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80화 (8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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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Chicken Game : Ending

황궁으로 돌아온 황후는 자신의 처소에 들어가 쓰고 있던 검은색 모자며 하얀 장갑 등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철퍽!

고정 핀을 빼어 바닥에 던지자 매혹적인 붉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등 뒤로 흘러내렸다.

황후는 이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화장대 앞에 섰다.

서른이 한참 지난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이 거울에 비추어졌다.

‘……이게 나라고? 이렇게 초라한 표정을 한 게?’

아름답지만 사랑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황후의 표정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표정으로부터 비참함을 느꼈다.

황후는 충동적으로 손에 잡힌 보석함을 거울에 집어던졌다. 와장창 보석이 쏟아졌다.

그리고 쩍 소리와 함께 거울에 금이 갔다.

깨지진 않았지만 거미줄처럼 금이 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욱 초라했다.

“어, 어머니…….”

황후가 천천히 돌아섰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인지 세이지가 문가에 선 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아, 세이지. 이리 오세요.”

그녀는 자애롭게 양팔을 벌렸다.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떨던 세이지는 그제야 안심하고 황후에게로 다가와 안겼다.

“교황청엘 다녀왔다지요.”

“죄송해요, 어머니.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생겨서 그만.”

순한 양처럼 안긴 아들을 다독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이 어미는 세이지가 스스로 판단하고 세상을 알아가는 일도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답니다.”

황후는 아들의 일탈 행위를 학습에 필요한 일환이라 재정의했다.

혼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따뜻하게 등을 두드려 주는 어머니의 손길에 세이지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크게 안심했다.

‘그래, 이렇게 자상하신 어머니께서 일부러 내게 거짓을 말하셨을 리는 없어.’

세이지는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상념으로부터 그렇게 회피했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황후를 향해 말했다.

“참! 우리가 형님을 오해하고 있었어요, 어머니.”

움찔.

황후는 아들을 품에서 떼어놓았다.

두 모자는 지척에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있다 여긴 세이지는 용기를 얻고 계속 말을 이었다.

“형님은 정화 세례를 받고도 멀쩡했어요. 아, 영혼의 색도 볼 수 있었는데 맑고 깨끗한 황금색이었어요. 가짜라면 그런 색깔이 나올 리가 없잖아요?”

“…….”

“그러고 보니 저, 형님께 제대로 사과도 못하고 와 버렸어요. 이제라도 사과하면 받아주실까요?”

아들의 어깨에서 손을 뗀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리워진 그림자에 세이지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어머니?”

짜악!

생전 처음 겪어보는 후끈한 통증이 뺨을 달구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세이지가 멍하니 볼에 손을 올렸다.

손찌검을 당한 자국이 따끔따끔하고 뜨거웠다.

“‘오해’? ‘용서’를 구해?”

“……!”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요. 세이지, 설마 이 어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황후는 더 이상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대의 어미는 나예요. 지금껏 황자가 안전하게 자라도록 보호해 주고 길을 만들어준 게 이 어미란 말입니다!”

처음으로 듣는 호통이었다.

세이지는 사자 앞에 선 토끼처럼 그 자리에 오도카니 굳어버렸다.

“기껏 밖으로 나가 보고 들은 결과가, 고작 그 가짜의 눈속임에 속아 어미를 의심하는 우둔함일 줄이야…….”

황후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좁힌 세이지는 부어오른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바들바들 떨었다.

“실망입니다.”

“어,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소자는.”

그간 세상의 신이나 다름없던 어머니로부터 실망했단 소릴 들은 세이지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어댔다.

“이 어미의 말을 의심하고, 그 가짜를 형으로 인정한다면. 그래, 세이지는 군주의 자리를 넘겨주어도 좋단 뜻인가요?”

“잘못했어요. 어머니,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착한 아이가 되어야지요, 세이지.”

울음을 터뜨린 아이의 등을 토닥여 준 황후는 곧장 사람을 불렀다.

“이 어미가 다시 찾을 때까지 자숙하고 있으세요.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린다면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네…….”

세이지는 울먹이며 쫓겨나듯 방을 나갔다.

아이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황후는 걸쇠를 걸어 이를 잠가 버렸다.

방의 불을 모조리 꺼버리고 창문에는 커튼을 쳤다.

그렇게 하고 나니 방 안이 캄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밖은 아직 노을이 지는 저녁이었지만 그녀는 홀로 미리 어둠 속에 파묻혔다.

커튼 새로 스며들어오는 노을빛에 의지하여 이동한 황후는 화장대 서랍에서 호신용 단도를 찾아 꺼내 들었다.

날카롭게 벼린 날 위로 그녀의 붉은 머리가 비쳐 마치 루비로 만든 칼처럼 보였다.

쿠욱.

황후는 독한 눈빛으로 손잡이가 아닌 칼날을 손아귀에 꽉 쥐었다.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날이었으니 단숨에 손바닥이 찢어져 피를 흘렸다.

피 냄새를 맡은 사령들이 스멀스멀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피 냄새.」

「계약을…….」

「어서 제물을…….」

그워어어.

방 안을 뒤덮은 어둠이 뒤척이며 태풍 오는 날의 바람소리와 비슷한 소음을 일으켰다.

괴이한 소음이 점점 황후에게로 가까워져 왔다.

사령은 정령과 흡사한 존재였지만, 계약자를 아끼고 지키고자 하는 정령과 달리 호시탐탐 그들의 피와 영혼을 노렸다.

사령을 부리는 술사가 잠시라도 정신력이 흐트러지거나 얕보인다면 사령은 망설임 없이 술사를 파고들어 영혼을 뜯어먹는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에 떠는 대신 자리에 꼿꼿이 선 채 손바닥을 앞으로 뻗어 피를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먹게 해줘……!」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빙빙 돌던 사령 하나가 참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퍼억!

