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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시험
“오오, 그렇다는 건 학교에 떠도는 괴담도 실제로는 정령이 정체였을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크지.”
크리스티나가 지체 없이 찬물을 부었다.
“밝혀지지 않은 존재라 해서 꼭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그보단 지금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시험 문제나 두려워하는 게 좋겠군.”
“……시험 문제보다는 나중에 날아올 성적표가 더 두렵습니다, 전.”
이미 기말고사에 대해선 해탈한 바이칼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펼쳐 둔 교재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남은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결과를 알면서도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런 바이칼을 멀뚱히 쳐다보던 쥬다스가 넌지시 물었다.
“혹 공부에 어려움이 있느냐?”
“예? 아, 뭐 그런 셈…….”
대충 얼버무리려던 바이칼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정도가 아니라 완전 텅 비었습니다, 텅. 수업 때 듣지 못한 내용은 아예 이해도 안 되고요.”
“……이해가 안 되다니, 어느 정도로?”
에단 역시 학업에 힘들어 하는 바이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의아한 얼굴로 정도를 물어 오는 에단을 무서운 기세로 홱 돌아본 바이칼이 되물었다.
“알고 싶습니까?”
“……?”
“에단 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에 대어보십쇼.”
“……?”
“뭐가 보이십니까?”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게 바로 제 이번 학기 앞날입니다.”
하란다고 순순히 따라하던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주먹을 내렸다.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바이칼이 현재 얼마나 막막한 처지에 놓였는지 확연히 이해한 학생들이 그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다.
설마하니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줄은 미처 염려하지 못했던 쥬다스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흠, 그랬구나. 괜찮다면 내가 네 시험공부를 좀 도와도 되겠느냐, 바이칼.”
“……쥬다스 님께서 직접 도와주신다면야 저로서는 감사하지만. 모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좀 힘드실걸요. 게다가 그러면 제가 시험공부에 방해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걱정 말거라.”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바이칼이 한 말은 그야말로 괜한 걱정이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정령들만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그날로 즉시 1황자의 주관하에 혹독한 스터디가 시작되었다.
본래는 바이칼을 대상으로만 진행되려던 스터디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아이들이 생각한 수준 이상으로 진국이었다.
쥬다스는 루바흐의 정식 교사보다 정밀한 설명이 가능했고 교과 내용 중 어떤 부분이 포인트로 출제될지에 대해 전부 파악한 상태였다.
공부할 양은 줄어들면서 내용 정리는 완벽하게 되다 보니 본래 지적 능력이 우수한 편인 바이칼은 스펀지 물 빨아들이듯 지식을 습득했다.
중간고사 때 수강 과목 100점 기록 신화를 보여준 황자였기에 지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강의를 듣는 모든 교과 과정을 막힘없이 설명, 요약 정리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던 아이들은 그대로 스터디에 눌어붙어 계속 함께 공부를 진행했다.
덕분에 그들 모임은 루바흐에서도 꽤 알려져 본격적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두 공작가 자제를 비롯해 황자를 따르는 인재들에 대한 자세한 소문이었다.
“마르젠한테 들은 정보인데, 시험 기간이 끝나면 당장 황태자 즉위식이 이루어진다고 했어.”
“정말? 그럼…… 역시 1황자 전하께서.”
“그뿐만이 아니야. 나도 들은 건데 이미 많은 가문이 1황자 전하의 세력으로 붙고 있대.”
“이미 루바흐에서도 두 공작가에 백작가 자제들이 따르고 있잖아. 듣자 하니 모두 충성 서약을 마쳤다는대.”
“심지어 이능도 뛰어나셔서 자연계 정령을 3속성이나 계약하셨다고.”
그냥 도는 소문도 있었지만 대부분 마르젠이 깔아둔 밑밥들이었다.
그는 1황자의 위세를 높이고 이목을 끌 만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여기저기 흘리고 다녔다.
그 결과 이미 루바흐에서는 쥬다스를 황태자나 다름없이 보고 있었고 누구나 그리 수군거렸다.
그러다 보니 이를 당연히 여기게 되어 1황자가 제위를 이어 군림하게 된다는 사실에 큰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십 대 아이들이라 소문에 민감하고 쉽게 선동당한다는 특징이 있었고 마르젠은 이를 귀신같이 잘 이용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귀족 세계에 뿌리를 둔 루바흐 학생들은 전원 1황자를 따를 잠정적 아군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이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대로 지배층 중에 실제 죽은 듯 보이던 1황자파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황제가 그를 황태자 자리에 올리겠다고 직접적으로 밝힌 이상 중립에 서 있던 모든 귀족 가문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태세는 변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남은 건 1황자가 어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과연 황태자 자리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귀족 세력을 휘어잡을 것인지, 아니면 반발하는 세력이 던지는 암투에 의해 심장이 꿰뚫리고 말 것인지.
