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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시험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었다.
루바흐의 여름은 찜통 같은 습한 무더위와 일주일씩 이어지는 장마가 반복된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학생들의 복장도 시원한 하복으로 바뀌었다.
여학생들은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하늘색 스커트와 품이 넓은 반팔 블라우스를 입었고, 남학생들은 긴 바지와 반바지 중 자율적으로 선택해서 입을 수 있었다.
둘 다 여름용 재질이었기에 어지간하면 비교적 품격 있는 긴 바지를 선호했다.
반바지를 챙겨 입는 학생들은 대부분 품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호탕한 성격이거나 나이가 어린 경우였다.
쥬다스를 중심으로 뭉친 일행 중에서는 품격과 거리가 먼 바이칼이 유일하게 반바지를 선택했다.
“아~ 으, 벌써 시험이냐. 뭔 놈의 시험은 허구한 날…….”
바이칼은 손부채를 부치며 칠판에 적힌 시험 일정표를 바라보았다.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건 곧 기말고사가 가까워졌다는 의미도 되었다.
다들 절망했지만 바이칼은 절망을 넘어 체념에 가까운 심정이었다.
그에게 있어 이번 학기는 시작부터 평범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제일 큰 이변은 백로황자.
바이칼은 제 옆자리에서 태연하게 시험 일정을 확인하는 쥬다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가 평소 가장 경멸하는 부류는 가진 힘에 맞지 않게 구는 지배층이었다.
귀족이면 귀족답게, 그런 귀족을 지배하는 황족이라면 더욱 황족다운 행실을 보이길 원했다.
큰 힘을 가졌으면 그 힘으로 해야 할 의무를 다하고 아랫것들을 휘어잡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던 과거의 바이칼이 볼 때에 이 백로황자는 그야말로 쓰레기였다.
어딘가에 재활용도 불가능한, 그저 숨만 쉬고 살아갈 뿐인 제 위치에 걸맞지 않는 쓰레기.
하지만 자신의 사상과 편견이야말로 비틀어져 있음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그는 혼란을 겪었다.
‘……어, 잠깐. 설마 내가 생각한 게 틀렸을 수도 있나?’
그렇게 생각이 든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오류라고 느낀 부분을 차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바이칼 B.드레이크는 귀족치곤 개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14살 소년이었고, 상황에 따라선 자신이 틀렸다는 걸 깔끔하게 인정할 수 있는 용기도 함께 갖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사고 전환이 단숨에 확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누군가를 쓰레기 취급하던 가치관에서 그 사고가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하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데엔 굉장한 노력이 필요했다.
혼란과 의구심으로 복잡해진 머릿속은 도무지 학업에 집중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학파를 찾아 수장을 만나러갔더니 그 수장이란 작자가 금지된 사령술을 다루는 술사였다. 덕분에 교황청에 잡혀서 꼼꼼히 조사받느라 출석 일수와 시험 대비 기간을 홀라당 날려 먹었다.
원래 마법이나 이능에 관련된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학구파긴 했어도 수재들 사이에서 그는 그리 지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결국 바이칼의 중간고사 점수는 화려하게 박살 나고 말았다.
‘그 뒤로는.’
1황자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던 몰지각한 학생들로 인해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런 식으로 점차 바이칼은 사건 사고에 말려들곤 했다.
그러는 사이 바이칼이 가지고 있던 비틀어진 가치관은 확실히 변했고, 백로황자를 따르고자 하는 결심까지 가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황궁까지 따라 다녀오고 나니 수업은 수업대로 빠지고 머리는 머리대로 복잡하여 공부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머릿속에 남은 게 없었던 것이다.
“젠장, 말이 안 되잖아. 인간인 이상 어떻게 이런 상황에 시험을 잘 볼 수가…….”
거기까지 중얼거린 바이칼은 옆자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부신 성적을 거둔 공부 괴물들이.
“자, 점심을 먹으러 가자꾸나.”
“뭘 멍하니 있지? 일일이 챙겨줄 시간 없으니 넋 놓고 있으려면 여기 남도록.”
따뜻한 금안과 그 곁에 선 도도한 바닷빛 눈동자를 번갈아 올려다본 바이칼은 의자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웠다.
“……하아.”
괴물이 아닌 평범한 루바흐 학생의 입에서는 한숨밖에 나오질 않는다.
