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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시험
「아니, 잘 봐. 저건 유령이 아니라…….」
그중 유니가 찜찜한 눈으로 포로록 날아올라 팔짱을 꼈다. 녹색 바람이 위협적으로 훙 몰려들자 유령은 슬쩍 뒤로 걸음을 물렸다.
「어딜 도망가려고!」
캇.
바람의 힘이 굵은 빗줄기를 담고 뒤를 쫓았다. 하지만 유령은 흔적도 없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고 목표를 잃은 바람만이 빈 허공에서 날뛰었다.
“잠깐.”
유니를 제지한 쥬다스가 천천히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찰박.
쏟아지는 빗물이 끊임없이 수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물에 비친 은발이 아른아른 빛났다. 그가 딛고 있는 곳은 땅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 쥬다스는 호수 한가운데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그는 물의 정령왕 루니의 힘에 의해 물을 밟고 서 있었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어야 할 위치였다.
“…….”
마치 괴담에나 등장할 법한 상황이었다.
쥬다스는 자신이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호수 정중앙에 서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천천히 뒤돌아 호수에서 걸어 나왔다.
「이그레트, 방금 그거.」
“그래, 흔적을 쫓기 어려울 게야.”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쥬다스는 슬쩍 뒤를 돌아보곤 바람의 힘을 거두어들였다.
“유령도 정령도 아닌 애매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잠깐의 관찰만으로도 그가 상대의 정체를 유추해 내기엔 충분했다.
한 차례 호수를 바라본 쥬다스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금안에 무거운 빛이 감돌다 서서히 가라앉았다.
* * *
“예? 마, 만나셨다고요?”
기말고사가 시작된 지 3일째 되는 날, 그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 시험에 대해 중간 점검을 하고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와중에 쥬다스로부터 뜬금없이 유령 목격담을 전해 들은 아이들은 하나같이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소 틀린 말을 하지 않으며, 매사 반듯한 쥬다스가 한 말이었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유령에 대한 공포심이 있는 바이칼은 물론이고, 그냥 반쯤 농담 삼아 화두를 던졌었던 마르젠마저 어색하게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아이들의 질린 표정 앞에서도 쥬다스는 의연하게 제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래, 얼굴 없는 여자아이의 모습이라면 확실히 본 것 같구나.”
“……!”
번쩍.
때마침 검게 변한 하늘에서 번개가 빛났다. 뒤이어 하늘을 찢을 듯한 천둥이 우르릉 울리자 분위기는 완전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 하, 하.”
바이칼은 현실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딱딱한 웃음을 흘렸다. 정작 유령을 목격한 쥬다스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데 평범한 유령은 아니었어. 정령의 느낌이 옅게나마 감돌고 있었으니, 아마 그 아이는 본래 정령이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싶구나.”
“저기, 쥬다스 님.”
바이칼이 발표하듯 한 손을 들었다.
“애초에 걔가 유령인 상황부터 평범하지가 않은데요…….”
그 말에 모처럼 모여 있던 전원이 동감을 표했다.
이번엔 마르젠이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그런데 그 유령이 혹 뭐라고 말은 안 걸었습니까?”
“입이 없으니 말을 걸 리가 없지 않느냐.”
“……입이 없……. 상상 가니까 제발 그 이상 설명을 부추기지 말아주십쇼, 예?”
바이칼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만류했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공포보다는 호기심에 더 치중되어 있었다.
무관심한 척 입을 다물고 있던 크리스티나마저 긴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물었다.
“이 말씀을 저희 앞에서 꺼낸 이유가 있으시리라 압니다. 그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말대로 쥬다스는 아이들에게 흥미 본위로 유령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느긋한 어조로 대꾸했다.
“다시 만나러 갈까 한단다.”
“누, 누, 누구를요?”
이젠 학생이 아니라 연구원일 뿐이라 시험 스트레스와는 연관이 없는 아벨이었지만 지금만큼은 3일 밤낮을 새운 학생처럼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셔 있었다.
바이칼 못지않은 저질 담력을 소유하고 있는 아벨이었다.
공포에 잠긴 잿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한 쥬다스는 산들바람 같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 자리에 모인 아이들이 뜻을 이해하기엔 그걸로 충분했지만 에단이 부러 그 답을 재차 확인했다.