모두의 시선이 그를 주시했다.
누구도 의도치 않았지만 자연적으로 목을 걸고 임하게 된 시험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이어 학원 루바흐에서도 드디어 기말고사 첫날이 시작되었다.
드르륵.
“좋은 아침이구나, 바이칼.”
“…….”
그리 혹독하게 스터디를 진행해 놓고도 태연스레 아침 인사를 건네는 쥬다스를 향해 바이칼이 다크서클 진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예……. 좋은 아침이네요, 정말. ……좋아서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어찌나 피로에 찌들어 있던지 목이 다 걸걸하게 잠겨 있었다. 루바흐에서 시험이 진행되는 기간은 총 1주간이었다.
한 주만 버티면 공부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다. 바이칼은 그 생각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힘 있게 두들겨준 쥬다스가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잘하리라 생각한다만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성적이 전부가 아니지 않누.”
“……저기, 쥬다스 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시험 당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저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시험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100점이라는 엄청난 점수를 거머쥔 상대였다.
천재가 하는 위로는 좁쌀만큼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스터디는 어제부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루하루 시험을 치르고 지푸라기 인형처럼 풀썩 엎어지기만 하면 될 일이다.
우르릉.
시험을 위해 띄엄띄엄 배치된 책상에 앉자마자 하늘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울렸다.
바이칼과 쥬다스는 동시에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마가 시작되려나 봐.」
「우왕, 비 오는 거 좋다요! 근데 이 기세라면 좀 시끄러울지도 모르겠다요.」
「……거슬린다면 멈추게 해줄 수도 있다.」
엄숙한 시험장인 만큼 정령들은 모두 실체화하지 않고 자연체인 상태로 쥬다스의 주변을 머물고 있었다.
오로지 그의 의지만을 생각하는 정령들의 호들갑에 쥬다스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툭, 투툭.
조용한 시험장 안에 굵은 빗줄기가 창을 때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여름비의 시작이었다.
솨아아아-
제일 먼저 시험지를 제출하고 1층 현관으로 내려온 쥬다스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쏟아붓는 장대비에 걸음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요란스럽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정도 비라면 우산을 쓰나 안 쓰나 홀딱 젖게 되리란 사실은 변함이 없을 정도였다.
쥬다스는 우산을 꺼내는 대신에 그냥 빗속으로 발길을 내딛었다.
화악.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정령술사라면 굳이 비를 가릴 우산이 필요하지 않는다.
그의 의지에 따라 빗물이 몸에 닿기 전 알아서 옆으로 피해 흘러내렸다.
그는 빗속을 느리게 걸었다. 비가 쏟아지는 데다가 시험 기간에 돌입한 루바흐의 교정에는 낮인데도 지나다니는 학생이 없었다.
하늘엔 태양 대신 먹구름이 잔뜩 끼어 사위가 온통 어두웠다. 저녁 시간처럼 어둠이 내린 중에 요란한 건 빗소리와 천둥소리뿐이었다.
스산하게 느껴질 법도 한 풍경이었지만 쥬다스는 오히려 간만에 홀로 맞은 여유를 기껍게 즐기고 있었다.
주륵주륵 내리는 비가 세상을 푹 적셨다.
돌로 지어진 건물도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마법의 힘이 깃든 가로등이나 시원스레 뻗은 가로수도 전부 빗물을 촉촉이 머금었다.
그 사이로 짙은 풀잎사귀 향이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 유령 이야기 말이야.」
「우웅?」
유니가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슬쩍 괴담을 꺼냈다.
「진짜 유령일 수도 있잖아?」
「에!」
「……유니는 만난 적 있어요? 유령.」
정령이라 해도 괴담에 등장하는 귀신이나 유령을 직접 만나 본 적은 보통 없었다.
정령이란 영적인 존재였으나 그렇다고 미지의 대상은 아니었다.
세상의 사물과 자연을 조정하는 위치에 있는 개체로 ‘계약’이란 틀을 따라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계약자의 의지 없이 무단으로 힘을 사용해서 살아 있는 자들에게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된다.
이건 마치 심장이 뛰거나, 갓 태어난 아기가 생존을 위해 빨기 반사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켜지고 있는 본능적 불문율이었다.
이를 어긴다면 더 상위의 심판자에게 처벌을 받게 된다. 정령왕이라 해도 그 법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 해를 끼치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하는 유령이란 존재는 정령과는 전혀 무관했다.
