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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Chicken Game : Ending
그 대화가 있고 나서 세이지는 장담한 대로 교황청에 남았다.
마치 죄수를 감시하는 간수처럼 아이는 하루 종일 형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황후가 사람을 보낸다면 떼를 써서라도 교황청에 남을 작정을 하고 있던 세이지의 염려와는 다르게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들의 부재를 진즉에 눈치챘을 텐데도 황후는 어둠이 내려 취침할 때가 지나도록 내내 잠잠했다.
그 바람에 세이지는 오히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어쩌지. 어머니께서 화가 많이 나신 걸까…….’
하지만 정화 세례의 결과만큼은 꼭 직접 보고 싶었다.
자기 의지로 행한 최초의 일탈은 아이에게 불안과 동시에 심장이 뛰는 긴장감을 함께 가져다주었다.
우리 밖으로 나왔다가 길을 잃은 새끼 양처럼 웅크리고 있던 세이지는 힐끔 쥬다스가 있는 자리를 쳐다보았다.
“…….”
신성한 힘으로 활활 타오르는 성화를 앞에 두고, 쥬다스는 제단에 무릎 꿇고 앉아 그 열을 쬐고 있었다.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과 그가 걸친 순백의 의복이 성화의 불길과 어우러져 마치 한 마리 고결한 백로를 보는 듯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뭐더라, 거룩한?’
세이지는 순간 그리 생각했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영혼도 없는 가짜를 보고 거룩하다니, 말도 안 돼! 졸려서 그런 거겠지.’
이른 아침부터 정화 세례가 예정되어 있는 쥬다스는 밤새 성전 안에서 성화의 기운을 받아야 했다.
그런 그를 감시하겠다고 나선 세이지 역시 성전 안에서 밤을 꼬빡 새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몰래 황궁을 나온 사실이 걱정되어 두근 반 세근 반 뛰던 심장은 갈수록 상황에 무뎌졌다.
아직 9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답게 세이지는 금방 지쳤다.
궁 안에서처럼 수발을 들어주는 사용인이 없으니 너무나도 불편했다.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의자도 처음에나 견딜 만했지 지금은 웬 야산의 바윗돌마냥 딱딱하고 시렸다.
그런 와중에 몰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이지는 결국 불편한 자세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콜.”
“예.”
콜은 작은 부름에도 즉시 응답했다.
몇 시간 동안 성화 앞에 무릎 꿇은 채 미동도 않고 눈을 감고 있던 쥬다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도 피곤하겠구나.”
쥬다스는 잠든 3황자를 긴 의자에 바로 눕혀주었다. 성전의 의자는 어린아이가 발 뻗고 누워도 자리가 남을 만큼 길었다.
그 위에 자신이 걸치고 있던 숄을 담요처럼 덮어준 그가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성전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건 나 혼자뿐이야. 그러니 이만 나가서 쉬거라.”
“무슨 말씀을 그리 매정하게 하십니까, 스…… 전하. 고작 제 편의를 챙기려 전하를 따라온 게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서운함이 실린 호소를 들은 쥬다스가 넌지시 물었다.
“내 이 아이에게 무슨 화라도 입을 성 보이느냐?”
“그래서가 아니오라…….”
콜은 잔주름이 패인 입가에 난처한 웃음을 매달았다.
이는 쥬다스가 루바흐에서 활기차게 퍼덕거리던 아이들을 보며 종종 짓곤 하던 표정과 흡사했다.
“후우, 뭔가를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늙으니 없던 겁도 늘어 이러는 편이 편할 뿐입지요.”
“원 녀석도.”
두 차례나 사제지간으로 만나 그 연을 이어가게 된 노인과 소년은 동시에 같은 표정으로 픽 웃었다.
아이가 깰까 봐 소리 죽여 웃은 두 사람은 도로 성화 근처로 돌아와 맨바닥에 편하게 앉았다.
그들은 타오르는 하얀 불꽃을 말없이 한참 응시했다.
성화에는 불이 연소하기 위한 땔감도, 무언가를 태울 때 나오는 연기도 없었다.
텅 비어 있는 은쟁반 위에서 마치 그린 듯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성스러운 힘이 담긴 불꽃은 뜨겁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서 뻗어 나온 따뜻한 기운이 주변에 넘실거렸다.
성화를 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히 진정되고 머리가 맑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두 사람은 광합성 하는 식물처럼 차분히 성화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콜이 문득 작은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쥬다스는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성화에 눈을 고정시켰다.
