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88화 (8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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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출사표

-무슨…….

“……미안하다.”

우우우우.

사령술로 걸어둔 저주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사야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황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놀라 숨을 들이켰다.

“아니, 저것은?!”

저주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를 에워싼 환영들이 전부 검은 그림자로 변해 울부짖었다.

일반인의 눈으로도 충분히 식별 가능한 사령의 형태였다.

황후가 사용한 주술은 정신적인 공격에 실패할 경우 저주에 사용된 원념과 사령들이 직접적으로 저주 대상자를 공격하도록 명령이 입력되어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호위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사령과 맞서기 시작했다.

동시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정령들도 실체화하여 쥬다스의 사방을 가로막았다.

파아앗.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이 녀석들!」

「아주 박살을 내주겠어요.」

바람과 불의 왕이 서늘하게 눈을 빛내며 살기등등한 기세를 뿜어냈다.

이빨을 드러낸 푸른 늑대가 접근해 온 사령의 목을 물고 흔들자, 그것은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깨어져 기화했다.

장난기 많던 땅의 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자세로 계약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좀 무식한 게 사실이다요. ……그래서 지금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드드드득.

토니의 기운에 의해 땅이 거칠게 진동했다.

자연계 4속성 중 비교적 파괴적인 공격 형태를 띠고 있는 건 불과 땅이었다.

갈라지고 치솟는 땅의 공격에 사령들은 속수무책으로 삼켜졌다.

「이그레트가 마음껏 싸워도 좋다고 했다요.」

지금 정령들은 자유로운 힘의 사용이 허용된 상태였다.

쥬다스는 더 이상 그들을 억제하지 않았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질을 믿었다.

싸움은 거의 일방적으로 진행되어갔다.

자연계 정령왕들의 힘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황제와 1황자의 안전을 위해 뛰어들었던 호위들도 무기를 든 채 멍하니 구경하게 될 정도의 장관이 펼쳐졌다.

소란이 일어난 가운데에도 쥬다스와 황제는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 단에 오른 아들을 향해 기다리고 있던 황제가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두렵지 않느냐?”

“두렵습니다.”

솔직하게 답하는 쥬다스를 보며 황제는 잠시 침묵하다 다시 물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오른들 너를 핍박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싸울 생각입니다.”

“그 결심에 망설임은 없는가.”

“그러기 위해 오른 계단입니다.”

쥬다스는 창백한 낯으로도 힘 있게 대답했다.

“더 이상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싸워서 지켜낼 것이며 그 싸움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힘으로 누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그의 결심을 들은 황제가 들고 있던 물건을 앞으로 내어놓았다.

“황자는 예를 갖추어 후계의 인장을 받도록 하라.”

쥬다스가 무릎을 꿇자 황제는 그에게 인장을 하사했다.

인장은 세 뼘 정도 길이로, 눈처럼 하얀 옥으로 만든 묵직한 로드(Rod)였다.

로드의 옆면에는 붉은 버튼이 하나 달려 있었다.

이를 눌러 보자 겨우 세 뼘만 하던 짤막한 로드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세 배 가까이 길이를 늘려 자라났다.

하얀 몸체 위로 황룡이 그려져 있는 곤봉으로 변화한 인장을 천천히 눈으로 훑는 쥬다스에게 황제가 짤막하게 설명을 곁들였다.

“황룡쇄(黃龍碎)라 한다.”

루바르잔에서 황룡은 군주를 상징한다.

후계의 인장에 황룡을 파괴한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 붙다니, 모순을 넘어 불경하기까지 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 안에 담긴 무거움을 알아차리고 다시 버튼을 눌러 작은 크기로 되돌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국의 지배자는 떨어지지 않는 태양이어야 하며 깨지지 않는 태산과 같아야 한다.

만일 군주를 깨뜨리고 부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그 자신이어야만 한다.

언제나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군주란 없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망설임 없이 자신을 깨뜨릴 수 있는 결단력과 날카로운 판단력이 필요했다.

