 보자면 융통성이 없었다.

자애와 공평은 모순적일 정도로 극과 극의 성향을 품는다.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 있어 공평이란 곧 잔인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당시의 스승을 떠올린 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많이 원망했더냐.”

그 말에 콜은 우뚝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은 채 곁을 따라 걷던 쥬다스가 그가 멈춘 것을 보고 똑같이 걸음을 세웠다.

마주한 맑은 금안은 기억했던 것보다, 한층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는 눈이었다.

“나는 그때 너희로부터 도망쳤다.”

도망쳤던 과거의 연을 앞에 두고 쥬다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어떤 이유를 가져다 놓아도 이것만큼은 사실이야. 나는 너희를 버렸다.”

상처받아 울던 어린아이는 이제 흰머리가 나고 주름이 늘며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다.

노년기에 들어선 콜은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 쥬다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번 도망가고 나니 다시 너희를 볼 용기가 나질 않더구나. 그대로 끝인 줄로만 믿었다. 숨이 다한 끝 날까지 내 옳다 여긴 신념대로 떠나 살았지. 그게 잘못이었다는 걸 새로운 생에서야 깨달았으니. 얼마든지 질타하여도 좋단다.”

“아닙니다, 스승님.”

그 순간 콜이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의 삶에 막무가내로 끼어든 건 저 자신이었습니다. 어찌 감히 질타를 한단 말입니까? 따지고 보면 스승님을 도망가게 만든 원흉이 바로 저희였던 게지요.”

콜은 오른쪽 눈에 끼고 있던 모노클을 접어 품에 갈무리했다. 그러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눈으로 은은하게 웃었다.

“……평생 다시 뵙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단 한 번도 떠난 스승을 욕한 적 없었다. 오히려 남겨진 제자로 인해 욕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제자라는 명칭으로는 이그레트가 짊어지고 있던 무게 중 반의반만큼도 등에 이지 못했지만 그마저도 버겁고 힘이 들어 한탄이 흘러나왔다.

왜 자신은 그토록 어렸는가.

왜 스승이 완벽하다고 믿었는가.

살아보니 스승도 인간이었다. 찌르면 피가 나고, 아프면 울 수도 있는.

“제가 죄송합니다. 스승님, 죄…….”

살랑.

뺨을 스치고 지나간 온풍에 콜의 입이 다물어졌다.

어린 시절, 스승을 경외하고 반드시 따르고자 마음먹게 했던 장면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바람과 불의 최상급 자질을 가진 그의 눈에 무수히 많은 정령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계약한 정령이 아니라면 보이지 않았던 자연체 정령들까지 전부 쥬다스를 중심으로 포로록 날아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어린 소년 소녀의 모습으로, 혹은 작은 나비의 모습으로, 온순한 동물의 모습을 한 정령들까지 다양했다.

자연체의 정령은 아무리 정령술사라 해도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4속 정령왕과 계약한 이그레트의 경우 원한다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마치 정령과 술사를 이어주는 친화력이 증폭이라도 되듯이.

콜은 나이 먹어 거칠어진 손을 허공에 내밀었다. 붉은 나비가 그 손끝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고맙구나.”

“스…… 승님.”

키 차이가 나서 차마 머리를 쓰다듬을 수 없게 된 쥬다스가 콜의 팔뚝을 힘 있게 두드려 주었다.

나이를 먹었어도 제자는 제자일 뿐이었다. 어린 황자의 토닥거림에 그는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손끝에 앉아 있던 나비 모습의 정령이 훌쩍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자리에서 콜은 간단히 쥬다스가 놓인 상황을 전해 듣고 돌아갔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다 나누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필요했다.

콜의 입장에서 궁금한 점이야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딱히 급할 건 없으니 자세한 건 조금씩 천천히 듣기로 했다.

나이가 들면서 느긋해진 성격이 이러한 여유에 도움이 되었다.

한편 정령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 아벨은 드디어 자신의 정령을 정식으로 소환하여 계약해 내는 일에 성공했다.

술사의 바람에 따라 모습을 맞추어 나타나는 정령의 특성상 거울정령은 아벨의 생김새를 상당 부분 복제해서 나타났다.

다만 아벨과 아주 쌍둥이처럼 똑같은 건 아니었다.

“어씨……! 뭐야, 그거!”

점심 식사를 함께 하러 나왔다가 예기치 않게 거울정령을 마주한 바이칼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하마터면 욕설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쥬다스가 함께 있어 가까스로 조절해 낸 필사의 외침이었다.

“왜, 왜 그러시는.”

“왜긴 왜야?! 너 인마 그…….”

바이칼이 꺼림칙하게 말끝을 흐리자 아벨이 기쁜 어조로 답했다.

“제, 제 정령인 투르키…… 입니다.”

「―니다.」

정령의 이름은 고향 투르케 사막에서 따온 ‘투르키’였다. 쑥스럽게 제 정령을 소개하는 아벨을 따라 정령이 웅얼거렸다.

다른 정령들과 다르게 인체를 구성해 낸 투르키가 하는 말은 술사가 아닌 사람들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누가 이름을 물어봤냐. 그 눈에 띄는 생김새는 대체 뭔데.”

바이칼이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질색하며 물었다.

투르키는 아벨의 잿빛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복제해 낸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색깔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닮았지만 성별이 다른 만큼 얼굴형이나 체형 등은 차이가 분명했다.

둘은 꼭 친남매처럼 미묘하게 닮아 있었다. 굳이 나누자면 정령인 투르키 쪽이 여동생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닮은 건 외형뿐이 아니었다. 투르키는 서툴게나마 아벨이 하는 말을 따라하려 했고 감정 표현도 고스란히 복사해 냈다.

아벨이 웃으면 따라 웃었고 시무룩해지면 함께 풀이 죽었다. 속성이 물질계 ‘거울’이라 그런지 다른 정령들을 뛰어넘는 굉장한 동화율이었다.

“그, 그렇게 눈에 띄나요……?”

「―나요?」

마치 사람처럼 고개마저 갸우뚱하며 말끝을 따라하는 거울정령 투르키를 보며 바이칼은 소름이 돋은 팔뚝을 벅벅 문질렀다.

“어. 매우, 무척, 과하게.”

“……멀쩡한 이능에 핀잔주기보단 격려를 해볼 생각은 없나.”

달그락.

학식을 받아와 한 테이블에 착석한 에단이 바이칼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다함께 황궁을 다녀온 이후로 종종 시간이 맞는 멤버끼리 같이 식사를 하는 건 이제 일상이 되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박스'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아공간입니다. 환상을 보여주는 정신적인 공간으로, 클리어조건을 만족하는 외에 죽거나 큰 충격을 받으면 환상이 깨지며 밖으로 퉁겨나오는 구조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ㅎ

음... 저는 사실 오늘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서 연재펑크낼 뻔(...)했는데 다행히 어찌어찌 시간 내로 맞춰서 왔네요. ㅠㅠ 계속 이 상태라면 내일은 쉬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ㅠㅠ.. 점점 추워지는 계절, 독자님들께서도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내일이나 모레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애정과 응원메세지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ㅎ

(+ Yunlynn 님께서 서평을 작성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ㅠㅠ)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