“전하께서 하고자 하는 일에 가장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아이입니다.”
“…….”
“아무리 어려도, 그곳에선 ‘적’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스승에게선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콜은 대답을 듣길 포기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스승은 겉모습은 어려졌어도 속은 옛날 그대로였다. 여전함을 반가이 여겨야 할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오래 서 있느라 무리했던 다리 근육을 주먹으로 툭툭 풀어주던 그에게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콜.”
고집스레 성화에 꽂혀 있던 시선이 방향을 돌려 콜을 똑바로 향했다.
“저 아이는 적이 아니라 내 아우란다.”
“……전하.”
“영특한 아이이니 곧 스스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아차릴 게다. 그 선택에 따라 어쩌면 네 말대로 적이 될 수도 있겠으나.”
무작정 현생의 핏줄이라 감싸려는 건 아니다.
그에겐 어차피 정을 느낄 가족이 없었다.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그는 가족의 사랑이란 걸 배우지 못했다.
그랬기에 쥬다스는 본 적 없는 사랑을 동경하기보다는, 아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자 했다.
“아직은 구르는 주사위며 파종하지 않은 밭이니, 깊은 생각일랑 잠시 내려놓고서 지켜보자꾸나.”
여전히 걱정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콜은 그 말에 공손히 알겠노라고 답했다.
쥬다스의 말대로 세이지는 아직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한 게 없는 아이였다.
전 황후를 죽이고 지금도 호시탐탐 쥬다스의 목을 노리고 있는 건 현 황후였지 그녀의 아들인 세이지가 아니다.
지금도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해 제대로 알고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일 뿐 다른 목적은 없었다.
지금 성전 안 불편한 의자에 누워 잠든 3황자 세이지는 그저 평범한 9살 소년이었다.
단순히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을 법한 위치에 있다 해서 당장 적이라 단정 짓는 건 어른의 횡포이자 일종의 낙인 찍기였다.
그 뜻은 알았지만 콜은 못내 찜찜한 마음으로 3황자가 누워 있는 의자를 돌아보았다.
‘과연 저 아이의 마음에 야욕이 없을까. 제 어미와 어미가 가르친 모든 진리가 카드로 쌓은 성처럼 무너질 텐데. ……진정 저 아이가 과거를 끊어내고 진실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콜은 그간 황실 소속 정령술사로 살아오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겪었다.
그가 쌓아온 연륜에는 사람의 본성에 대한 시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알기로 나이를 먹고 인간의 더러운 측면을 수없이 마주하는 데도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는 건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그간 제가 세상 때에 너무 물든 탓일는지요. 스승님, 저는 그리 공평하게 생각하질 못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똑같지 않다. 사람은 타고난 본성이 다르며 그를 양육한 환경에 따라서도 성질이 달라진다.
아이를 수태하여 낳은 모체나 자라난 환경을 보았을 때 3황자는 그리 긍정적인 가능성을 품은 인물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은…… 스승님 같지 않습니다.’
차마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한 푸념이 뜨거운 스프처럼 목구멍을 홧홧하게 데웠다.
콜은 이를 토해내는 대신 그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스승이 직접 경계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대신 경계하면 되었다.
다시금 자신의 할 일을 되새긴 콜이 눈을 떠 성화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 너머로 곤히 잠든 3황자 세이지가 보였다.
각자의 생각과 목적을 품은 채 교황청에서의 밤이 아주 천천히 지났다.
다음 날 이른 새벽녘, 여름이라 일찍 동이 트기 시작하는 탓에 정화 세례가 바쁘게 준비되었다.
막 떠오른 태양의 순결한 햇살과 밤사이 내린 이슬을 모아 만든 성수가 의식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화 세례는 성하께서 직접 주관하실 것이며,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은 세례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성전 안에 걸음해선 안 됩니다.”
성녀와 그녀의 수호견 헤브니시우스가 성전 문 앞을 지켰다.
이때엔 밤사이 쥬다스와 함께 성전에 남았던 콜과 세이지도 밖으로 나와 기다려야만 했다.
곧 교황이 도착해 성전 안으로 들어갔고, 문은 다시금 굳건히 닫혔다.
세이지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몰랐지만 긴장감에 손바닥 안으로 땀이 슬었다.
정화를 마치고 다시 저 문이 열릴 때에 자신이 믿어야 할 세계가 정해진다.
