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81화 (8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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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Chicken Game : Ending

운이 좋다면 죽이진 못하더라도 반쯤 망가뜨리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 정도 존재가 망가진다면 과연 어찌 될까. 재앙…아니, 세상에 종말이라도 불러올 텐가?’

상상만 해도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떤 결말이 나든 프리드로서는 잃을 것 하나 없는 싸움이었다. 악마같이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깃든 즐거움을 읽어낸 황후가 이를 악물고 두루마리를 낚아챘다.

탁!

검은 두루마리가 그녀의 손에 넘어감에 따라 계약이 성립됐다.

프리드의 그림자에서 사령 릴리스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매끈한 검은 부츠와 딱 달라붙어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가죽옷을 입은 릴리스는 고혹적으로 웃었다. 그녀의 엉덩이 끝에는 끝이 세모꼴로 솟은 검은 꼬리가 길게 늘어져 흔들거렸다.

릴리스는 두 팔을 뻗어 아기처럼 사야 황후에게 안겨들었다.

그리곤 매혹적인 검은 입술로 황후의 이마에 키스했다.

「도장 꽝. 후후훗, 이제 무르기 없기~?」

장난스러운 말과 달리 릴리스가 키스한 이마에는 선명한 표식이 새겨져있었다. 사령과의 계약을 나타내는 8개의 각으로 이루어진 별이었다.

우우웅

별은 물에 녹아드는 독약처럼 황후의 이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아도 독을 부운 물이 독성을 띄게 되듯, 황후 역시 그 영혼에 사령의 표식을 각인하게 되었다.

“모처럼 자비를 베풀어 경고해주었는데 들어먹질 않는군.”

“기회를 준 것도 당신이죠.”

“그도 그렇지. 뭐, 잘해보라고.”

프리드는 영혼을 걸어 얻어낸 검은 두루마리를 펼쳐 저주를 시전하는 황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픽 웃고 돌아섰다.

‘그럼… 이그레트님. 당신이 믿음을 준 아이가 얼마나 멋진 선택을 해줄지, 기대해보도록 할까.’

그는 방문 너머 이 모든 것을 엿듣고 있던 한 존재를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세이지는 스스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처소로 돌아가기 전, 교황청에서 1황자를 습격했던 암살자에 대해 생각이 미친 세이지는 이를 확인하고자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라한. 어머니의 사람인 라한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교황청에서 1황자암살을 시도하다가 불타 끔찍하게 죽어버린 악인이 정말 그 라한이 맞았을까.

반대쪽 뺨을 맞더라도 어머니로부터 아니라는 대답을 들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진짜 진실이 어찌되었든 간에 어머니의 답이 중요했다. 세이지는 어미로부터 미움 받고 싶지 않았고, 혹 실망한 그녀에게 버려질까 그게 가장 두려웠다.

이제 겨우 ‘진짜’라고 느껴진 배다른 형보단 아직까지 세이지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건 어머니인 사야 황후였다.

그 단순한 욕심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덜덜덜

세이지는 비틀거리며 떨리는 발을 천천히 내딛었다. 정신없이 가던 도중 몇 번이고 힘이 풀려 넘어졌다.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황후의 궁에서 멀어지려 발악했다.

지나가던 다른 시녀의 도움으로 자신의 처소까지 무사히 귀환한 세이지는 그대로 침대로 기어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냐.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어머니가, 어머니께서 그럴 리가…….’

겨우 9살 난 세이지가 받아들이고 견디기엔 너무나도 크고 가혹한 진실이었다. 후끈거리던 볼이 이번엔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갔다.

세이지는 가물어 노랗게 마른 잎사귀처럼 소리 없이 오열했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한 아이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            *            *

딸그락!

손에서 미끄러진 포크가 접시 사이를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소스가 튀어 하얀 옷을 붉게 적셨다.

「이그레트? 왜 그래?」

유니가 제일 먼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잠시 멍하니 손을 놓고 있던 쥬다스가 천천히 가슴께를 짚었다.

‘방금 뭔가.’

순간적이지만 묘한 울렁거림이 가슴을 파고들었었다. 실제적인 타격은 없었으나 어지럼증을 동반한 이상한 심장박동이었다.

다시 정상적으로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생각에 잠기려는 그를 콜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전하? 혹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아니.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야.”

소스가 튀어 더럽혀진 옷을 닦아주기 위해 다가온 시종 로한을 물린 쥬다스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지금은 황궁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갖는 저녁식사시간이었다. 다른 객은 없었고 호위로 따라온 콜만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포탈을 이용해 이동한데다 달리 신경 써야할 문제도 없었던 평온한 하루였던지라 마음 편히 식사를 함께 즐기던 콜은 화들짝 놀라 그를 따라 일어섰다.

음식들엔 문제가 없었다. 식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모든 음식은 은식기에 담아 나왔다. 또한 독을 감별하기 위해 미리 기미를 보는 시녀도 있었으니 독에 의한 증상은 아니었다.

잠깐 멍했던 걸 빼고는 쥬다스의 상태가 딱히 이상해보이지도 않았다.

‘혹 어제 있었던 습격 탓에 놀라셨나.’

콜은 이것저것 염려하여 불안한 심정으로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제자에게 쥬다스는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저어보였다.

“내가 아무래도 영 피곤한 모양이다. 좀 쉬고 싶으니 따라올 필요는 없어. 콜 너는 마저 식사를 하고 나서 편히 쉬거라.”

“…예, 전하. 쉬십시오.”

