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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출사표
마침내 즉위식 당일 아침이 밝았다.
일주일째 악몽에 시달린 쥬다스는 그전과 비교하여 매우 쇠약해져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나빠지는 그를 보며 아랫사람들은 필수적인 준비 과정만 준비하고 나머지는 전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보좌했다.
그러나 저주로 인해 눈만 감았다 하면 끔찍한 악몽과 조우하게 되는 바람에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건강상에 별다른 이유도 없는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수시로 넋을 놓았다.
급기야 전날부터는 눈을 뜬 채로 자신을 저주하는 환청을 듣기까지 했다.
진단을 위해 찾아온 치료사들은 그 원인을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있을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했다.
그 외엔 별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말에 콜을 비롯하여 1황자를 모시는 시종, 시녀들은 근심에 잠겼다.
곧 즉위식이 시작되면 황제로부터 그의 후계임을 증명해 주는 인장을 수여받게 될 터였다.
그러기 위해선 3개의 단을 쌓아 층층이 이어놓은 높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하지만 지금 쥬다스의 상태로는 3단 층계는 고사하고 평지에서 걷는 것조차 언제 쓰러질지 몰라 조마조마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쥬다스는 즉위식에 나가기 위한 준비를 힘겹게나마 마쳤다.
일반 황족의 복장과 다르게 제국의 차기 군주인 고귀한 황태자를 상징하는 예복 정장의 색상은 차콜 그레이였다.
어깨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금색 견장을 달았고 단추와 브로치도 마찬가지로 전부 고결한 금장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천연 스타루비가 별 모양의 광채를 흩뿌리며 또렷이 빛났다.
마지막으로 적색 바탕에 금실로 황가의 문양을 수놓은 얇은 케이프가 그의 어깨를 다시 한 번 감싸 덮었다.
“전하.”
오랫동안 충심을 다해 주인을 모셔온 시종 로한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평소 같았다면 총명함으로 빛나는 자애로운 금안이 곧장 시종을 돌아보았을 테지만, 지금의 1황자에겐 무리였다.
예복을 차려입은 채로 어지러운 속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양손으로 탁자를 짚고 서 있던 쥬다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잠깐 사이 턱 선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툭 하고 떨어져 탁자에 얼룩졌다.
로한이 조심스레 재촉했다.
“전하, 시간이 되었사옵니다.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황태자 즉위식은 제왕의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태양이 가장 높은 위치에 떠오르는 정오에 진행된다.
황족 혹은 황제의 허가를 받은 자들만 참관이 가능할 정도로 엄중한 예식인 만큼 시간에 늦는 불상사는 없어야만 했다.
“전하…….”
“괜찮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로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심신의 쇠약, 그리고 급기야 환청에까지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쥬다스의 눈은 본래의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속에 깃든 굳건한 의지를 알아본 로한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곤 그를 밖으로 안내했다.
「아, 정말 답답해 죽겠어!」
계약자의 상태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정령들도 몹시 예민해져 있었다.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왈칵 분을 터뜨린 유니가 그의 머리카락을 꾹꾹 잡아당기며 외쳤다.
「이그레트, 이건 분명히 사령의 짓이라구!」
“으음,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모르겠는 게 아니라 틀림없다니까? 아, 진짜! 뻔히! 아는데!」
「훌쩍. 찾을 수가 없다요오.」
울먹거리는 토니의 말마따나 네 정령들은 원흉을 짐작했지만 정작 사령이 침투한 루트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쥬다스가 힘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느 것 하나 도울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깊이 관여할 수 있는 물의 왕 루니마저도 문제를 찾지 못해 손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쥬다스가 고통을 느끼는 부분은 새롭게 상처가 생긴 게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흉터에 의한 것이다.
차라리 공격을 받고 있다거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그의 정신을 갉아먹기라도 한다면 곧장 처치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따로 공격을 받는 것도 아니고 달라붙은 사령도 없으니 그를 철통같이 가호하고 있던 정령들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하다 못해 답답함으로 인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 놓아둔 덫일지도 모르지.”
「넌 진짜 너무 자학하는 버릇이 있어, 끄응. 생각해 봐,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던 게 왜 이제 와서 힘들게 느껴지겠어?」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마련이니까, 유니.”
쥬다스는 어쩔 수 없다는 의미를 담아 웃었다.
「정말, 그런 게 아니라니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어딘가에서 사령의 기운이 느껴지긴 해.」
「그 망할 사령 놈이 어디 붙어 있는지 찾질 못해서 그렇죠.」
다소곳한 자세로 있던 카니도 참지 못하고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내내 침묵하고 있던 푸른 늑대가 콧등을 찡그리며 자기 의견을 내어놓았다.
「……한 가지, 직접적으로 네게 접촉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기억을 강제로 끌어 올리도록 만드는 원격 주술일 가능성이 있다.」
「원격?」
「확실하지는 않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사령의 공격이라기보단 이그레트가 스스로 묻어두었던 기억을 강제로 마주하게 할 뿐이니까.」
「우웅, 그럼 별일 아닌 거다요?」
토니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답은 루니가 아닌 카니로부터 나왔다.
「아뇨, 정말 그런 거라면 이건 훨씬 더 복잡한 문제예요.」
「……?」
「피하고자 의식 깊은 곳에 묻어 둔 기억을 강제로 매순간 맞닥뜨리게 하는 거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벌써 미치고도 남았겠지.」
「정말 끔찍한 수법이에요.」
정령들의 이야기 소리에도 쥬다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끼리 있을 때면 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중심이 되어주던 그였기에 지금 모습은 상당히 생소했다.