바이칼은 생각했다. 이건, 절대 내가 수준 떨어지는 게 아냐.
‘이분들이 너무 턱이 높은 거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바이칼은 목덜미를 타고 흐른 땀을 팔뚝으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거, 날씨 한번 오지게 덥네.”
여름과 동시에 기말고사 시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모든 시험이 종료되고 난 후에, 바로 황제가 공표한 황태자 즉위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광 아래 평화롭게만 흘러가던 공기가 바짝 타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제국을 발아래 둘 권력을 위해, 다른 누군가는 지키고자 하는 삶을 위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말이 충돌을 준비한다.
비록 한쪽은 기마(騎馬)가 아니라 뒤에 폭탄을 잔뜩 실은 포마(砲馬)였을지라 해도, 두 말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 * *
“그거 아십니까?”
마르젠이 싱글싱글 웃으며 서두를 꺼냈다.
“사실 우리 루바흐에는 슬픈 전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관심 없어.”
“……워후, 칼답에 베이겠는데요.”
크리스티나의 싸늘한 거절에 마르젠은 손날로 목을 베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그저 무시였다.
진심으로 관심 없다는 그녀의 태도에 마르젠은 멋쩍은 얼굴로 삐죽 튀어나온 옆머리를 정리했다.
그들은 현재 카페테리아의 룸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시험 기간이라 복습하라며 일찍 수업을 마친 탓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쥬다스를 찾아 모였고, 모인 김에 함께 공부나 하자며 룸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다.
“무슨 전설이더냐?”
뻘쭘함에서 마르젠을 건져 올린 건 다름 아닌 쥬다스였다.
부드럽게 답을 기다리는 금안을 마주한 마르젠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곧 있으면 장마철이지 않습니까?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 되면 말입니다…….”
차츰 말소리를 죽인 마르젠이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나온답니다.”
“뭐, 뭐가?”
책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던 바이칼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 곁에서 다른 수업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에단도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관심이 모이자 마르젠은 허공에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유령이요.”
그 말에 크리스티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에단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으며, 바이칼과 아벨만이 유독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다.
“유령이 나온다고?!”
“지, 진짜……?”
무슨 일이든 용감하게 끼어들던 바이칼이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대상이 바로 ‘유령’이었다.
그는 주제 불문하고 인간의 지식으로 설명 불가능한 미스터리나 공포물 따위를 몹시 싫어했다.
14살이긴 했으나 유독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을 드러내는 바이칼을 흘낏 쳐다본 크리스티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 믿나.”
“어, 아니, 딱히 믿는다고는 안 했…….”
“이거 되게 유명한 전설입니다만? 진짜 다들 그동안 한 번도 못 들어보셨습니까?”
마르젠이 책상에 두 손바닥을 탁 짚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쥬다스가 흥미롭게 턱을 짚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다. 나는 처음 듣는구나.”
“…….”
사실 그동안 이렇다 할 친우가 없던 쥬다스로서는 당연히 들을 소식통도 없었을 터였다.
그 점을 뒤늦게 떠올린 아이들의 눈에 동시에 낭패감이 스쳤다.
괜히 주군의 약점을 들쑤신 기분이 들어 굉장히 죄책감이 들었다.
짜증스레 책을 탁 덮고 무릎에 올려놓은 크리스티나가 결국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들어는 봤어. 저급한 내용이라 별 관심은 없었지만.”
그녀의 동조에 마르젠이 거 보라는 듯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진짜 있다니까 말입니다~?”
“들어봤다고 했지 직접 봤단 말은 안 했는데.”
“그래서 그 내용이란 뭡니까?”
애써 태연한 척 물어오는 바이칼이었지만 녹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들유들한 마르젠의 얼굴과 경직된 바이칼에게 차례로 시선을 준 크리스티나는 마지막으로 흥미롭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쥬다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장마가 퍼붓는 날, 새벽 2시부터 4시 사이, 호숫가에 혼자. 이 조건을 충족하면 얼굴이 없는 유령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만난다 해도 목숨에 위해를 가하지 않으며, 다만.”
“다만……?”
“살아 있는 자의 육신, 즉 빙의를 노린다고 합니다.”
“……?!”
이건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론이었다.
특히 그간 자신의 상태를 ‘빙의’에 가깝게 여기고 있던 전적이 있는 쥬다스로서는 더욱 움찔하고 말았다.
