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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Chicken Game : Ending
그가 무어라 할 말을 잃고 눈만 부릅뜨고 있자 소년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런, 인사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이그레트’입니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참에 쓰러져계시던 것을 발견하여.”
“…나, 나, 난 ‘윌리엄 고트’라고 한다.”
귀족의 체면이고 뭐고 본래도 잘 챙기지 않던 것이지만, 저 존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보는 심정으로 이그레트를 바라보았다.
“그, 그것들은. 자넨, 아니 당신은 혹 정령술사인가?”
“네. 제 친구들입니다.”
이그레트는 그동안 사람이 별로 없는 장소를 위주로 떠돌아다녔다.
그게 아니더라도 정령에 대해 알아보는 사람은 희박했다. 마을에 들릴 일이 생기면 정령들이 알아서 날개를 감추는 등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한 탓도 있었다.
그는 정령의 힘을 남용하지도 않았고 그럴 만한 일도 없었다.
그러니 자의든 타의든 이 시점에선 이그레트가 정령술사로 이름을 떨치기 전의 상황이었고, 또 그 자신도 그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 무게인지 전혀 모르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여상히 대답하는 이그레트를 보며 윌리엄은 다급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섰다.
“도, 도와줘! 아니,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윌리엄은 심지어 평민인 이그레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계급 따윈 이미 상관없었다. 그는 도망자의 신분이었다. 평민보다 못한 게 죄인이다. 비록 실제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법적으로 윌리엄은 당장 목이 베여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인 것이다.
“내 부모와 누이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끌려갔습니다. 제, 제발 도와주십시오. 예? 정령사님.”
정령술사란 이능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고 강력하다 알려진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한겨울에 풀이 자라게 하며 마른하늘에 비구름을 불러올 수 있는 힘이란 인간의 경외를 샀다.
그런 존재라면, 더구나 4속성을 전부 부릴 수 있는 술사라면 모든 불행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란 사실을 윌리엄은 알았다.
“내, 내 가족들을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한 번 살리신 목숨, 염치 불구하고 한 번만 더…. 예? 크흑.”
윌리엄은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이에 당황한 이그레트는 유니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유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들은 이미.”
“뭐…? 이미라뇨, 이미 어떠하다는…….”
뒤늦게 시간에 생각이 미친 윌리엄은 동이 터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새벽하늘위로 피고름 같은 햇살이 번지고 있었다.
그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윌리엄은 그대로 비명처럼 오열했다.
삶속에 있던 모든 걸 잃은 남자는 한참을 울었다.
기껏 목숨을 살려준 이그레트의 노력도 부질없이 그는 반나절 사이 미라처럼 수척해졌다. 금방이라도 숨을 놓을 듯이 생기가 꺼진 눈으로 윌리엄은 햇빛에 녹는 고드름처럼 눈물만 흘려댔다.
그가 우는 내내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섣불리 위로하지도 못한 이그레트는 쭈그리고 앉아 지켜보기만 하다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전 이만 다시 길을 떠나보겠습니다.”
“…….”
“여기 상처를 치료할 약초와 며칠 간 먹을 수 있는 얼린 과일입니다.”
“…….”
윌리엄은 넋이 완전히 나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남자를 돌봐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의 인생은 그의 것이므로, 이그레트가 대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리 여긴 그가 작게 한숨을 쉬고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십시오.”
“?”
“도와주십시오. 정령술사님.”
윌리엄이 시체 같던 팔을 들어 옷깃을 붙들고 있었다.
“내 가족을 해친 그 악독한 자에게 천벌을. 복수를 할 기회를 주십시오.”
“아니, 저는.”
“그자는 악마입니다. 아무 죄 없는 내 누이를 겁간하고…누명을 씌워 모두를 죽인. 사람의 탈을 쓴 악마란 말입니다!”
윌리엄은 악에 받친 얼굴로 정령들을 가리켜보였다.