「더 끔찍한 건…….」
유니가 우울하게 덧붙였다.
「우리가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거야.」
자연을 지배하는 정령왕이 넷이나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도 그들은 무력감을 느꼈다.
이는 오직 이그레트가 스스로 이겨 내야 하는 문제였다.
괴로워하는 계약자를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정령들은 몹시 슬퍼했다.
침울한 분위기인 정령들과 함께 쥬다스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즉위식이 열리는 장소는 높은 원형 탑이었다.
돌과 단단한 금속을 섞어 쌓아 올린 벽은 루바르잔 황성에서 가장 높았다.
창문도 없이 솟아 있는 견고한 벽의 끝에는 별도의 천장 없이 뻥 뚫려 맑은 하늘이 맞닿아 있다.
태양이 하늘의 중앙에 위치할 때, 원형 탑 안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 아래서 후계의 인장이 수여된다.
그러기 위해선 탑 내부에 설치된 3개의 단을 올라야 하는데 이때 참관하는 신하들은 단과 멀리 떨어진 지정 구역에 서 있어야 했다.
쥬다스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이목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황족과 일부 귀족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황제는 단 꼭대기에 있는 옥좌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둥―
즉위식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미리 숙지해 두었던 순서에 따라 쥬다스는 천천히 단을 올랐다.
그늘진 바닥을 벗어나 태양이 내리쬐는 계단을 밟고 오르자 그가 걸친 옷도 맑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첫 번째 단을 오른 순간이었다.
-전부 외면한 주제에.
귓가에서 소름 끼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쥬다스는 환청임을 알면서도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그림자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발목을 붙잡는 검은 손이 보였다.
그 손은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가 죽는 걸.
-책임지는 게 싫어서 도망갔을 뿐.
-그래 놓고 이제 와서 그 힘을 이용해 권력의 중심에 서겠다고?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힘겨웠다.
발목을 잡아당기는 검은 손에 의해 제대로 발을 떼기도 어려웠다.
환상이 보이지 않는 참관인들은 의아한 눈으로 휘청거리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편찮으시다는 소문이 있던데.”
“원래도 건강이 좋지 않으신 분이었으니. 혹 다시 병이 도지시기라도 한 건……?”
수군거림 속에는 염려와 의혹이 뒤섞여 있었다.
‘스승님.’
콜은 불안한 시선으로 1황자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옛날의 그 지친 뒷모습을 다시 보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다시 스승을 만났을 때 그는 놀랐고 감동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걱정했다.
혹시라도 그가 다시 상처받을까, 그리하여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가 버릴까 봐.
이젠 그리되지 않도록 지켜드리겠다고 결심하긴 했지만 콜도 알고 있었다.
모든 건 스승인 이그레트가 직접 이겨 내야 할 문제였다.
거미를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대신 곁에서 거미를 잡아주어 봤자 소용없다.
거미를 볼 때마다 아이는 울 것이고,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려 할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거미를 멸종시킬 것이 아니라면, 아이가 직접 거미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내고 극복해 내야 했다.
“……!”
세 개의 단 중 두 번째 단에 올랐을 때, 쥬다스는 별안간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장내가 수선해졌다.
-은인님 때문이에요.
다른 이는 볼 수 없었지만 쥬다스의 눈앞에는 죽은 미카가 나타나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말발굽에 찍혀 머리의 반이 날아가고 팔이 뒤틀린 기괴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그가 지키지 못했던 수많은 과거의 인연이 나타나 주변을 에워쌌다.
-너 같은 놈은 차라리 그 힘을 가지지 말았어야지.
-위선자.
환상은 그의 옷깃에 매달려 끊임없이 속삭였다. 원망했고, 또 저주했다.
이대로라면 즉위식 진행이 무리가 아닌가 하는 의견마저 제기되는 가운데 단 꼭대기에 선 황제는 홀로 의연했다.
바로 그때, 환상에 의해 무릎 꿇린 채 묵묵히 그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쥬다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그래, 용서하지 말거라.”
쥬다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놀라 입을 다문 환영들을 내버려 둔 채 그는 천천히 계단을 마저 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의 무수한 지식과 모두가 우러러보는 힘을 가졌으면서도.”
-너는 죄인이다!
“사람의 작은 마음 하나를 알지 못해서.”
발악하듯 소리 지르는 환영을 지나치며 그는 생각했다.
전부 상처 주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 방법을 몰랐다.
힘은 힘으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억지로 눌러 담고 이겨 내야만 모두가 다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일주일 내내 저주에 시달리면서 그는 마침내 선이란 주관적인 개념이며, 무조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게 ‘선’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쥬다스는 맑은 금안을 들고 자신을 에워싼 환상을 향해 읊조렸다.
“나는 정말 몰랐다. 지키기 위해 화를 내는 게 그들을 위한 ‘선’이 될 수 있었던 것을.”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그러니 너희 말대로 나는 죄인이 맞아. 어리석고 이기적인 나로 인해 많은 피와 눈물이 흘렀으니. 늦었지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구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참, 지난 화 때 '황후가 손에 넣은 연금술자료의 출처가 황제였다'는 게 황제가 직접 현황후에게 준건지 아니면 황후가 몰래 훔친건지 명시하지 않아 혼란을 드린 부분 죄송합니다!ㅠㅠ
전 회차에 수정을 해두긴 했지만, 답을 드리자면 후자입니다!
당시 황비였던 현황후가 우연한 기회긴 했어도 몰래 황제의 물건에 손을 댄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공론화시킬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한....
(오타 및 비문 지적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90화가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매회마다 고칠 것들이 가득... 감사하고도 또 부끄럽네요 ㅠㅠ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따뜻한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