지금이야 이 역시 전생과 이어진 현생임을 인지하고 받아들인 상태지만 어찌 되었든 그에게는 꽤나 와 닿는 유령이야기인 셈이었다.
묘하게 허를 찔린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마르젠이 묘한 눈길로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이거. 크리스티나 님, 관심 없으시다더니 엄청 자세히 알고 계시는데요?”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큭큭, 예이.”
겉으로는 으르렁대면서도 크리스티나의 속내는 민망함으로 차올랐다.
대신 그녀는 민망함을 꾹 눌러 숨기며 쥬다스를 향해 계속 말을 이었다.
“……그야말로 어린애들이나 믿을 법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내용입니다만. 매년 이 시기쯤 되면 꼭 한 번씩 도는 괴담입니다.”
“되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비 오는 날 새벽에 호수로 나가면 유령을 볼 수 있을지?”
“확인도 안 되는 괴담 따위에 휘둘릴 필요가 있나. 애초에 그런 얘기를 지금 왜 꺼내는 건지 모르겠군.”
“단합이죠, 단합. 공동의 관심사가 있으면 좀 더 쉽게 친해지게 마련이거든요.”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였지만 마르젠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시험 기간이라고 공부에만 찌들어 있는 것보다는 한 번씩 이렇게 뜬금없는 주제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도 필요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라 해도 결국 십 대 소년소녀들이었다.
그들은 지루한 공부보다는 괴담 이야기에 은근슬쩍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정령이라든지 사령 같은 것들도 전부 유령과 비슷한 개념 같은데.”
에단이 제 의견을 털어놓았다. 다른 학생들이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누가 시킨 사람도 없는데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쥬다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 어쩌면 소문의 정체가 정령이나 사령일 수도 있겠지. 단지 해를 끼치는 자들인가 아닌가에 따라 사령일 가능성이 좌우될 뿐이야.”
“계약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들을 볼 수 있는 겁니까?”
정령이나 사령은 자질을 가진 술사만이 소환하여 계약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예외가 존재했다.
쥬다스는 설명을 위해 유니를 손바닥에 얹고 실체화했다. 녹색 미풍이 주변을 감싸며 손가락만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도 알다시피 미계약 상태의 정령은 볼 수 없단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오로지 지금처럼 술사가 원했을 때뿐.”
“그렇다면……?”
“아주 드문 일이지만 ‘가계약 상태’라면 스스로의 의지로 실체화가 가능하다고 하는구나.”
“혹시 아벨의 거울정령처럼 말씀이십니까?”
바이칼이 아벨의 곁에 붙어 있는 거울정령 투르키를 가리켰다.
괜히 움찔한 아벨이 투르키를 쳐다보았지만 정작 투르키에게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아니, 그때는 일종의 정령 폭주였지. 가계약이란 예를 들면 이런 거란다.”
살짝 고개를 저은 쥬다스가 천천히 손가락을 접으며 예시를 들었다.
“천 년 묵은 나무의 정령, 오래된 마을에 붙어 수호하는 정령.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며 잘 관리되고 사랑받은 인형에 깃든 정령.”
“어, 그거…….”
한 번쯤은 전래 동화나 민담으로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실제였다는 말에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언 것 같으냐?”
“……일단 한곳에 오래 붙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단이 먼저 답을 한 가지 말했다. 간소한 차이를 두고 크리스티나가 이어 답했다.
“구체적인 대상을 지키려는 목적이 보입니다.”
“둘 다 잘 말해주었다. 살아 있지 않은 미생물이거나 의지를 표할 수 없는 상태의 대상에 친화력을 느껴 오래 머물다 보면 ‘가계약’ 상태로 전환되어 이를 지키고자 힘을 표출할 수 있게 된단다.”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많은 전설이 실제 있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니.”
감탄하던 마르젠이 손을 딱 소리 나도록 퉁기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2)
12월입니다! 드디어 올해의 마지막달로 접어들었네요.
별 일정은 없지만 겨울을 좋아하는지라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독자님들도 모두 행복한 12월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사족으로 박스에 입장하기 전 콜이 쥬다스의 정령들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실체화를 하지 않고 있었던 탓입니다(...) 말 그대로 안보여서 못알아봤다는... 하하.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늘 감사드립니다!
(+ 딸기맛쿠키 님께서 팬아트를!! 보내주셨습니다. ㅠㅠ 곧 공지에 추가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