황룡쇄는 이를 기르기 위한 후계의 인장이었다.

“이로써.”

황제가 아직 선상에 있었으므로 사령과의 전투가 일어난 상황에서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지켜보던 신하들이 고개를 들었다.

“1황자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이 대 루바르잔의 통치자 후계가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둥― 둥― 둥―

선포를 알리는 북소리가 3회 장내에 울려 퍼졌다.

황족과 귀족들은 경건히 허리를 굽혀 황제의 지엄한 명을 받들었다.

이제 사령들도 거의 정리가 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정령들의 힘에 의해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치솟았지만 사람들에게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

혹 불똥이 튄다 하더라도 콜을 비롯한 다른 실력가 호위들이 참관인들을 철통같이 지켜냈으므로 전혀 문제될 일이 없었다.

모두가 그의 힘에 경탄했으며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연계 4속성이라니.”

“이는 마치.”

“자연의 사랑을 받는 것 같지 않은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동시에 이젠 전설로 남은 위인을 떠올렸다.

어쩌면 새로운 전설이 될지도 모르는 시작점을 눈앞에 둔 그들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단 한 명, 파랗게 질려 고개를 치켜든 여인이 있었다.

“안 됩니다…….”

“마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늘이 노하실 것입니다, 폐하!”

사야 황후였다.

그녀는 부서진 단 앞으로 뛰쳐나가 비명처럼 재고를 외쳤다.

“방금 그 아이, 그 아이의 주변에서 나타난 사령들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부정한 존재에서 비롯되어 나타난 더러운 증거임이 틀림없습니다. 다시 생각해 주세요, 폐하.”

“마마,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그런 말씀은.”

“어찌 부정한 존재에게 나라의 미래를 맡기시려는 것인가요? 폐하께서도 아시지요? 저 아이가 연금술로 만들어진 가짜라는걸.”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목숨과 영혼을 걸고 일을 도모했던 황후의 눈에는 더 이상 가릴 것이 없었다.

정리되지 않고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악담에 그녀를 말리려던 신하들도 할 말을 잊고 헛숨을 들이켰다.

“분명 저 사령들도 저 아이가 불렀을 것입니다. 감히 황제 폐하와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눈을 속이고 벌인 간악한 수작이 아니겠습니까!”

“…….”

황후의 말을 들은 쥬다스는 천천히 단에서 내려왔다.

계단을 걸어 내려올 때 아직 남은 사령들이 그를 죽이려 덤벼들었지만 정령왕의 가호를 받고 있는지라 무용지물이었다.

산산조각 깨져 사라지는 사령들 사이로 쥬다스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한 걸음씩 계단을 밟을 때마다 녹색 바람과 푸른 물방울이 주변으로 아름답게 산개했다.

쥬다스가 내려올수록 황후의 낯빛은 곧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파래졌다.

황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저것 보세요. 인간이 저럴 수는 없습니다. 저렇게 인형 같은 표정으로…….”

첫 번째 단까지 내려온 쥬다스가 더 내려오지 않고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단 위에서 황후와 마주 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첫 번째 단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표정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

황후는 그를 가리키고 있던 손가락을 스르르 내려놓았다.

자신을 향한 금안이 미안함과 원망이 뒤섞인 채 일렁이고 있었다.

감정이 없지도, 마냥 온순한 한 가지 감정만을 유지하지도 않았다.

그 안에는 분명 생모를 죽이고 비극을 만들어낸 황후를 향한 원망과 미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미안해했다.

그녀가 타락하도록 내버려 두고, 좀 더 일찍 비극에 개입하지 못해 많은 희생을 따르게 한 것.

그리고 이제, 참지 않고 행해질 단죄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을 마주한 황후는 아연실색하여 입을 다물고 말았다.

‘원망해? ……네가 나를?’

1황자로부터 그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생한 감정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인간이었어. 하윤 리 그녀는, 살아 있는 인간을 낳은 거였어.’

