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86화 (8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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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Chicken Game : Ending

다시금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지켜보게 된 이그레트는 당시와는 다른 기분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허나 선이라 하기엔 차갑구나. 누굴 위한 선의란 말인가?’

문득 그런 의문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게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겐 희망을 짓밟고 등을 돌린 악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는 태도였다.

만일 저들의 이야기에 조금만 더 귀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판단하기 시작한 그는 고뇌에 잠긴 채 과거의 흐름을 따라갔다.

“오늘도 좋은 아침이네요, 현자님.”

“…그리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현자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인정하셨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리 부르는데요, 무얼. 하지만 현자님이 싫으시다면 현자님이라고 부르지 않을게요.”

그러면서 생긋 웃는 금발의 여인은 당시 자주 자리를 비우고 돌아다니는 이그레트를 위해 집 청소며 가사일을 돕는 메이드였다. 이그레트가 따로 고용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메이드를 자청하여 일을 도맡아했다.

언젠가 한 번 산사태에 깔려 생매장당할 뻔한 마을을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목숨을 건진 여인이 은혜를 갚겠다며 따라와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다시 은인님이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주인님?”

“…그냥 이그레트로 충분합니다.”

“네에~, 이그레트님.”

이렇듯 붙임성이 좋고 사글사글한 성격의 메이드다보니 아이들도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의 이름은 미카라고 했다.

미카는 활달하고 뭐든 열심히 해내려고 노력하는 여성이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무엇보다 생명의 은인인 이그레트에게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가끔 자신이 그를 위해 한 일을 알아준다거나 감사인사를 건네올 때면 눈물을 글썽이며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행복해했다. 작은 것에 기뻐할 줄 알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충직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작은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그레트님!”

할 일을 마치고 이틀 만에 돌아온 그에게 프리드가 창백한 얼굴로 뛰어왔다. 이제 많이 자라 더 이상 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듬직한 체구였지만 여전히 그 앞에서는 어린아이였다.

프리드의 옆에 붙어 훌쩍이던 레이야가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미카…미카가…….”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프리드가 입을 열었다.

“죽었어요.”

“…….”

달리던 말에 치여 죽었다는 비보였다.

“귀족이 타고 있던 말이었대요.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길임에도 그자가 전혀 주의하지 않았답니다. 목격자 말로는 속도도 너무 빨랐고 꼭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을 몰았다고…….”

즉사였다. 어찌 손 써볼 틈도 없이 미카는 세상을 떠났다.

사고원인은 그 귀족의 음주였다. 만취한 상태로 말을 빠르게 몬 탓에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근데 단순사고로 이 사건을 덮었나봐.」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만취상태를 증명해줄 자료를 따로 수집해두지 않아 처벌받을 이유조차 사라졌다. 사망자가 불시에 달리는 말 앞에 뛰어들어 일어난 단순사고로 처리되고 귀족가에선 위로금으로 후하게 금액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녹색 바람이 전해준 정보에도 이그레트는 반응하지 않았다. 어찌해야 좋을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 자식들 나쁜 놈들이에요. 자기들 명예가 떨어지는 게 싫으니까 사고경위를 조작한 거라고요. …사람이 죽었는데…그깟 명예가 뭐라고, 펜 한 자루로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었어요.”

프리드는 귀족이 저지른 범법행위를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벌 받아야 돼요, 그 새끼들.”

“프리드.”

“험한 말 써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요, 이렇게라도 해야.”

프리드는 참았던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겨우 한 방울이었을 뿐인데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가 추락했다.

“나쁜 놈들이잖아요. 근데 저한텐 그 자식들 어떻게 할 힘이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건 죽은 미카를 대신해서 욕해주는 거 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흐, 씨.”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아이는 레이야처럼 소리 내어 울진 못하고 그저 욕설을 집어삼켰다.

이그레트는 천천히 숙여 아이들을 양팔에 감싸 안았다. 따뜻한 품안에서 두 아이는 둥지 안의 아기새들 마냥 소리 내어 울었다.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아이들을 다독여준 그는 그들의 울음이 멎어갈 때쯤 입을 열었다.

“미카는 어디에 잠들었니.”

“…훌쩍, 소원나무 밑에요.”

소원나무란 그들이 이 집에 살게 되면서 뒷산에 함께 심어둔 묘목이었다.

아직 사람 키만 하여 여린 잎을 틔운 그 작은 나무에게는 다른 종자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를 소원나무라 불렀다.

나무를 심으면서 앞으로 소원이 생기면 떼쓰지 말고 작은 방울에 적어다 가지에 걸어놓기로 하고 붙여준 그 나무만의 이름이었다. 소원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해두면 나무 누군가 속마음을 들어주고 방울소리로 위로해주는 셈이니 좋지 않겠느냐는 미카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였다.

소원나무 밑에 묻힌 미카에게 찾아간 이그레트는 그 앞에 무릎 꿇었다.

길게 내려앉은 옷이 흙바닥에 쓸려 더러워졌다.

“미안합니다.”

「…이그레트.」

워낙 담담한 표정과 어투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의 심리상태를 알 수 없었지만 정령들만큼은 그의 감정을 공유하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당신이 그리 아프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모든 게 그랬다. 그가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망가지고, 깨지고, 뒤틀려버렸다.

젊은 날의 이그레트는,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어찌 사용해야 좋을지 몰랐다. 지키려고 마음먹는다면 지킬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모든 이들의 삶을 책임져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그가 한 번 도움을 주면 많은 사람들은 그 이상을 바라왔다.