피곤하다는데 굳이 들러붙어 귀찮게 할 이유는 없었다. 황궁에 온 이상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수준 높은 능력자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어 보안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 해도 콜은 1황자의 방과 가장 가까운 객실을 주장했다. 혹시 몰라 바람의 정령을 붙여놓기까지 했다. 과보호에 가까운 콜의 대처를 알고 있을 쥬다스는 거기에 대해서는 별 말 않고 넘어갔다. 다만 콜이 무리하지 않고 쉴 때만큼은 푹 쉴 수 있도록 눈치껏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스승의 따스한 배려에 대해 감사히 여기면서도 콜은 걱정스런 낯으로 그를 배웅했다.

방으로 들어간 쥬다스를 걱정하는 건 정령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정령은 그의 주변을 맴돌며 끊임없이 상태를 확인하려들었다.

「정말 괜찮아? 응?」

「좀 전에 표정이 진짜 안 좋았다요!」

「으응. 아픈 게 아니라면, 혹시 나쁜 생각이라도 들었어요?」

계약자와 감응하여 고통이나 감정에 민감한 정령들이었기에 큰 이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호들갑을 떠는 걸 멈추지 않았다.

쥬다스는 그들을 부드럽게 다독여 진정시켰다.

“괜찮단다. 잠을 설쳐서 그런 모양이야.”

「…끄응, 보통 사람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네가 그런 이유를 대면 인정할 수가 없는걸.」

「그야 이그레트니까요.」

쥬다스는 볼을 부풀리고 웅얼거리는 유니와 이에 동조하는 카니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그리곤 침대로 가 누우며 말했다.

“어제 정화세례를 받아서 예민해졌을 수도 있겠지. 물론 그리 걱정할 만한 상태는 아니다만.”

「그런가? 아무튼 이참에 앞으론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쉬어버릇 해.」

「맞다요.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자주 쉬어야한다 했다요! 에, 뭐더라. ‘기력이 딸린다’?」

「……그건 육신이 늙었을 때 이야기고. 바보야.」

「에엥?」

「지금의 이그레트는 아직 청춘 맞거든. 아니 청춘이라곤 시작도 안했거든! 완~전 솜털이 뽀송뽀송한 아가거든!」

「에에에!」

‘아니,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닌데…….’

쥬다스는 말려야하나 고민하다 그저 내버려두는 쪽을 택했다.

유니에게 타박을 들은 토니는 다시금 반박을 시도했지만 언제나와 같이 그녀의 현란한 말빨에 밀리고야 말았다.

쥬다스는 정령들의 조잘거림을 들으며 편안히 눈을 감았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그들과 함께 세상을 떠돌았던 시절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너희들은 늘 한결같구나.’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눈밭에 버려진 갓난쟁이가 얼어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일도,

무수한 위협과 위기 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던 일도,

숨이 멎던 그날까지 홀로 외롭게 늙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고마워.’

추억은 그를 그리는 붓끝을 따라 이어지고, 오래지않아 이내 깊은 잠으로 이어졌다.

고른 숨소리를 뱉는 쥬다스의 곁에 옹기종기 모여든 정령들은 머리를 맞대고 잠든 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도 고마워.」

「필요로 해주었다요.」

「다시 불러주었구요.」

「…네가 살아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서로를 향한 감사가 계약의 흔을 타고 맞닿았다. 같은 감정, 같은 추억을 느끼며 네 정령은 동시에 웃었다. 까르르 어린아이 같은 웃음소리가 잠든 쥬다스의 주변을 감돌았다.

그리고 그 행복의 틈새로, 한을 품은 저주가 스멀스멀 스며들기 시작했다.

*            *            *

휘오오오―

눈발이 뒤섞인 찬 겨울바람이 매섭게 울었다. 소복소복 쌓이는 눈송이가 하늘이 내리는 수줍은 인사처럼 그의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차가운, 눈?’

이그레트는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대지를 후끈 달구는 여름의 태양광이 쨍하니 내리쬐고 있었다. 한여름에 눈이라니, 몹시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멍하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제일 먼저 새하얗게 세상을 뒤덮은 눈밭이 보였다. 흐릿한 하늘에선 여전히 함박눈이 펑펑 내려오고 있었다.

이그레트는 냉기가 파고들어 벌개진 손으로 눈 쌓인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그레트!」

화악

그가 깨어남에 따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녹색 정령이 와락 그에게 안겨들었다. 익숙한 존재였으나 최근 늘 보던 손가락만한 작은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그레트는 한 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유니?’

「걱정했어.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억지로 힘을 사용해서라도 네게 도움을 주려던 참이었다구.」

술사가 잠이 든 상태에서는 계약한 정령이라 할지라도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없다.

정령왕이라 해도 기껏해야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는 정도로 미미한 영역 안에서 움직여야했다.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더 상위의 존재로부터 크게 처벌을 받는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유니였지만 계약자의 목숨이 위험에 처할 경우에는 어떤 벌을 받더라도 힘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울먹거리며 그를 꼭 끌어안는 녹색 정령을 내려다보며 이그레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유니.”

「응?」

울망울망한 눈을 들어 응답하는 정령은 분명 유니였다. 그러나 실제 인간과 같은 크기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외향은 아주 먼 과거에서나 유니가 나타내던 형태였다.

이그레트는 설마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손가락은 내놓고 손등만 감싸주는 핸드워머와 낡아빠진 하늘색 후드로브가 보였다. 길게 내려오던 은빛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익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목덜미까지 단정히 잘라낸 금발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발이라곤 해도 화사한 색깔이 아니라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 진한 노랑에 가까웠다.

그제야 그는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여긴 나의 과거구나.’

금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열여덟 살 소년.

지금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을 제대로 자각하기 이전의 ‘이그레트’, 즉 전생의 존재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 지난 화 코멘트들이 쥬다스 죽으면 세계멸망설(...) (+프리드개이득설(?))

일단은 제 기준에선 해피엔딩입니다.ㅎ

즐거운 토요일 보내셨길 바랍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정주행인증(?)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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