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85화 (8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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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Chicken Game : Ending

정령이 하는 말을 듣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표정에 담긴 부정적인 감정은 충분히 알아보았으면서도 귀족은 그저 껄껄 웃었다.

그리곤 자리에 앉으며 만족스레 자신을 소개했다.

“렌디미르 백작일세. 나는 연구물 개발과 인재발굴에 관심이 참 많아. 지금 쓰고 있는 이 안경도 이번에 개발한 신품이라네. 시력을 상승시켜주며 동시에 보호효과가 있는 아주 기특한 녀석이지.”

“그렇군요.”

기껏 자랑을 풀어놓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영 미적지근했다. 여기서 백작은 이그레트의 욕심 없고 순한 성품을 간파해냈다.

그러자 그는 단숨에 서론을 싹둑 잘라내고 물었다.

“내가 자네를 왜 불렀는지 짐작하겠나?”

“…말씀하십시오. 듣겠습니다.”

“하핫, 이거 재능 뿐 아니라 머리도 되는 친구로군. 그래서인가… 건방지기도 하고 말이야.”

아무리 뛰어난 이능력자라고 해도 대귀족 앞에 선 평민이 이렇게 태연할 수는 없었다.

웃으면서 그 점을 꼬집는 백작에게 딴죽을 거는 대신 이그레트는 그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귀족이 원하는 바는 단순했다.

그의 평민다운 태도를 본 백작은 다시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다네.”

“저는…….”

“큰일을 하라는 게 아닐세. 조금 전 말했질 않나, 난 인재발굴에 관심이 아주 많다고. 자질은 있으나 가난하여 기회를 얻지 못하는 불쌍한 평민들에게 특별히 기회를 줄까 해서 말이야. 흥미가 생겨 데려다놓긴 했는데 그것들이 자질만 있지 제대로 능력을 사용할 줄 모르다보니 생각보다 영 쓸모가 없더군.”

“…….”

이그레트는 순간 멈칫했다.

“전부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오갈 곳 없는 불쌍한 녀석들이지. 이번에 다시 내쳐지면 어찌될지 예상이 가는가?”

그 자신부터가 같은 처지였기에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대답하진 않았으나 그가 흔들리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는 백작은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점도 생각해보시게. 내가 하는 일은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들이네.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이 안경처럼 말일세. 거기에 자네의 재능을 빌리겠단 소리야. 물론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

“곁에 그 아인 동생인가?”

백작의 시선이 프리드에게로 머물렀다. 아이는 주눅 들기는커녕 오히려 기세 좋게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거리를 떠도는 것보다야, 그 아이에게도 좋은 환경이 될 걸세. 책도 볼 수 있고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수도 있지. 전부 내가 후원하는 녀석들이야. 이곳에선 뛰어난 재능의 아이들이 양질의 교육을 기다리고 있다.”

렌디미르 백작이 손깍지를 껴 무릎에 얹었다.

“바로 자네 같은 선생을 말이야.”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

드디어 바라던 대답이 돌아왔다.

백작은 만족스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령술에 자질이 있는 아이들을 보낼 테니 가르쳐보게. 숙식과 급여를 제공하고, 금지구역을 제외한 저택 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쓸모 있는 말을 손에 쥐는 것에 성공했다. 저 말이 가진 가치가 얼마나 될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그리 여긴 백작은 몇 걸음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참, 이름이 어떻게 되나?”

“……이그레트입니다.”

“이그레트? 이그레트라. 좋은 어감이군.”

렌디미르 백작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잘 부탁하네. 선생.”

그날 이후 이그레트는 떠도는 생활을 그만두고 렌디미르 백작가에 머물렀다.

백작이 추려 보낸 자질이 있는 아이들의 속성과 그릇 등에 대해 하나하나 파악하고 그 싹을 틔우도록 돕는 일은 그에게 있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 어떤 정령술사도 이그레트처럼 순식간에 타인의 계약을 성공시키진 못했다. 정령과의 계약은 본래 술사와 정령 간의 1:1관계였다. 그러나 이그레트는 마치 그들 사이의 촉매제처럼 작용하여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로 인해 손쉽게 정령과 계약하고 이를 다룰 수 있도록 가르쳤다.