숨 가쁘게 달리던 사람을 걷도록 해주니 그때부턴 멈추고 싶어 하고, 멈추게 해주니 또 앉고 싶어 하고, 앉게 해주면 누워있게 해주길 바라는 게 일반적인 심리였다.

그리고 누울 곳을 마련해주면, 푹신한 침대, 나아가 더 좋은 장소를 제공받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재앙이 아닌 이상 함부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 결단에는 이렇게 희생이 따랐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때 가장 후회한 것이 진작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더 이상 감사인사를 들어줄 메이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그는 울지 않았다. 함부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건 위험했다. 그래서 속으로 삼켰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여겼는데 이번만큼은 조금 힘들었다.

「네 탓이 아니야.」

후웅

유니가 그의 손을 감싸고 천천히 주먹을 펴냈다. 다른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탓하고 원망한 이그레트의 손에선 찢겨진 상처 위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손 위로 작게 입 맞춘 유니가 슬프게 중얼거렸다.

「있지, 이그레트.」

「…….」

어쩔 줄 모르고 허공에 동동 떠있던 토니도 그의 앞에 내려와 섰다. 오른편엔 푸른빛의 정령이 묵묵히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우리, 어떻게 해야 네가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너는 시간이 갈수록 슬픔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저 참는 법을 배우고, 표정을 지우는 법을 배워서.」

꼬옥

다홍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카니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따스함이 담긴 열기가 소녀의 품을 통해 전달되어왔다.

「이러다가 아픈 줄도 모르게 될까봐 두려워요.」

「스스로 모르면 우리도 알 수 없게 된다요.」

「원하는 걸 말해라. 너를 괴롭게 만드는 이들을 죽이길 바라나? 차라리 아무도 대들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설 수 있게끔 해주는 건 어떻지?」

“…….”

늘 과묵하던 루니마저도 다소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이 모든 게 계약자인 이그레트의 감정이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그레트는 그저 씁쓸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이그레트.」

유니가 그의 손을 기도하듯 양손으로 쥔 채 속삭였다.

「알려줘. 우린 너를 위해 무엇을 하면 돼?」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원나무에 걸린 방울이 바람에 흔들려 딸랑딸랑 울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까.’

누군가에게 따로 묻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그레트는 침묵을 택했다.

*            *            *

“네? 안…가신다고요?”

다음날, 당연히 미카의 죽음에 대한 죗값을 물으러 갈 거라 생각했던 프리드는 멍하니 되물었다. 이그레트는 평소처럼 레이야의 코코아색 단발을 곱게 빗어 묶어주며 답했다.

“그래.”

“이그레트님…?”

프리드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으로 서있자 이그레트는 짧게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내가 그들의 행동을 문제 삼는다는 건 선전포고나 다름없단다.”

“그게 무슨.”

“문제를 삼는다면 곧 책임을 지란 뜻이 된다. 허나 그리 명예를 중요시여긴 귀족이라면 쉽게 이를 수긍하려 들지 않을 터.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들에게 사죄를 얻어내기 위해선.”

“…….”

“대화가 아닌 힘으로 겁박하는 수밖에 없어. 그리되면 싸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죗값을 묻기 위해서라지만 죄 없는 누군가가, 혹은 수많은 목숨이 한꺼번에 희생될 수도 있어. 그리해서라도 진상을 밝히고 죗값을 물으려한다면 가능이야 할 테지. 하지만 프리드,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정령들에게 그런 짓을 부탁하고 싶지 않구나.”

전부 옳은 말이었다. 자연계 정령왕을 넷이나 부리는 위대한 존재였으나, 제국 안에서 그의 위치는 그저 평민이었다. 만일 귀족이었다 한들 함부로 다른 가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행위는 상당히 무례한 일이며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문제였다.

하물며 사건의 피해자가 평민 여성인 상황에서 귀족에게 진상규명을 요구할 길은 없다.

애초에 목숨의 무게가 달랐다. 평민의 죽음을 이유로 귀족이 사과를 해야 할 의무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신분을 뛰어넘는 무력으로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 큰 피해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귀족가문에 대한 시비는 한 두 사람 간의 분쟁과는 다르게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컸다.

그들은 그냥 이름만 ‘귀족’인 게 아니다. 제국을 대표하는 자들이자 각자 소유한 영토에 따라 지배권을 쥐고 있는 계층에 속해있는 것이다.

물론 프리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게…….”

하지만 소년의 붉은 눈은 혼란과 슬픔을 담고 일그러졌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수많은 목숨이 희생될 수도 있다고요?”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에 레이야가 불안한 눈으로 그들을 번갈아보았다.

“이그레트님…에게는 전부, 똑같아 보이는 겁니까? 그 개자식들의 목숨 값과 미카가. 어쩌면 저나 레이야도. 얼굴도 모르는 그 귀족집안의 경비병과 같은 수준의…….”

“프리드.”

“…네.”

프리드는 이를 콱 다물었다. 뾰족하고 쓰라린 통증이 머리를 압박해왔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통증의 또 다른 이름은 ‘배신감’이었다.

“같아서가 아니다.”

“…….”

“값어치를 따지려는 게 아니야. 내게 너희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들이란다.”

“그런데 왜…….”

왜 화를 내지 않으세요?

프리드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상실에 대한 분노를 묻기엔 그가 마주한 보라색 눈동자는 너무나도 잔잔했다.

그날, 소년의 하늘에 실금 같은 균열이 생겼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주가 크리스마스라는 소릴 듣고 놀랐습니다. ㄷㄷ

으아닛, 시간의 상태가...?!;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매번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조아라 서버가 폭주해서 터졌다고 글이 안올라가네요 ㅠㅠ 좀만 더 시도해보고 안올라가지면 내일 아침에....;;)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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