어디선가 날아온 강한 사기(邪氣)에 사령이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토마토처럼 터져 버렸다.

“흐응, 일부러 피를 흘려 나를 불렀나.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분명 황후 홀로 있던 방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느 틈에 붉은 눈동자의 사내가 커튼을 쳐놓은 창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니면, 잡아먹히는 걸 좋아하는 악취미라도 있었나?”

분명 창문을 전부 닫아두었는데 커튼이 펄럭거렸다.

그 사이로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의 등 뒤로 검푸른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현존하는 사령술사 중 최강, 최악의 힘을 지닌 제네럴급 술사 프리드였다.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그댈 부른 게 아닙니다.”

“상당히 초조한 모양이야, 황후마마. 엄밀히 따지자면 이거 반칙이라고. 우리 ‘거래’는 지난번에 완전히 끝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

프리드는 큭큭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는 붉은 안광에 황후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그를 부른 용건을 밝혔다.

“사람 하나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저주를 알려주십시오.”

“호오?”

“단 한 명이면 됩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가 가진 이능으로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내게 주세요.”

“당돌하군.”

황후의 코앞까지 다가선 프리드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내가 얻는 건?”

“당신에겐.”

“말해두지만 지난번처럼 ‘미래의’ 공약 따위는 하등 소용없어.”

“……!”

“사야 황후, 그건 네게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을 때나 가능했던 거래지. 지금은 아니잖나?”

황후는 으득 이를 갈았다.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지금 황태자가 될 존재는 3황자가 아닌 1황자였다.

그녀는 더 이상 어떤 부귀영화도 약속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애초에 프리드가 원한 건 그 정도 선이 아니기도 했지만 지금의 황후로선 휘하의 귀족 세력을 붙들 힘조차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프리드가 현재 황후의 입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구미가 당기는 상품을 내놓아 보라고. 응? 이를테면 영혼이라도 바친다든가.”

재미있다는 듯 내려다보는 뱀 같은 눈동자에 황후는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래요.”

“흠?”

“제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그걸로 1황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만 있다면.”

생각 외로 즉답하는 황후의 강단에 프리드는 허 하고 숨을 뱉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채 웃음소리로 완성되지 못한 애매한 호흡이 흘러나왔다.

‘루바르잔 황후의 영혼이라.’

“……걸작이로군.”

“혹 이로 부족하다면.”

“아니, 그걸로 하지.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꽤 재미있게 됐어.”

프리드의 변덕스러운 결단에 황후는 눈을 빛냈다.

“그럼 어서 방법을.”

“아, 그러지. 그 전에 분명히 해둘까.”

프리드는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기 중에 먹구름 같은 검은 덩어리가 뭉글뭉글 피어났다.

그 덩어리는 이내 하나의 검은 두루마리 형상으로 변했다.

이를 본 황후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저주가 적힌 두루마리를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린 프리드가 슥 그녀를 향해 다시 시선을 주었다.

“이능의 방해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강력한 저주는 딱 한 가지. 대신 제약이 있다. 대상을 죽이고자 하는 강한 염원과 시전자의 생명력을 담보로 해야만 한다는 것.”

“?”

이해하지 못한 황후가 눈을 치뜨자 프리드가 두루마리를 흔들어보였다.

“나 참. 뭘 그리 새삼스레 순진한 흉내를 내지? 저주에 실패하면 그 반동을 네가 대신 입는다는 말이야. 즉 그가 죽으면 당신은 사는 거고, 만에 하나 그가 저주를 이겨낸다면 죽는 건 당신이 되는 거지.”

“나는 1황자를 죽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달라고 했을 텐데요.”

“백퍼센트 성공하는 저주란 없어, 사야 황후. 그런 걸 할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겠지.”

프리드의 말은 옳았다. 황후는 더 따지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알기로 사령술 중에 이 이상 효과를 낼 수 있는 저주는 없다. 또한 이 저주에 걸려 살아남은 인간 역시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지.”

황후의 눈앞에 검은색 두루마리가 내밀어졌다.

“자, 어쩔 텐가. 왕급 사령의 저주가 기록된 물건이다.”

“…….”

영혼과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셈이었다. 황후는 프리드를 잠시 노려보다 천천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황후의 손끝이 두루마리에 닿기 직전, 프리드가 무심한 투로 경고했다.

“뭐 나라면 ‘그’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거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 테지만.”

“무슨…?”

“사야 황후, 너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을 거다.”

단정하여 얕보는 말에 황후의 손아귀에 콱 힘이 들어갔다.

‘이길 수 없어?’

숨이 막힐 듯한 분노와 모멸감에 사로잡혀 손을 떠는 황후를 내려다보며 프리드는 즐겁게 웃었다.

꼭 그녀가 아니더라도, 그 이그레트를 어느 누가 정면승부로 이긴단 말인가.

‘하지만 유흥정도는 되겠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누구든지 소망이 지나치면 악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악인으로 태어났다기 보단 '결국 그렇게 되었다'. ...물론 주관적 이유가 있다한들 그게 옳다는 준거는 되지 못합니다. 악은 악일 뿐.

(그런 측면에서 프리드는 명백히 수많은 인명을 자기 필요에 따라 살해한 악인이죠 ㅎ)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 마셜최고 님과 피어나래 님께서 소중한 팬아트를 보내주셨습니다!(꾸벅) 공지에 추가해두었으니 함께 감상하십시다.ㅎ)

(++ 참, 어워드 투표(?)로 보내주신 1654표에도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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