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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Chicken Game : Ending
‘꿈? 아니면……환각인가.’
그는 차분히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갑작스레 전생으로 되돌아온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이것이 현실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그레트가 침묵하자 그의 주변을 둘러싼 네 존재가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왔다.
「추운 데서 잠들어서 몸이 아픈 걸까요?」
「…아픈 것 같진 않은데.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긴 하군.」
그보다 좀 더 키가 큰 소녀의 모습을 취한 불의 정령 카니가 걱정스레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 말에 푸른 늑대의 모습이 아닌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 서있던 루니도 툭 던지듯 대꾸했다.
그런 그들의 틈에서 황토색 머리 꼬마가 양 팔을 휘적거리며 끼어들었다.
「헤헤. 그래도 다행이다요! 조금만 늦었어도 유니가 활화산처럼 뻐엉 폭발했을 거……우에에!」
「그럼! 넌 이그레트가 얼어 죽어도 좋다는 거야 뭐야?!」
「아으에! 으에 아이아여!(아닌데! 그게 아니다요!)」
유니에게 볼을 꼬집혀 바둥거리는 모습은 최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전부 인간의 크기에 맞춰 실체화되어있었다. 네 정령들이 손가락만한 요정처럼 크기를 줄이기 시작한 건 더 나중의 일이었다.
때문에 이때의 넷은 이마에 박힌 보석과 날개를 제외하고 본다면 영락없이 사람과 같았다.
기억 속 정령들의 과거를 마주하게 된 이그레트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주변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배경은 겨울, 장소는 어느 변방의 산기슭인 듯 했다. 이맘때의 이그레트는 방랑자였다.
자신이 가진 힘의 크기를 모르고, 날 때부터 그래왔듯이 그저 아무 목표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가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분명, 한 가지 사건과 조우함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크게 변화했다.
‘그게 아마 이 무렵이었을 터인데.’
그는 천천히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열여덟 살, 눈 쌓인 언덕길, 길에서 잠에 들었다 얼어 죽을 뻔 했던 몹시도 추운 겨울날.
「어?」
그때 마침 유니가 귀를 쫑긋하며 토니를 놓아주었다.
「근처에 사람이 있어.」
“사람?”
「응. 근데 좀 다쳤나봐. 상처가 깊진 않은데 피를 많이 흘렸어. 날씨도 춥고, 그냥 놔두면 오늘 안에 숨이 질 것 같은데?」
눈 내리는 겨울 숲이란 인적이 드문 법이었다. 그런데 부상을 입은 채 눈밭을 헤매는 사람이라니,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린 날의 이그레트는 별 다른 의심 없이 그를 도왔다.
분명 이번의 선행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시발점이 되었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결단도 내리기 전에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유니, 그에게 인도를 부탁한다.”
홀린 듯이 말하고 나서야 한번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마치 연극 속 배우가 된 것처럼 그는 과거의 행동을 재연하고 있었다.
지금 말하고 움직이는 이그레트는 자신이되, 실제 자신이 아니었다.
영상이 재생되듯, 혹은 실이 달린 인형처럼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는 과거의 자신일 뿐이었다.
어린 날의 이그레트는 녹색 바람이 이끄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달려 도착한 장소에는 유니가 알려준 대로 어깨에 검상을 입은 한 남자가 쓰러져있었다.
“!”
이그레트는 쓰러진 남자를 부축해 일으켜 앉혔다. 고통을 느낀 남자가 잘게 기침하며 마른 입술을 열었다.
“살…려…….”
“도와드리겠습니다. 근처에 민가가 없으니 일단 여기서 몸부터 녹이도록 하십시오.”
급격히 체온을 잃어 시퍼래진 손끝이 덜덜 떨며 도움을 갈구했다. 이그레트는 두말 않고 불의 힘을 사용해 온기를 전달했다.
후웅
따뜻함을 품은 녹색 바람이 눈을 녹이고 포근하게 주변을 감쌌다. 아프도록 살갗을 때리던 겨울바람이 아니라 늦봄에나 만날 수 있을 법한 그런 살가운 바람이었다.
한겨울에 기적 같이 불어온 온풍이 얼었던 흑갈색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가자 남자는 가물가물하던 눈을 간신히 뜨고 중얼거렸다.
“처, 천국…?”
“아뇨. 죽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쉬십시오.”
실제 죽어 천국에 왔든 도움을 받아 살았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던 지라 부상 입은 사내는 결국 그대로 정신을 놓고 기절했다.
기절한 사람을 그냥 둘 수는 없었기에 이그레트는 일단 그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를 감쌀 깨끗한 천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를 대신할 것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땅에서 슈루룩 솟아오른 나무줄기에서 특이한 향을 뿜어내는 열매가 열렸다. 뿐만 아니라 상처에 좋은 약효를 지닌 풀들이 기적처럼 겨울의 척박한 땅에서 파릇파릇 자라났다.
자라난 식물 중 어떤 것은 질긴 잎사귀로 변했다.
이그레트는 부상에 좋은 열매와 약초를 따다 각각 분류했다.
그 중 일부는 즙을 낸 뒤 깨끗한 물을 섞어 남자의 상처에 뿌렸다. 환자에게 고통을 느낄 정신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나머지는 잘게 가루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 뒤 질긴 잎사귀로 환부를 아프지 않게 묶어두었다.
의술에 대해 몰라도 땅의 정령왕 토니의 힘이라면 날붙이에 베인 상처 정도는 지금처럼 간단히 처치할 수 있었다.