단기간에 성과를 본 렌디미르 백작은 크게 기뻐하며 포상을 내렸다.

여가시간엔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며 아직 어린 프리드가 제대로 관리 받고 자랄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주어졌다.

정착한지 2년 째 되던 해, 그가 백작가에 감추어진 판도라의 상자만 열지 않았어도 좀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평화였다.

이그레트가 계약한 바람의 정령왕 유니는 그가 바라기만 한다면 모든 정보를 알아올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정령이었다.

하지만 이는 바꾸어 말해, 계약자가 원한 적 없는 정보를 굳이 물어오지는 않는다는 뜻도 되었다.

정령의 힘은 그들을 다루는 계약자의 성질에 따라 천차만별로 차이가 났다. 같은 하급 정령을 다룬다 해도 이것이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며 평화로운 호신용이 될지, 아니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을 발휘할지는 술사마다 달라졌다.

그래서 유니는 모든 정보를 알 수 있지만 이그레트가 알려하지 않으니 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그가 소망했다.

“유니, 저들을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알 수 있을까?”

「저 노예들? 으음.」

귀족이 노예를 사는 일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돈으로 사람 몸값을 계산하여 사고파는 행위는 신성이 국교인 루바르잔에서 금지되어있는 행위긴 하였으나 암적 루트로 공공연히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간 눈에 띄지 않도록 노예를 사들인 렌디미르 백작이었지만 그날따라 여러 가지 착오가 겹쳐 낮에 배달이 온 것이다.

이번에 산 노예는 총 3명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어린 소녀였다. 열 살이라곤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해 겉보기로는 또래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아예 눈에 안보였다면 모를까 노예를 끌고 가는 백작의 하수인들을 발견한 이그레트는 그에 의문을 가졌고 바람이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저택에 지상공간만큼이나 넓은 지하실이 있대. 거기서 무슨 실험을 한다나봐.」

“…실험이라니?”

「생체실험.」

끔찍한 진실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에 유니의 설명을 들을수록 이그레트의 표정이 차츰 굳어졌다.

「밀폐된 지하공간이라 바람이 알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어서 그게 정확히 뭔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그 말을 듣고 곧장 찾아간 지하실에서 이그레트는 참상을 보았다.

인체에 대한 무해함을 검증하기 위해 온갖 성분들이 사람에게 투여되고 있었다.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개발한다던 연구물들이 음지에선 인간을 고통에 물들고 죽어가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에선 살상능력에 대한 점검이 함께 이루어졌다.

마법이나 정령술 같은 이능을 가진 자들이 이 훈련이 참가되었다. 그들은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마법을 발사하고 정령의 힘을 사용해 숨을 끊어놓았다. 그곳에선 사람이 사람을 죽여 전투병기로서의 위력을 평가받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돼지고기에 등급을 매기듯 그런 식으로 가치를 매겨 전력에 배치했다.

꼬옥

오늘 막 팔려온 노예소녀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소녀는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도와주세요.’

“침입자다!”

“이곳이 외부에 유출되면 모두 끝이야. 죽여!”

우두커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를 발견한 관리자들이 망설임 없이 사살을 명령했다.

쿠웅

경비들이 그를 향해 활을 겨누는 순간 땅이 통째로 진동했다.

“…왜 이런 짓을….”

누리고 있던 평화와 평안 밑에 깔린 희생, 그보다 더 역겨운 것은.

자신이 직접 정령과 이어주고 다루는 방법을 가르친 아이들이 병기화되고 있다는 사실.

더불어 자신의 안일하고도 멍청한 판단으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죽어나가야 했다는 사실도.

「……! 이그레트, 안 돼!」

비명 같은 정령의 외침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모든 것이 고요로 물들었다. 폭발음도 비명소리도 없이, 그저 그가 한순간 염원했을 뿐이었다.