카니가 붉은 날개를 파르르 떨며 두 팔을 문지르자 다른 세 정령을 번갈아 본 유니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니들 설마 유령 따위에 겁먹은 거니?」
「유령은 한 번도 본 적 없다요. 그치만 모르는 건 역시 무섭다요.」
「으응, 맞아요. 싫은 건 싫은 거잖아요. 싫은 것도 취향이니까 존중해 주세요.」
「…….」
올망졸망한 눈망울의 토니와 카니를 비웃는 유니,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루니였다.
쥬다스는 그런 4속성 정령들의 투닥거림에 미소 지으며 계속 빗속을 걸었다.
「유령 그거 별거 없다? 걔들은 그냥 원념 같은 거라서. 실제로 살아 있는 영혼도 아니고 말이야. 그냥 겁만 줄 뿐이라구.」
“음? 그렇다면 죽은 자의 영혼은 아닌 모양이구나.”
「응, 영혼이란 건 우리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사라지곤 하니까.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 세상을 떠도는 일은 없어. 죽는 순간 그대로 소멸해 버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건지, 신께 심판을 받으러 하늘로 올라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령에게조차 ‘죽음’은 알 수 없는 개념이었다. 단지 현재 이어진 모든 연결 고리가 끊어진다.
그래서 보통 계약자가 죽고 나면 자연히 정령들과의 계약도 함께 끊겼다.
이그레트의 경우 여러 요소가 개입되어 만들어진 이례적인 환생자이긴 했지만, 보통은 그랬다.
정령이 소멸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사후 어찌 되는지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가장 죽음과 밀접해 있는 사령조차도 그 뒷날은 알 수 없다.
그저 죽음의 기운을 양분으로 살아가며 죽었어야 할 영혼을 빼돌려 잠시 손아귀에 넣고 장난감처럼 굴리는 힘을 가졌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구나. 원념만 남아 세상을 떠돌다니.”
「뭐어,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별 힘도 없어. 걱정 마, 이그레트! 혹시라도 유령을 만나면 내가 눈물 쏙 빠지게 괴롭혀 줄게!」
“아니, 굳이 그럴 것까지는…….”
난처한 얼굴로 손을 내젓는 쥬다스였으나 정령들은 그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의욕을 불태웠다.
「근데 유령이란 건 그럼 어떻게 생겼다요?」
「제각각이지 뭐. 유령이란 게 원래 원한이나 강한 잡념 같은 게 한데 모인 존재라서 좀 엽기적인 게 많아. 듣자 하니 여기 학교에 사는 유령은 얼굴이 없는 사람이라던데.」
“으음, 저렇게 말이냐?”
쥬다스의 손가락이 전방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른 학생이 하나 더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남색의 동복이었으며 치렁치렁한 붉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얼핏 보기엔 여름에 동복을 입고 있는 좀 특이한 여학생으로 보였지만, 문제는 얼굴이었다.
정말로 눈코입이 있어야 할 얼굴에는 창백하게 질린 피부만 존재할 뿐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얼굴이 없는 적발의 소녀가 손을 들어 제 발밑을 가리켰다.
「……어.」
「저게 유령? 진짜 유령이다요?」
토니가 빼꼼 고개를 내밀며 상대를 확인했다.
예고도 없이 어느 순간부터 멀찍이 모습을 드러낸 인영을 보고 다른 정령들도 신기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느덧 70화가 넘었네요.ㅎ 이번 챕터와 이 다음 챕터가 끝나고 나면 평화로운 일상 대신 슬슬 1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음... 사실 제가 요즘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은데... 쉬지 않고 매일 달려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 출판계약이 오고 가면서 카카오페이지와 연계되면 이그레트1부는 조아라에서도 유료전환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전달을 받았습니다.ㅠㅠ 그래서 그 전까지 1부를 완결내려고 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뒤로 미루려고 계속 상의를 드렸는데, 출판사 뿐 아니라 카카오나 타사이트들과도 연동이 되어 힘들다는 답변이... 담당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상황이 또 그렇습니다.ㅠㅠ
계약을 처음 해보는 지라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 없고, 여러 입장과 상황이 얽혀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차기작을 연재할 때는 이런 꼬이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신경을 써야함을 깨달았습니다.
어쨌든 지금 함께 달려주시는 독자님들을 위해 반드시 조아라 무료연재란에서 1부완결을 내고 나서 타사이트와 연계하고자 합니다.(연계 일정은 1월 중순 정도라고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12월 한달간은 좀 무리해서라도 완결을 위해 달릴 것 같습니다.ㅎ
혹 현재 연재분을 쌓아두었다 몰아보시는 독자님이 계신다면 2015년이 끝나기 전까지 꼭!! 달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늘 즐겁게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과 애정에도 항상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