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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Chicken Game : Ending
예전 같았으면 그가 아는 척 하기도 전에 먼저 득달같이 곁에 달라붙어 그에 대해 이런저런 칭송과 함께 농을 건네며 함께 길을 걸었을 자들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수척해진 세이지의 모습을 본다면 호들갑을 떨며 안부를 물었어야 했다.
처음엔 급한 일이 있는 건가 싶어 넘어갔던 상황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세이지는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묘한 고립감을 느끼며 1황자궁 정원으로 들어섰다.
하하하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넓은 잔디 위로 하얀 식탁보가 길게 펼쳐져있었다. 파라솔로 만든 그늘 아래에서 정찬이 벌어졌다. 식사하는 테이블 앞에서는 요리사들이 즉석에서 음식을 만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쪽으로 쭈뼛거리며 다가가던 세이지는 문득 낯이 익은 귀족들을 다시금 발견하고 멈칫했다.
“역시 1황자전하십니다. 총명하시기로 이미 루바흐 안에 그 위명이 자자하시다지요!”
“암요, 그뿐입니까? 우리 전하께오서는 사람 뿐 아니라 정령도 부리시지 않겠습니까?”
“소신 감복할 따름이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곁에서 저리 떠들던 이들이었다. 세이지는 자리에 돌처럼 굳어져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 서있는 쥬다스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고 그저 부드럽게 모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인자한 군주를 보는 듯 잘 어울렸다.
자신보다 더욱 자리에 걸맞아 보이는 형에게서 세이지는 더더욱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늘 황제가 되는 건 나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연히 제 것인 줄 알았던 자리였다.
저기서 쥬다스가 듣고 있는 건 본래 자신을 위한 칭송과 떠받듦이었다.
‘분명 내가, 이 루바르잔의 위대한 군주가 될 거라고…….’
사흘 째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목구멍에서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순식간에 차오른 생소한 감정들로 인해 가뜩이나 어지럽던 머리가 더더욱 미칠 것처럼 변해버렸다.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태엽을 잔뜩 감아둔 오르골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예서 홀로 뭐하십니까?”
“……너, 자네는…….”
“코르토반 옌입니다. 3황자전하.”
쥬다스의 호위로 따라왔다던 최상급 정령술사였다. 교황청에서의 만남을 기억해낸 세이지가 울렁이는 목을 쓸어내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속이 안 좋아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그러십니까. 확실히 낯빛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흠, 진찰은 받아 보셨습니까?”
살갑진 않은데 달라진 것도 없었다. 콜을 보고 있자면 그저 충실히 주인 곁을 지키고 서 있다가 세이지를 보곤 ‘아, 너 또 왔냐?’라며 꼬리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개가 절로 연상되었다.
그 별 것 아닌 담담한 아는 척에 우습게도 세이지는 위안을 받아버렸다.
“코르토반,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형님을 지킬 테지.”
“…….”
마른 웃음과 함께 건넨 한 마디에 콜은 침묵으로 답했다.
굳이 말로 표현해봐야 무엇하겠냐는 당연한 긍정이었다.
“그 신의, 꼭 지켜. 그리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이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쥬다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든 콜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날 용서하지 마세요, 형님.’
혀에서만 맴돌다 끝내 밖으로 내뱉지 못한 당부가 컴컴한 목구멍 아래로 추락했다.
세이지는 그대로 다시 등을 돌려 1황자궁을 떠났다.
* * *
쥬다스는 최근 부쩍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틀 전을 기점으로 악몽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찾아와 괴롭혔다. 악몽 탓인지 그는 곧잘 피로를 느꼈다. 깨어있어야 할 상황에는 잘 버티고는 있었지만 그러다 긴장의 끈을 놓쳐 졸음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어김없이 악몽으로 이어졌다.
악몽은 주로 과거 그를 욕하고 저주했던 사람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좀 괜찮다싶다가도 그 끝은 언제나 절망스러웠다.
꿈속에서 그는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며 과거 했던 행동을 그대로 재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전생의 그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던 현실 앞에 다시금 맞닥뜨리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걸 포기하고 세상을 등져 은거하는 삶을 택했던 ‘이그레트’였다. 지금은 용기를 내어 다시 도전해본 참이지만 여전히 그에게 있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란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극복하지 못한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그런데 한번 겪었던 과거를 다시 돌이켜 겪다보니 조금 다르게 느껴진 부분도 있었다.