“……지금 다시 호수로 나가보실 생각이십니까?”
“오냐.”
한 치의 거리낌도 없는 긍정이었다. 그러자 모두의 반응이 각양각색으로 나뉘었다.
에단은 결연한 얼굴로 검을 챙겨 일어섰고, 아벨은 딸꾹질을 하면서도 투르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을 본 크리스티나가 낮은 한숨과 함께 책을 덮었고 마르젠은 빙글빙글 웃었다.
가뿐히 자리를 털고 일어선 쥬다스가 석상처럼 굳어버린 바이칼에게 시선을 주었다.
“으음, 바이칼. 무서운 일을 억지로 강요하는 건 아니란다. 가 보고자 하면 가고 아니라면 마는 단순한 선택이지. 어찌할 테냐?”
“……하, 그야 당연히.”
바이칼은 밤색 머리칼을 벅벅 긁적이며 굳었던 고개를 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려움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손바닥을 말아 쥐며 씩 웃는 입꼬리에 쥬다스도 마주 미소 지었다.
그들은 고급 방수 재질로 제작된 야광 녹색 우비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3일째 계속되고 있는 장마 탓에 공기는 몹시 습했다. 더위와 습기가 어우러진 답답한 날씨 속에서 시험의 절반이 막을 내리고 그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시험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쥬다스를 따라 유령을 확인하러 나온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만은 아니었다.
첫째는 유령의 정체를 직접 확인하고자 함에 있었고, 둘째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 주군인 1황자를 방치할 수 없다는 이유가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 무언가 보여주고자 하는 쥬다스의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었다.
‘살수.’
아이들은 이미 황궁에 갔을 때 쥬다스를 노리는 검은 손길을 직접 목도한 바 있었다. 쥬다스와 대적하는 세력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꼼꼼했다.
그저 몇몇 귀족가문의 권력만을 등에 업고 눈치 싸움만 즐기며 1황자를 견제하는 귀여운 수준이 아니었다.
쥬다스의 목숨을 노린 것은 암흑가 살수뿐 아니라 온갖 이능과 더러운 술수가 관여되어 있었다.
3황자를 제위에 옹립하려하며 황후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세력은 전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밖으로 드러난 곁가지만 잘라내서 될 일이 아니다.
마치 온몸에 퍼진 작은 두드러기처럼 3황자, 아니, 그 모친인 황후의 권속은 이미 십 년도 넘게 정계에 뿌리를 박아두었다.
황후 측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황자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쥬다스를 따르는 아이들은 그 사실을 이미 알아차린 상태였다.
필요하다면 마구간에 쌓인 오물더미에서 기생충이라도 잡아다 사용할 치들이었다.
‘혹 단순한 괴담을 가장하여 쥬다스 님을 노리는 살수가 섞였다면.’
과한 걱정일 수도 있지만 안이하게 움직이다 주군의 숨통을 내어놓는 것보다는 나은 판단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천둥 치는 빗속을 함께 걸었다.
쏴아아아.
굉장한 호우였다. 오죽하면 우비를 입어놓고도 얼굴과 목덜미 사이로 물이 새어 들어가 교복 자락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였다.
긴 바지나 스커트는 물기를 흠뻑 머금어 무겁게 늘어진 지 오래였다.
가뜩이나 사위가 어두운데 비안개까지 자욱하게 껴 시야 확보가 잘 되지 않았다.
코끝을 때리는 빗방울을 손등으로 훔쳐 낸 마르젠이 눈을 가늘게 좁혀 앞길을 분간하려 애썼다.
“보아하니 요 앞이 호수인 것 같습니다?”
루바흐의 호수는 한 군데에만 고여 있지 않았다. 학교 중앙에 자리한 대호를 중심으로 자잘한 다리로 이어져 5갈래 작은 호수로 순환하는 형식이었다. 규모로만 보면 언뜻 강이라고도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중 지난번 쥬다스가 유령을 만난 호수는 동쪽 기숙사 옆에 자리한 잔잔한 장소였다.
그리고 오늘 이들이 함께 당도한 호수는 제일 면적이 넓은 중앙 호수였다.
물가에 다가가자 빗소리는 한층 거세게 들려왔다. 크리스티나가 제일 먼저 호수로 다가갔다.