세이지는 지금이라도 불쑥 뛰어 들어가 세례를 중단시키고픈 충동과 그 끝을 보고자 하는 의지 사이에서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렸다.
그러다 문득 편안한 얼굴로 1황자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콜에게 시선이 미쳤다.
세이지는 그를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루바흐의 교사이자 황자의 호위를 자처한 자.
나이는 중년과 노년 사이로 보였으며 검, 마도서를 모두 지니고 있지 않으니 특별한 이능력자임이 분명했다.
세이지가 쳐다보든 말든 콜은 주인을 기다리는 충견마냥 우뚝 서서 성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형님의 호위라 하였지?”
“그렇습니다.”
콜은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어린 3황자에게 충실히 대답했다.
“이름이?”
“코르토반 옌이라 합니다.”
“‘옌’? 옌의 가주라면 들어본 적 있는데. 아! 그럼 설마 네가 그 유명한 황실 정령술사란 말이야?”
“소인, 3황자 전하께오서 알고 계신 바와 같은지는 모르겠사오나, 옌가의 가주이자 정령술사가 맞습니다.”
콜의 차분한 대답에 세이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코르토반 옌은 단순히 자질이 뛰어난 정령술사가 아니었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그레트’의 유일한 제자이자 불과 바람 듀얼 속성 최상급 정령을 수족처럼 부리는 강자!
지금은 나이가 들어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황실 소속 정령술사로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리 황자라 한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런 자가 한낱 호위 임무를 자처하여 저리 서 있다니 세이지로서는 도통 그 내막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음, 자네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어물쩍 호칭을 바꿔 묻는 세이지를 보며 콜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1황자 전하를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그걸 물은 게 아니야. 그러니까 왜.”
“…….”
“아냐, 질문을 바꿔야겠다. 형님을 지키고 싶다면 왜 이번 정화 세례를 막지 않았지?”
세이지는 답답한 투로 다시 물었다. 여기엔 미미한 원망도 함께 스며 있었다.
“막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네는 두렵지도 않아?”
“……3황자 전하, 외람되오나 소인이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성전 문을 한 번 쳐다본 콜이 3황자를 향해 돌아섰다.
세이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질문이 이어졌다.
“이곳 교황청에 무엇을 보시기 위해 오셨습니까?”
“그야 당연히…….”
당당히 답하려던 세이지는 그만 할 말을 잊고 주춤거렸다.
처음 황성을 몰래 떠날 때만 해도 가짜의 죽음을 확인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형은 세이지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인간다웠고, 화를 냈던 이전과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로 그를 환영해 주었다.
심지어 느긋하고 차분한 눈빛에 어울리지 않게 농담도 할 줄 알았다.
그런 존재가 죽기를 바란다는 말은 9살 세이지에게 너무 끔찍하게 다가왔다.
차마 소기의 목적을 답으로 내놓지 못한 3황자는 이를 조금 수정하여 내뱉었다.
“저 문이 열리는 걸 보기 위해서다.”
성전 문을 가리키고 있는 작은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었다.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한 3황자의 내적 갈등을 눈치챈 콜은 그저 표면적인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그렇군요’라는 중얼거림이 작게 흘러나왔다.
“1황자께서 정화 세례를 무사히 받고 나오신다면 그 뒤는 어쩌실 것인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
“가능성이 없다면 왜 여기에 직접 나와 계신 겁니까?”
“그, 그건.”
“소인은 3황자 전하께서 ‘그럴 수도 있다’라고 여겼기 때문에 나오셨다 생각했습니다만.”
“…….”
태연한 얼굴로 냉철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콜을 보며 세이지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문이 열리면 좋든 싫든 마주칠 수밖에 없겠지요. 진실이란 그런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여 주지 않으며, 듣고 싶은 것만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가시처럼 세이지의 가슴을 찔렀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갈 때마다 따끔하고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정녕 진실을 알고자 각오하셨다면 그 각오에 알맞은 용기도 함께 품으셔야 합니다.”
“용기…… 라고?”
“예.”
그제야 세이지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통증과 떨림의 정체를 직면했다.
이는 두려움이었다.
“그것이 바로 대루바르잔의 황자 전하께오서 하실 선택의 무게입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은 조금 늦어졌네요.ㅎㅎ;
설마 기다리신 분은 없...으시겠지...(...)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정주행선언(??)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내일 이 시간....아니, 오늘은 좀 늦었고 12시 정각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