‘내가 선의로 행했던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악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는 늘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기준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선의란 어디까지나 모두에게 공평한 기준에서 적용되었으므로.
과거에 묻어두었던 상처를 들추면서 이그레트는 조금씩 그때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함께 깨달아갔다.
악몽을 꾸기 시작한지 삼일 째 되는 날, 그는 또 다시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젠 성인이 된 그가 어느 폐허가 된 마을 입구에 서있었다.
타닥 딱
집이 있었던 자리는 온통 시커멓게 타들어가 밑동만 남아 연기를 뿜고 있었다. 일반적인 무구가 아닌 기습에 주로 쓰이는 석궁 촉과 투척용 창, 그리고 오로지 빠른 살상만을 목표로 개조된 짧고 날카로운 글라디우스가 여기저기 꽂혀있었다.
그 장면만 봐도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 유추가 가능했다.
‘게릴라의 습격.’
그곳은 제국 국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루바르잔 제국은 먼 선조 때부터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으로 영토를 넓혀왔다. 지배한 영역은 늘어나고 권력 또한 팽창했지만 제국이 거느린 넓은 영토란 결국 남의 땅을 짓밟고 빼앗은 결과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몇몇 국경지역은 이에 반발하여 테러를 하거나 분쟁을 일으키는 게릴라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침략과 전쟁을 명한 것은 상부였지만 게릴라로부터 피해를 입고 신음하는 건 국경에 위치한 영토에서 살아가는 무고한 주민들이었다.
지금 이그레트가 서있는 이 마을도 마찬가지로 영토전쟁의 희생양이 된 곳이었다.
이번엔 그동안 보였던 자잘한 테러나 치고 빠지는 수준의 습격이 아니었다. 게릴라 집단은 이 영역을 아예 작정하고 쓸어버렸다. 불타고 무너져 내린 건물 사이에서 기괴하게 꺾인 팔다리나 가슴에 석궁볼트가 박혀 숨을 거둔 시신 등이 보였다.
이그레트는 그 참혹한 폐허를 빠짐없이 눈에 담고는 그 속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툭, 투둑
쏴아아
예고에 없던 빗줄기가 급작스럽게 쏟아졌다. 그의 염원에 따라 정령의 힘이 기후에 작용한 탓이다.
루니가 불러온 비구름이 끊임없이 폭우를 내리부었다. 폐허를 태우던 불길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시체로부터 피와 눈물을 씻어 내린 빗방울이 웅덩이를 이루었다.
후웅
녹색 바람이 무너진 판자 사이를 반짝이며 지나갔다. 이그레트는 벽돌과 뒤섞여 쌓여있던 부러진 나무판자를 들어 옆으로 치웠다.
“…….”
이제 겨우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가 그 안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누군가의 핏물에 절어 얽힌 채였다. 얼굴에도 피가 잔뜩 튀어있었지만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정작 상처 하나 없이 기적처럼 살아남은 아이는 무릎을 끌어안고 떨다가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고 움찔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
“혼자서 많이 무서웠겠구나.”
“…우…윽….”
다정한 빛을 담은 보라색 눈동자가 마치 폭우를 내리는 하늘같았다. 빗물이 샛노란 금발을 타고 흘러 아이의 얼굴로 떨어졌다.
그제야 막혔던 울음을 터뜨리는 걸 허락받은 듯이 아이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그레트는 자신이 내민 손을 자그마한 양손으로 꽉 붙들고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안아 올렸다.
검푸른 머리카락과 얼굴은 빗물에 씻겨 제 색깔을 드러냈지만 눈동자만큼은 피처럼 짙은 적안이었다.
“으아아앙!”
잔혹한 테러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는 이제 겨우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유일했다. 비록 국경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아이는 제법 귀한 혈통을 타고난 귀족가 도련님이었다. 그는 그를 지키고자 희생한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살아남았다.