‘―전부 사라져버렸으면.’

그날, 렌디미르 백작가의 지하실은 그대로 세상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            *            *

백작가를 나온 이그레트는 다시 떠돌이생활로 돌아갔다.

조금 지친 눈을 하게 된 그는, 전에 비해 소극적으로 변한 태도로 세상을 대했다. 일단 무엇이든 함부로 개입하지 않으려했다. 자신이 무심코 한 일이 누군가의 불행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일차원적인 동정심이나 감성에 넘어가 행동하지 않고 차근차근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따르는 두 아이가 있었다.

하나는 이제 열다섯이 된 프리드였고, 다른 하나는 이그레트가 ‘레이야’라 이름 붙여준 열세 살 소녀였다. 소녀는 렌디미르 백작가에 실험용으로 팔려온 노예였다.

지하실이 사라질 때, 레이야도 그 안에 있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의 옷깃을 잡고 있었던 탓에 정령의 공격범위에서 살아남았다. 이그레트는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은 소녀를 데리고 프리드와 함께 그곳을 떠났었다.

그렇게 몇 년을 더 떠돌면서 이그레트는 수많은 사건사고를 겪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가 ‘4속성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어마어마한 사실이 알려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는 가히 하나의 신드롬을 형성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전설, 기적 따위의 수식어는 감히 그에게 가져다붙이기도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소식지와 책, 연극문화 등 모든 것이 정령술사 이그레트에 대한 것으로 도배되었다.

무려 루바르잔 제국의 황제가 그를 찾았고, 이어 작위를 내리고자 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가 지닌 힘은 자연 그 자체였으니 아무리 제국의 태양이라는 황제라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대신 황제는 이그레트라는 보석을 붙잡기 위해 현자의 칭호를 내렸다.

바람의 왕은 물론 자연계 4속성 정령왕들이 전부 그의 휘하에 있으니 이 세상에서 그가 알고자 하는 진실은 모두 꿰뚫는다. 또한 그 스스로도 총명하고 배움에 관심이 많아 세상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지식과 지혜를 깨쳤으니 그것만으로도 그를 넘을 자가 없었다.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남용하지 않고 남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어진 성품을 지녔으니 이는 성인(聖人)이라 보아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칭호와 함께 거처를 마련해준 황제의 호의에 이그레트는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에게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죄다 그를 찾아와 엎드려 빌었고, 눈물로 애원했다.

그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었다.

가뭄이나 천재지변을 해결해달라는 요청도 있었으며 사익이나 권력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그를 찾는 이도 많았다.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힘을 원하는 모든 자들이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사사롭게는 길찾기를 물으러 오는 자도 있었고 전쟁이 얽힌 대의를 논하러 오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절실함이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른 주관적인 것이었으므로 경중을 나누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그레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전부 공평하게 대했다.

우선 직접적으로 타인을 해치거나 벌하는 일에는 절대 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타인을 대신 벌하거나 심판할 권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건 신의 영역이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자신의 감정과 잣대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억울한 사연이나 피눈물 섞인 애원을 들어도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 그게 내가 생각한 선이었지.’

자신이 가진 힘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

엎드려 빌던 사람들은 끝까지 울면서 다른 이들에게 끌려 나가거나 도중에 돌변하여 그를 원망하며 떠났다. 어린 날 만났던 억울한 죄인 윌리엄처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감기에 걸리면 무엇보다 제일 괴로운 게 '잠'입니다.

약에 들어있는 수면성분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군요.ㅠㅠ;; 이거 약을 안먹을수도 없고... 저, 정신력!

지난화 코멘트에서도 감기로 고생하시는 독자님들이 종종 보이시던데 모두 빨리 나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요즘 날씨가 작년에 비해선 많이 따뜻한 편이라고 하더라고요.ㅎ (...왜 체감이 안 되지...)

선호작, 코멘트, 추천, 후원쿠폰, 정주행인증(?) 등 보내주시는 응원메세지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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