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89화 (8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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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출사표

쥬다스는 칼이 꽂힌 왼쪽 어깨를 손바닥으로 훔쳤다.

잠깐 훑고 지나갔는데도 손이 푹 젖을 정도의 혈흔이 남았다.

그는 피에 젖은 손을 황후를 향해 내밀었다.

“무릇 사람의 피는 이리 붉을진대.”

주륵.

뜨끈한 액체가 황후의 이마에서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주가 실패함에 따라 사령의 표식이 살갗 위로 드러난 탓이었다.

그녀는 콧대를 타고 흘러내린 핏물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아…… 아아…….”

“무엇을 위해 그 색을 검게 물들이신 겁니까.”

털썩.

황후는 망연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쥬다스가 일전에 프리드와의 싸움에서 얻은 한 가지 정보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사령과 계약한 자는 피가 검게 물든다.

이마에 팔각형 별 모양의 표식을 새기고, 검은 피를 흘리고 있는 황후를 향해 경악스런 시선이 쏟아졌다.

“맙소사, 검은 피가……!”

“이마에 저 흉측스런 표식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팔각의 별은 악마를 뜻할 터.”

“그렇다면 황후 마마께오서 사령술을?!”

웅성거림은 점차 커졌다.

사야 황후는 모든 것을 잃은 패잔병처럼 주저앉은 채 멍하니 검은 핏물을 바라보았다.

목숨과 영혼을 걸었던 계약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

참관인들 틈에서 함께 지켜보고 있던 세이지가 비틀거리며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린 아들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황후가 큰소리로 이를 저지했다.

“오지 마세요, 세이지.”

“어머니.”

“이 어미가 오라고 할 때까지 오지 않기로 한 걸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안…… 안 돼요. 어머니, 제발.”

여느 때처럼 단호히 명하는 어미를 보고 세이지는 결국 울기 시작했다.

황후는 울컥 검은 피를 토해냈다.

동시에 그녀는 점차 생기를 빨린 미라처럼 말라가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일어나는 노화와도 같았다.

매혹적이던 붉은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하얗게 세어버렸고 매끈하게 관리해 온 피부도 툭 튀어나온 핏줄만 남기고 자글자글 말라붙었다.

차라리 주저앉아 있던 게 다행이었다.

황후에게는 서 있을 힘은커녕 비명을 내지를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급기야 말라비틀어진 황후의 몸으로 검은 덩어리들이 곰팡이처럼 뭉게뭉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어머니!”

세이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폐하, 저리 고통스러워하시지 않습니까, 예? 누구라도 좋으니 어머니를 제발 살려주세요.”

“…….”

황제는 단상 꼭대기에 선 채 그저 침묵했다.

사야 황후가 하윤을 죽인 것을 알고도 묵인했듯, 그저 그 높은 자리에서 탁한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비의 차가운 시선을 알아챈 세이지가 다른 신하들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두려워하여 뒷걸음질 치거나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댔다.

절망하여 황후에게로 달려가려던 세이지의 귓가로 부드러운 음성이 하나 들려왔다.

“세이지.”

“……형님!”

쥬다스였다.

세이지는 그 발치에 무릎 꿇었다.

“도와주세요, 형님. 제발.”

황후가 하려던 짓에 대해 전부 알고 있었지만, 세이지는 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을 살려 달라고, 그렇게 빌면서 울었다.

동생의 눈물을 보며 쥬다스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령과의 계약은 정령과 마찬가지로 그들 간에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맹약이란다. 다른 사람이 파기시키거나 계약의 대가를 대신 치러줄 수는 없어.”

「저 인간, 죽는 거다요?」

「한 번 한 계약은 무를 수 없는걸. 사령과의 계약에선 특히 제물로 바치기로 한 걸 반드시 내놓아야 해.」

적을 전멸시킨 정령들이 쥬다스의 곁에 내려앉았다.

유니의 말처럼 계약이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인 맹세였다.

다른 누가 대신 선택해 주는 것이 아닌, 그녀 스스로 목숨과 영혼을 내어놓고 사령의 꼬임에 넘어갔다.

사령은 정령과 달라서 계약자를 이롭게 하려는 목적이 없다.

그저 계약자를 이용해 취하고자 하는 생명력과 영혼을 뜯어먹으려 주변을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령이 요구하는 제물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귀하고 무거웠다.

그걸 알면서도 계약에 응해 타인의 생명을 꺼뜨리고자 한 건 황후 자신이었다.

살해에 실패한 지금조차 사령과의 계약은 완료되었다.