“당신이 거느린 저 힘이라면 가능하잖습니까? 예?”
“…저들은 나의 친구입니다.”
“정령술사는 바라기만 하면 정령들이 수족처럼 움직인다 들었습니다. 제발 한 번만 그 힘을 제게. 적어도 편히 눈감을 수 있도록. 더러운 오명이라도 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후두둑 다시 쏟아졌다.
설마 복수를 해달란 부탁을 해올 줄은 몰랐던 이그레트가 아연하게 바라보자 윌리엄은 털썩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 이러지 마십시오.”
“이렇게 빕니다. 평생 종으로 정령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아니, 죽어서도 그 은혜 잊지 않고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그레트는 자신의 발치에 엎드린 윌리엄을 향해 천천히 마주 무릎 꿇었다.
“복수를 한들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윌리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은 또 다른 악마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악마가 되어서라도 그자의 심장을 뽑아낼 수 있다면야…!”
윌리엄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 질렀다.
“무언들 못 되겠어.”
“…….”
절망이 낳은 지독한 원한을 마주본 이그레트는 한동안 침묵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합니다.”
윌리엄이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엎드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왜, 왜…….”
“당신의 사정은 알겠지만, 내겐 누군가를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럴 힘이 있잖습니까!”
“또한 내 친구들마저 악마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곁에서 멀거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네 정령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그레트에게 있어 정령들은 가족이자 친구였다. 그런 소중한 존재에게 차마 그런 부탁을 할 수 없었다.
뜻을 분명히 밝혔는데도 윌리엄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엎드려 빌었다.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예? 정령사님이 내 생명을 살리지 않았습니까!”
이그레트는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거부에 윌리엄은 이를 악물고 벨트에 차고 나온 단검을 빼들었다.
“그냥 가시겠다면 차라리 주, 죽을 겁니다. 복수하지도 못할 거 차라리 이대로 죽는 편이 낫다고.”
그 말에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협박에 넘어갈 이그레트가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뒤돌아 걸음을 떼었다.
“……이럴 거면 살리지나 말던가!”
우뚝
원망과 분노가 뒤섞여 말이 아니라 뾰족한 가시가 날아와 박히는 듯 했다. 이그레트는 걸음을 멈춘 채 가만 그의 소리를 들었다.
“그냥 죽게 놔뒀어야지. 이 고통 속에 나를 던져두고 모른 척 외면할 거면, 왜 내 가족과 함께 눈감지 못하도록! 나만 이 지옥에 살려둔 것이냐! 왜!? 왜―!!”
“…….”
“너야말로 악마다. 힘을 가지고도 기생하는 악을 못 본 채 등 돌리는, 너 같은 위선자야말로 악마란 말이다!”
이그레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선의로 목숨을 구했던 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반드시 나와 같은 고통을 겪길 바란다. 내 널 저주하리라. 네놈도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고! 언젠가 나처럼 피눈물을 흘리며 무력하게 죽어가란 말이다!!”
푹
얼어붙은 하늘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저주를 남긴 윌리엄은 스스로 제 목을 찔러 자결했다.
하얀 눈밭에 쓰러지는 시체와 붉은 핏물이 스멀스멀 시야를 장식했다.
그와 동시에 이그레트는 꿈에서 번쩍 깨어났다.
「이그레트?」
손가락만한 녹색 바람의 정령이 눈앞에서 그를 불렀다. 땀에 눌어붙은 은빛 머리카락이 스르륵 미끄러져 푹신한 베개 위로 흩어졌다.
황궁의 화려한 천장이 보였고 꿈에서보다 작아진 손발이 느껴졌다.
「왜 그래? 자면서 계속 식은땀을 흘리고. 뭔가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유니.”
「으응?」
걱정스런 눈으로 손바닥에 내려앉는 유니를 보고 나니 비로소 이것이 현실이란 자각이 들었다.