「이그레트, 이 사람 귀족이야.」
유니가 남자의 머리맡을 기웃거리며 알려주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젊은 청년이었다. 다치고 고생을 하는 바람에 잔뜩 더러워져있었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옷도 본래는 값비싼 고급 의상이었다.
「귀족? 그거 인간 중에서도 높은 위치 아니다요?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다요?」
“으음, 그럴 만한 사연이 있겠지.”
「그게에~ 일단 귀족이긴 한데 말이야.」
유니는 바람이 가져온 정보를 이그레트에게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이 산 밑에 있는 작은 영지를 돌보는 영주의 아들이라나봐. 대단히 높은 위치에 있는 귀족은 아니고, 오히려 귀족치곤 별로…땅도 조그맣고 재물욕심이 없어 부를 쌓지도 못한.」
「그럼 돈이 없어서 저 꼴이 된 걸까요?」
「아! 들어봤다요.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니는 쿵짝을 맞추는 카니와 토니를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영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손가락을 입술에 얹고 한숨을 폭 쉬었다.
「토니 네가 웬일로 유식한 말을 다 알아? 뭐 꼭 그런 의미에서 칼침을 맞은 건 아니지만.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이름뿐인 귀족이라 표적이 된 건 맞아.」
「?」
어리둥절해하는 토니와 함께 아직 십대소년에 불과한 이그레트도 함께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유니는 날개를 움직여 사뿐히 허공에 떠올라 손짓발짓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느 산골 작고 척박한 영지에~ 욕심 없이 자기 위치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영주님이 있었답니다. 그 영주님에게는 똑똑한 아들과 몹시 아름다운 딸이 하나씩 있었지요!」
「헤에.」
「가난하지만 자애롭게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님 덕분에 사람들은 큰 불만 없이 지냈습니다. 두 자녀도 무럭무럭 자라 집안일을 도왔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화목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어디선가 불어온 녹색 바람에 밀려 유니의 손이 풀썩 쓰러지는 흉내를 냈다.
「우연히 영주님의 아름다운 딸을 발견해 첩으로 삼고자 수작을 부리던 높으신 고위귀족 나으리께 그 딸래미가 반항하다 실수로 피를 보게 만들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고위귀족이 걔한테 확 누명을 씌워버렸고! 이걸 해명하려고 괜히 나섰다가 돈빨과 권력빨에 밀려 실패한 영주님은 졸지에 억울하게 반역을 꾀한 죄인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일이 꼬이고 꼬이고 또~ 꼬여! 화목했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
「그 와중에 간신히 도망쳐 나온 불쌍한 아들래미가 바로 저기 저 남자!」
유니가 휙 손가락을 들어 기절한 청년을 가리켰다. 그리곤 심드렁하니 말을 맺었다.
「―라는 진부한 얘기.」
“진부하다니. 유니, 이런 일이 귀족사회에서는 잦은 거야?”
평민으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려져 떠돌이로 살아가던 당시의 이그레트가 귀족체계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응, 뭐. 아주 흔한 건 아니더라도 종종 있을 법한 이야기야. 오죽하면 이런 주제로 동화도 많이 나왔겠어? 물론 동화책이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지만 현실은 다르지.」
“…몰랐어. 그들도 나름의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안타까운 눈으로 쓰러져있는 이름 모를 청년을 바라보는 이그레트를 보며 유니는 어쩐지 동심을 파괴한 기분이 들었다.
열여덟이면 그리 어린 나이도 아니건만 그들의 계약자는 지나치게 순진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줘야 할지, 아니면 험한 세상에서 더 상처받기 전에 미리 와장창 깨놓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유니를 놔둔 채 이그레트는 눈이 녹은 바닥에 모닥불을 하나 지폈다.
화륵
바람이 전해주는 온기와는 또 다르게 후끈한 열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뻔히 사연도 알게 된데다 상처입고 쓰러진 사람을 추운 눈밭에 그냥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는 떠돌이였다.
목적 없는 여행길을 늦춘 들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그레트는 모닥불 앞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쓰러진 남자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낯선 이가 눈을 뜬 건 그 다음날 동틀 무렵에서였다.
새벽의 어둠이 전부 가시기 전 푸르게 물든 세상 속에서 남자는 악몽으로 인해 헐떡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붕대 대신 넓적한 잎사귀로 싸매어진 상처자리를 발견한 그는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버지? …한나?”
부친과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남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꿈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을 가졌다.
“난……. 결국 죽은 건가.”
사방이 눈으로 덮인 산인데 그가 누워있던 자리만 따뜻한 풀밭이었다. 그 앞에는 장작 없이 홀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도 보였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멍하니 굳어있던 남자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신이 드셨네요. 하지만 무리하진 마십시오. 상처가 꽤 큽니다.”
“…누구요!”
“아.”
이윽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소년의 모습에 남자는 경계하던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노랑이나 갈색 계열 머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색이었다. 게다가 아직 나이도 어려보이고 위협적인 차림새도 아니다.
그러나 곧 숨을 흡 들이마시고 말았다.
“설마 저것들은.”
소년의 곁에는 이마에 각각 다른 색상의 보석을 박아 넣은 네 존재가 함께 하고 있었다.
외형은 인간과 닮았지만 등에 달린 날개며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흩뿌려지는 은은한 빛줄기가 그들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정령? 그것도 각기 다른 4속성인가?!’
남자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믿을 수 없었다. 책으로만 접했던 정령이라는 존재를 넷이나 부리다니!
시골 작은 영지를 다스리던 귀족 청년의 짧은 식견으로도 이는 ‘보통’의 범주를 벗어난 어마어마한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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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멋진 작품들도 많은데 어워드투표에서 이그레트를 선택해주신 독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꾸벅))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