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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Chicken Game : Ending
덜컹.
때마침 성전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빨리 확인하고픈 마음에 열린 문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세이지의 앞을 성녀 위그드라실이 막아섰다.
“이 이상 함부로 가까이 가실 수 없습니다.”
“크르릉.”
세이지는 수호견 헤브의 커다란 송곳니를 보고 멈추었다.
대신 자리에서 까치발을 들어가며 성전 안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붉은 예복을 갖춰 입은 교황이 천천히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교황은 정화 세례가 끝날 때까지 문을 지키던 성녀에게 무언가 작게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성녀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자 교황은 다른 고위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곧장 자리를 떠났다.
“형님은요?”
그때까지도 쥬다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이지가 성녀를 다그쳐 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기다리란 말뿐이었다.
“기다리라니요. 대체 뭘 기다리란 말입니까! 의식이 끝났는데 형님은 왜 나오질 않죠?”
“이 또한 하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 역시.”
털썩.
지레짐작한 세이지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무릎 꿇고 말았다.
최악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되었다는 기쁨보다는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좌절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한 칸씩 밀린 단추를 발견한 양 심기가 불편했다.
‘……나,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거지.’
바랐던 결과를 손에 쥐었는데도 만족할 수 없다.
자신이 품은 모순적인 심리에 세이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냐,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탁한 금안 앞으로 물기가 방울방울 모여들었다.
그러던 찰나, 아이의 곁을 지나간 콜이 일상적인 어조로 말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오냐, 밖에 서서 기다리느라 지루했겠구나.”
“허허, 간만에 그간 잊고 있던 기도를 드렸지요. 그 후엔 3황자 전하와 약간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세이지와?”
잠깐 새벽 기도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멀쩡히 나누는 대화 소리에 세이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황자로서의 품위도 잊고 맨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던 세이지를 가만 바라보던 맑은 금안이 곧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찌 그러고 있는 게냐, 세이지.”
“……형님?”
고였던 눈물 한 방울이 스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이지는 황급히 팔뚝으로 볼을 닦았다.
슬퍼서가 아니라 놀란 마음에 눈물이 났다.
말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쥬다스였다.
정화 세례를 받은 직후였기에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광채가 감돌고 있었다.
마치 몸속을 작은 전구들이 밝히고 있기라도 하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고한 황금빛이 반짝였다.
“사람은 누구나 영혼의 색을 가지고 있답니다. 정화 세례를 받고 난 직후엔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갓 태어난 아이처럼 깨끗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잠시 동안 이를 보통 사람의 눈으로도 식별할 수 있게 된다고 해요.”
“위그드라실.”
쥬다스의 부름에 위그드라실은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색은 어떤가요?”
성녀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으므로 쥬다스가 가진 영혼의 색을 몹시 궁금해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쥔 채로 대답을 기다리던 위그드라실의 귓가에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금색…….”
“금색, 인가요?”
세이지가 멍한 얼굴로 일어서 있었다.
아이는 바닥에 쓸려 더러워진 무릎을 털어낼 생각도 않고 되물었다.
“맞아요, 루바르잔 황가의 상징인 금빛. 저게 형님이 지닌 영혼의 색깔이라고요?”
“황금은 순수와 고귀, 또 지혜와 자애를 상징하는 색. 다른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하고도 무결한 빛일지니.”
성녀 위그드라실의 축복이 노래하듯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고난이 수초에 몸을 숨긴 물뱀처럼 그대를 찾아올지라 하더라도 이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라.”
멍하니 이를 듣고 있던 세이지는 쥬다스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을 뻗었다.
아이의 작은 손이 옷깃을 꾹 붙들었다.
“……살아 있잖아.”
“그래.”
“정화 세례를 받고도 살았어요, 형님은.”
“그랬지.”
쥬다스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황이 직접 주관한 정화 세례였다.
이를 의심한다는 건 교황을 의심한다는 뜻이며 곧 신성에 대한 모독으로 이어졌다.
그랬기에 세례 과정에 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쥬다스의 몸을 가득 채운 황금색 광채가 그 자체로 증명이 되었다.
극상으로 순도 높은 신성력이 그를 정화했다.
부정한 것은 씻기고 신성만이 몸과 영혼에 흐르고 있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엄숙함이 그에게 있었다.
‘진실이란 그런 것입니다.’
조금 전 콜이 했던 이야기가 세이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형님이 옳았어요. 형님은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이고, 가짜 따위가 아니었어.”
세이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어머니는 왜. 왜 내게 거짓을…….”
‘살아서 다행이다’라고 느낀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
생각만으로도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세이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다물었다.
“오늘 네가 알고자 한 진실을 하나 알게 되었구나.”
“…….”
“네 잘못이 아니다.”
세이지의 눈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런 때엔 어떻게 해야.’
그는 루바르잔 제국의 황자로 태어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자랐다.
서랍 깊은 곳에 보관해 둔 옥합처럼 귀히 여겨졌고 황궁 안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교육받은 적 없었다.
“모르겠어요. 나, 내가 형님께 심한 말을 한 거네요. 그렇죠?”
“그럴지도 모르지.”
“형님은 내가 밉지도 않아요?”
“이런, 미워해야 하는 게냐.”
웃음기 실린 대답을 들은 세이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으면 미울 겁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화날 거예요.”
“네게 억울하지도 분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는단다.”
“왜죠?”
이유를 묻는 아이에게 쥬다스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마른 사람에게 뚱뚱함을 탓하고 부자에게 가난을 탓한들 화가 나겠느냐? 마찬가지로 진실이 아닌 일에 굳이 화를 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란다.”