본래 이번 습격은 아주 예측되지 못한 바가 아니었다. 빈번히 침략해오는 게릴라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사람들은 곧 그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일 습격이 이어질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대규모 침략이 일어나기 전에 적군을 저지해야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병력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수도에 지원을 요청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황제폐하의 탄신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기간이다. 앞으로 7일간은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되며 또한 수도를 방비할 인력을 변방에 낭비할 수 없다. 적의 도발에 대응하지 말고 축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
고작 축제 따위를 이유로 지원을 거절당한 국경지역의 지도자는 크게 상심하고 분노하였지만 영토를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국과 주민을 위해 항쟁했고, 결국 그 땅에 싸늘한 주검으로 쓰러졌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지도자의 아들이었던 아이는 이 사실을 전부 지켜보았다.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 똑똑히 기억했다.
“나는 이그레트라 한단다. 네 이름은?”
“…‘프리드 길리아노’….”
그날, 아이였던 프리드에게 이그레트는 하늘이 되었다.
새로운 어버이이자 친우가 되었고, 구원이었으며, 아이가 믿고 따르는 유일한 ‘선’이자 ‘질서’가 되었다.
그 모든 게 일그러지기 시작한 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어린 시절 프리드는 그야말로 순수하게 이그레트를 따랐다. 그동안 이그레트가 만난 사람들은 그의 힘을 보고 엎드려 빌거나 이용하려들 뿐 누구도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필요로 한 건 강대한 힘뿐이었다.
그러한 굴레 속에서 상처받고 있던 이그레트에겐 맑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에게 생소함과 감동을 함께 느꼈다. 아이의 붉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은 인간 이상의 큰 힘을 가진 도구나 괴물 따위가 아니었다.
어린 프리드는 그를 부모형제처럼 따랐다. 처음으로 정령들 이외의 존재를 곁에 둘 수 있게 된 이그레트는 매우 기뻐했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5년을 함께 지내면서,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 이상으로 서로를 신뢰했다.
오년이나 함께 지내면서 정령들의 심기를 대충 분간할 수 있게 된 10살의 프리드는 그들의 감정에 동의를 표했다.
‘이그레트님이 바라기만 하신다면 당장에 끝장날 녀석들이.’
이그레트와 함께 떠돌아다니면서 프리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상처받은 이그레트 본인만큼이나 함께 상처를 입었다.
그는 특히 지배계층의 실체를 알아가면서 부패한 귀족에 대해 염증을 느꼈다.
‘지배하는 자는 저런 게 아니야.’
이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로부터, 프리드는 귀족이 품어야할 의무와 권리에 대해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책임지는 영지 주민들과 조국의 안녕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
그를 보며 프리드는 대의를 위해 버려야하는 게 있음을 알았다.
또한 세상에는 분명한 ‘악’이 존재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이는 차츰 세상의 단면을 알아가며 자라고 있었다.
똑 똑
점잖은 노크소리가 있고나서 그들이 대기하고 있던 응접실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한 명은 그들을 저택까지 데리고 온 기사였고, 다른 한명은 그가 모시는 ‘주인’이었다.
이그레트를 저택에 데려오도록 한 귀족은 중년의 남성이었지만 키는 보통 여성들보다 작았다. 음식을 먹는 족족 크라는 키는 크지 않고 뱃살만 접히게 된 사내는 마법효과가 부여된 얇은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는 푸근하게 웃으며 이그레트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하하. 반갑네. 자네가 그 유명한 쿼드-서머너(Quard-Summoner)란 말인가?”
역시 그의 힘이 목적인 부류였다.
이능이 주목받는 시대인 만큼 특출나게 강한 힘을 가진 평민은 귀족이라 해도 그만한 대우를 하게끔 만들었다. 어차피 이 정도 힘과 명성이라면 곧 황제의 눈에 들어 작위를 하사받을 가능성이 컸다.
이그레트는 담담히 고개를 숙여 답을 대신했다.
“보자, 그렇다면 자네 곁에 있는 그들이 바로?”
“저와 계약한 정령들입니다.”
“오오!”
「으, 저 인간 진짜 거슬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정령들은 그 안에 담긴 탐욕을 예민하게 감지해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음, 저는 이미 틀렸으니 독자여러분 모두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ㅠㅠ 쿨럭..(깨꼬닥)
참, 피어나래 님께서 쥬다스와 프리드를 각각 멋지게 그려주셨습니다.ㅠㅠ! 차마 악역을 표지로 걸 수는 없었기에 표지에는 쥬다스가..(?)
작품공지에 프리드도 따로 올려두었으니 현재 표지와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ㅎㅎ 귀한 선물 보내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애정과 응원메세지 모두 늘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