이제야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황후는 허탈하게 두 주먹을 허벅지에 붙였다.

진실을 알았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가 살아 있는 인간이든 인형이든 간에, 황후는 어차피 같은 짓을 반복했을 테였다.

자신의 아들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하윤 리를 죽였다. 그리고 그 아들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숨이 오래 붙어 있었다.

어차피 가짜 인간이라 생각하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게 지금의 결과를 불러왔다.

황후는 자신의 뼈아픈 실책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그레트! 아직 남아 있어!」

유니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고도 쥬다스는 정령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지키기 위해 날아든 녹색 바람을 훅 허공에 흩어버렸다.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잊을 수 없는 한마디였다.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을 재현해 낸 환상이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촤악!

핏물이 튀었다. 참관인 사이에서 꺄아악 하고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들이 보기엔 쥬다스가 사령에 의해 공격당한 걸로 보였지만 정작 그의 눈에는 환영이 덧대어져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과거에 그를 배신하여 등 뒤에 칼을 꽂았던 이들이었다.

‘프리드, 레이야, 할더.’

쥬다스는 어깨에 칼이 꽂힌 채 뒤를 돌아보았다.

이젠 알 것 같았다.

저 셋이 느꼈던 분노와 절망감을, 칼을 꽂으면서 버려야 했던 소중한 것들을.

스스로 악마가 되길 선택한 아이들이 얼마나 아팠을는지 이제야 조금 느껴졌다.

후끈 불에 지져지는 것처럼 뜨거운 고통이 왼쪽 어깨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 쇳덩이가 뚫은 상처는 타는 듯이 아팠고, 또 눈물 나도록 서글펐다.

하지만 가장 아픈 것은 등도, 어깨도 아닌 가슴이었다.

「이그레트!」

그는 손을 들어 정령들의 개입을 다시 한 번 막았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과거의 환영들을 찬찬히 훑었다.

“너희에게도 나는 못난 모습만 보였구나.”

-당신이 못하겠다면 내가 하면 돼.

-세상은 충분히 더러우니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눈감아 주고 있는 당신 역시.

당시에는 배신이라고 느꼈던 말들이 지금은 오히려 상처 받은 아이들의 설움으로 들려왔다.

쥬다스는 눈을 감고 마지막까지 그의 마음속을 괴롭히고 있던 과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줄곧 막고 있던 정령의 힘을 개방했다.

“그래, 이 고통을 잊지 않으마. 그리고 이젠…….”

쿠웅.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분노한 정령에 의해 사령들이 눈 녹듯 녹아 사라진 후였다.

사령들이 사라지자 황후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도 일부러 칼에 찔린 데다, 어깨에 칼을 꽂고도 의연히 마주 보는 시선에 공포심이 들 정도였다.

“다시는 그리 만들지 않겠다는 도장을 찍었을 뿐입니다.”

“도장이라니.”

“또한 마마께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뭐?”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부적을 통한 <저주>는 직접적으로 사령을 이용하는 '공격'이 아닌 일종의 정신력 디버프기능이기 때문에 정령들도 눈치챌 수 없습니다.

네이버닉네임 "돌"님과 따로 이름을 공개하지 않으신 익명의 독자님(?)께서 팬아트를 보내주셨습니다! 캐릭터는 크리스티나와 쥬다스입니다. 공지에 새글로 올려두었으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ㅎㅎ

(참, 폰으로 안보이신다는 댓글을 보았었는데, 폰으로도 공지사항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연재목록 들어가셔서 표지 근처에 보시면 공지사항이라는 글씨가 딱..! 혹은 받은 팬아트들은 전부 개인블로그에 업로드해두기 때문에 블로그로 구경오셔도 됩니다.ㅎ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ekfquf27 입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따끈따끈 호빵같은(?) 응원메세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ㅎㅎ 겨울엔 역시 호빵이 진리...!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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