끊임없이 파문을 일으키는 물살을 들여다보다 다시금 빙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한 징조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오늘은 나오지 않을 셈인가 보군요.”
그리 말하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본 에단이 무덤덤한 어조로 응수했다.
“만나러 온다고 해서 무조건 나타나면 그것이 어찌 유령이겠습니까.”
“이 내가 유령의 사정까지 봐주어야 하나.”
“글쎄……. 당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유령이란 게 나오란다고 순순히 나올 리 없다는 에단의 논리에 반쯤 동의하면서도 크리스티나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우습군. 이곳에 서식하는 게 확실하다면 분명히 모습을 드러내게 될 터.”
“그리 산짐승 찾듯 생각하여 될 일이 아닙니다.”
‘에헤이, 이 양반들 언제는 흥미 없다더니…….’
마르젠은 누가 먼저 유령을 찾나 내기라도 할 기세인 두 사람을 구경하며 픽 웃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떨어져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바이칼이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유령이라는 놈, 원래는 혼자 있어야 마주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럴 필요 없단다.”
“예?”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건 이미 ‘사령’에 가까워졌으니.”
우우우.
세찬 빗소리를 뚫고 성인 남성이 낮게 오열하는 듯한 기묘한 소리가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 같기도 하고 파이프 관을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결국은 사람의 울음소리였다.
등골의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 돋는 소리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우, 우흐으으.
숨 쉬는 것도 잊고 소리를 듣고 있던 바이칼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다급히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 소리가 사령이 내는 소리라고요?!”
“으음. 아니, 이건 사령이 아니란다. 사령은 아직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어. 이 소리는 그냥.”
“그냥……?”
에단이 검집에 손을 얹었고 크리스티나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주변을 경계했다.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네 뒤에 있는 그자가 내는 곡소리란다, 바이칼.”
“아, 그냥 평범한 곡소리였군요……. 음?”
바이칼은 녹색 눈동자를 두어 번 깜빡였다. 그리곤 기름칠을 잊은 경첩처럼 삐걱거리며 허리를 틀어 뒤를 확인했다.
우흐흐흑.
“끄아악―!”
바이칼은 혼비백산하여 후다닥 쥬다스의 뒤로 숨어들었다. 수하가 주군의 뒤에 숨은 꼴이 되었지만 아무도 그 탓을 할 사람은 없었다.
에단이 단번에 검을 뽑아 갑작스레 나타난 대상을 향해 겨누었다.
“웬 놈이냐!”
흐어어어.
시퍼런 칼날을 눈앞에 두자 곡소리를 내던 상대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아예 주저앉아 통곡을 해대기 시작하는 남자를 보고 크리스티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유령?”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나타난 남자는 과연 유령이라 불릴 만했다.
우선 몸의 윤곽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본래 머리색이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통 파란빛뿐이었다.
또 몸체는 반투명하여 뒤에 사물이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빗방울마저 그를 뚫고 떨어졌다.
무릎 이하부터는 흐릿하게 흩어져 허공에 둥둥 떠 있었으며 차림새는 평민 남성이 입는 평상복이었다.
「뭐야, 저거 그거잖아.」
「그거다요!」
「응, 그거네요.」
「……그거군.」
쥬다스의 곁을 지키던 네 정령이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심드렁하니 주고받는 정령들의 대화 소리를 듣지 못한 아이들은 그저 긴장한 눈으로 유령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습을 드러내 놓고도 울음을 기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남자를 보고 크리스티나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그대.”
흐…….
울음이 뚝 그쳤다. 유령은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눈을 들어 크리스티나를 마주보았다.
동공이 따로 없고 눈알 전체가 그저 푸른색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기괴한 형상이었는데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이 그를 한층 더 괴이쩍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옛날의 이그레트였다면 '팀전'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많이 컸구나, 내새끼...
...근데 생각해보니 굳이 팀이 필요가 없는 사기캐긴 했네요...ㅎ
참, 그리고 2부에 대해 질문을 많이 주셨는데, 계속 상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합니다.ㅠㅠ 결과 나오는 즉시 공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독자님들이 최고에요. 엉엉...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늘 감사드리며 저 역시 여러분을 응원합니다.ㅎ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