세이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다문 아이를 따라 쥬다스도 억지로 말을 요구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정화 세례를 받고 은은히 빛을 발하던 육체는 반나절이 지나자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의식을 치렀음을 증명하는 교황청의 인이 황궁으로 발송되어졌고, 쥬다스는 하루 동안 편히 쉴 수 있도록 방을 안내 받았다.
콜은 호위를 위해 쥬다스와 같은 방에 머물렀다.
내내 혼란스러운 얼굴로 상념에 빠져 있던 세이지는 말없이 옆방으로 가 틀어박혔다.
취침하기엔 이른 시각이었지만 밤새 성화의 기운을 쬐느라 찬 바닥에 무릎 꿇고 있기도 했고 아침에 받은 정화 세례 탓에 온몸이 노곤했던 쥬다스는 저녁도 먹지 않고 단잠을 청했다.
스승이 푹 쉴 수 있도록 불을 꺼준 콜도 조용히 간이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러나 콜은 잠에 빠져들지 않았다.
최상급 정령을 2속성이나 다루는 술사답게 그는 정신력을 집중하여 수마에 저항하고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했다.
콜은 황실의 권력 투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한평생 실감해 온 사람이었다.
황태자 즉위식을 코앞에 둔 이상 교황청이라 해서 안심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예민한 경계망에 음습한 그림자가 하나 걸려들었다.
「코르토반, ‘살의’를 품은 자가 근처에.」
최상의 힘을 지닌 바람의 정령이 그에게 위험을 알렸다.
자리에 누워 있던 콜이 스륵 가느다란 실눈을 떴다.
주인을 지키는 호위가 이미 침입을 알아챈 줄도 모르고 암살자는 때맞춰 습격을 시도했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려 눈만 드러낸 암살자가 품에서 마력이 집결된 알약을 꺼내 잇새에 물고 으득 깨물었다.
슈우욱!
순식간에 암살자의 몸이 손바닥만 한 나방으로 탈바꿈되었다.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즉 일종의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한 ‘변신술’이었다.
알약마다 지정된 모습으로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지속 시간은 약 5분에서 최대 10분 사이로 짧다.
고위 마법사나 특출한 감을 가진 존재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마법이었지만 지금처럼 어딘가에 몰래 숨어들어가기엔 안성맞춤인 아티팩트였다.
팔랑팔랑.
현란한 노란빛에 흑색 점이 두드러진 독나방으로 변신한 암살자는 미리 틈을 만들어 둔 창문을 통해 1황자의 방으로 숨어들어 갔다.
나방의 날갯짓 소리는 밤하늘을 떠가는 먹구름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팔랑거리며 방 안을 가로지른 나방이 마침내 곤히 잠든 쥬다스를 발견해 냈다.
소리 없이 주변을 한 바퀴 맴돈 나방이 쥬다스의 이마로 내려앉으려던 순간이었다.
화륵.
느닷없이 허공에 생성된 불덩어리가 나방을 집어삼켰다.
뜨거운 불길이 몸을 태우자 나방으로 변신했던 암살자는 마법이 풀려 본체로 돌아오고 말았다.
“크아악!”
본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어도 몸 여기저기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화기에 몸부림치는 암살자의 뒤로 손을 뻗은 콜이 서 있었다.
“지금 감히, 누굴 해하려 한 겝니까.”
“……!”
날카로운 황색 바람이 그의 손끝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말투는 점잖았지만 그 안에 실린 노기가 매서웠다.
‘호위가 있다고 했지. 젠장! 하필이면 정령술사였나.’
암살자는 고통을 참으며 콜을 노려보다 품에서 독침을 여러 개 꺼내 손가락 사이에 쥐었다.
비록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긴 했으나 그는 손속이 빠르고 정확한 전문 살수였다.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임무를 성공시켜야만 했다.
벌컥.
“형님? 방금 여기서 비명 소리가……!”
때마침 옆방에서 소란을 들은 3황자가 뛰어 들어왔다.
몸을 태우는 고통 속에서도 눈에 핏줄이 서도록 정신을 집중한 살수가 휙 독침을 세 방향으로 엇갈리게 날렸다.
하나는 콜을 향한 방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3황자 세이지에게로 날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독침은 본래 목표인 1황자를 노렸다.
우뚝.
그러나 그중 어느 하나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전부 허공에 멈추었다.
콜이 다루는 황색이 아닌 아름다운 녹색의 바람이 독침들을 감싸고 있었다.
“전하, 깨어 계셨습니까.”
“…….”
어느 틈엔가 눈을 뜬 1황자가 독침을 가만 바라보다 암살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금안과 마주한 즉시 암살자는 자신의 생이 여기서 끝났음을 직감했다.
우웅.
고작 최상급 따위의 힘이 아니다.
들끓는 용암처럼 분노한 불의 기운이 삽시간에 한 장소로 모여들었다.
바람이 가득 찬 풍선처럼 팽팽해진 기운을 느낀 암살자가 마지막 순간 3황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눈앞에 날아든 독침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세이지는 문득 암살자의 눈이 낯이 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라…….”
세이지는 합 입을 다물었다.
‘라한 경?’
분명 아는 인물이었다.
진짜 이름은 뭔지 몰랐지만 황후가 ‘라한’이라 부르는 걸 들은 적 있었다.
세이지가 아주 어릴 때부터 황후인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종종 나타나 짧게 무언가를 보고하고 사라지곤 했던 그림자 같은 자였다.
직접 말을 나누어본 적은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사람이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지난화 지각때 기다려주신 독자님들이 많이 계셨더군요 ㄷㄷ 헙.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지각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주행 달리시는 독자님들도 종종 계시던데 반갑습니다.ㅎ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애정과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