이그레트, 현생의 ‘쥬다스’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 * *
황태자 즉위식까지 남은 기간은 5일.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발길이 늘었다. 즉위식 당일은 황족의 피를 이은자와 황제가 직접 허가를 내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황궁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니 식이 시작되기 전 미리 들러 눈도장을 찍고자 하는 이들이 황궁을 찾아와 1황자를 만나고 가곤 했다.
상황이 이러하여 부쩍 손님이 늘은 황궁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꽤 들떠있었다. 모두가 들뜬 분위기 속에서 세이지는 방안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고뇌에 빠져있었다.
‘형님이 말씀하셨던 선택이란 게……바로 이거였구나.’
구석에 웅크린 세이지는 멍하니 쥬다스가 교황청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뱉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두려움과 배신감에 떨기도 했다. 그 떨림은 시간이 지나니 가라앉았다. 하지만 정작 머릿속은 터질 것처럼 복잡해졌다.
‘나는…도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어머니의 잔인한 측면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미워하게 되거나 싫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세이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어머니인 황후였다.
그 아무리 더러운 짓을 했더라도, 그 실체가 사령과 계약하여 남을 해치고 1황자를 죽이기 위해 영혼까지 내걸며 저주를 행하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세이지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 뿐인 ‘엄마’였다.
충격적이긴 했어도 아주 받아들이지 못할 현실은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형님을 죽이지 못하면 어머니가 죽는다…….’
다른 걸 떠나 그 사실이 세이지를 제일 괴롭게 했다. 세이지가 보기에 쥬다스는 오롯이 살아있는 사람이었고 군주의 자리에 어울리는 강한 형이었다.
오히려 피해자라면 피해자였지 그가 죽어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유 불문하고 쥬다스와 황후,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이 시작되어버린 이상 세이지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건 잘못된 일이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형님을 죽인 살인자가 되는 거야.’
세이지는 바르게 자란 아이였다. 황후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었을 뿐, 아이 자체는 부정과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영특하기까지 했으니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형님에게 알려 목숨을 구한다면…….’
죽는 것은 어머니인 사야황후가 되리라.
어느 쪽이든 세이지는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세이지는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구석에 틀어박혔다.
뽀송뽀송하던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가는 모습에 아랫사람들은 심히 걱정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올려도 먹질 않고 시동을 놀이상대로 들여보내도 곧장 물려버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주변에선 사소한 것이라도 3황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 생기면 이것저것 권해왔다.
“전하, 오늘 1황자궁에서 야외정찬이 있다고 하옵니다.”
“…형님이 야외정찬을?”
그리고 세이지가 반응한 것은 1황자 쥬다스가 찾아온 귀족들을 위해 한꺼번에 대면할 수 있도록 마련한 점심식사자리였다.
야외정찬이란 실내에서의 식사와는 다르게 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여기엔 초대받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편안히 찾아와 식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나, 거기 참석해야겠어.”
세이지는 일단 형의 얼굴을 보고자 했다.
당장 선택을 할 수 없다면 다시 만나 얼굴을 보는 것이 결심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서였다.
쥬다스는 현명한 형이었으니 이 막막한 상황에서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조언을 해줄 지도 몰랐다.
‘아니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냥. 편하게 한 번만 더 얘기해보고 싶어.’
어쩌면 형과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식사자리였다.
세이지는 제 나이에 맞지 않는 눈으로 쓰게 웃은 뒤, 곧장 방을 나섰다.
1황자궁으로 향하면서 세이지는 익숙한 얼굴을 몇 번이고 마주쳤다.
쥬다스가 황제로부터 황태자로 지목되기 이전, 전부 세이지를 향해 찾아와 친절을 베풀며 간이라도 빼줄 듯한 태도를 보였던 귀족들이었다.
그들을 발견한 세이지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였다.
꾸벅
“……어?”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귀족들이 그대로 방향을 돌려 가버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제 정말 1부완결이 다가오는군요. 뭔가 두근두근합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