그러므로 황후는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지만, 약속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강해지세요, 세이지.”

황후의 목소리는 더 이상 전처럼 청명하지 않았다.

시든 장미꽃잎처럼 쭈그러들어서 눈알이 온통 검게 물든 채 눈물을 흘리는 황후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움을 넘어 속이 울렁거리는 혐오스러움마저 들게끔 만들었다.

“부디 이 어미처럼 되지 말고. 강해져서.”

노파처럼 걸걸해진 목소리에는 바람 새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언젠가 이 사람이 하려던 일이 무언지 알게 되겠지요. 세이지는 현명하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겁니다. ……부디 청컨대, 그때엔 이 어미의 마지막 모습은 기억하지 말아요.”

‘아뇨, 어머니. 저는 다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무슨 짓을 하신 건지, 무엇을 바라셨는지도. 전부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요.’

세이지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울음과 함께 꾹 눌러 삼킬 뿐이었다.

“끝까지 곁에 있지 못해…… 미안하…….”

파사삭.

마치 불에 타고 남은 잿가루처럼 황후는 산산이 부서져 까맣게 반짝였다.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가루가 되어 날아갔기에 그녀가 입고 있던 무거운 예복이 풀썩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인 없는 물건이 되어버린 옷가지를 보며 세이지가 그 앞으로 다가섰다.

“……어머니?”

가만히 불러 보았지만 더 이상 답을 해줄 어미는 없었다.

세이지는 울음도 멈추고 옷가지를 품에 안아 올렸다.

“…….”

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슬프니 눈물도 나지 않았다.

세이지는 완전히 넋이 나가 어미의 유품을 끌어안았다.

혼돈과 충격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들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황제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 사태에 대하여 상세히 조사하라. 억울한 자가 있다면 그 원한을 풀어야 할 것이며 헛되이 희생당한 자가 있다면 그 역시 샅샅이 드러내야 할 것이다. 다른 동조자의 유무도 반드시 확인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이번에 사용된 주술이 무엇이었는지도 전부 알아내도록 하라.”

명을 내린 황제는 쥬다스에게 한 번 시선을 주고, 이어 넋이 나간 세이지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3황자는 ‘침묵의 궁’으로 끌고 가라.”

침묵의 궁은 황족이 죄를 저질렀을 때 감옥 대신 가두어지며 자유를 속박하고 감시하도록 하는 유폐 공간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혼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3황자 세이지는 별다른 저항 없이 무기력하게 끌려갔으며 황제가 이동하자 꼼짝없이 끔찍한 상황에 함께 갇혀 있던 귀족들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탑 안에 남아 있던 쥬다스는 사야 황후가 죽은 자리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사령에게 붙잡힌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

비록 현생의 생모를 해친 원수였으나 영혼까지 악마에게 붙들려 삼켜지는 것은 너무 비참한 말로였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사령으로 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이번 일에 힘을 빌려준 건 프리드일 터. 그 아이를 멈추게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는 셈인가…….’

뒤늦게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어깨를 찌른 칼은 여전히 붉은 피에 물든 채 꽂혀 있었다.

상처 자체는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출혈량이 상당했다.

치료사들이 급하게 달려왔지만 이미 그는 점차 의식을 놓아가고 있었다.

탁.

쓰러지던 그의 몸을 누군가 단단히 붙들어 받쳤다.

“진실로 훌륭하게 장성하셨사옵니다, 전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아른거리는 시야 사이로 언뜻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에단이라고 하기엔 피부색이 너무 짙었다. 황도를 연상케 하는 특이한 색상이었다.

‘황인…… 어디선가 본 듯한.’

“전하!”

콜의 비명 같은 외침을 뒤로 하고 쥬다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의식을 유지하고 있기 어려웠다.

울렁거리는 머릿속이 점차 가라앉고 대신 폭신한 담요 같은 수마가 찾아왔다.

그는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 * *

1황자가 또 다른 전설을 일으키며 황태자 자리에 올랐다는 소문은 빠르게 제국 내를 뒤덮었다.

또한 사야 황후의 사망 소식과 함께 그녀가 사령술사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통해 저질러 온 극악무도한 죄상이 샅샅이 밝혀져 충격을 안겨 주었다.

특히 자결하였다고 알려진 전 황후 하윤 리의 죽음이 사령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대두되면서 충격을 더해 주고 있었다.

여기에 가담한 자들도 속속들이 색출되었으며 사야 황후의 친가인 캐슬롯 후작가는 멸문에 처해졌다.

그녀의 아들인 3황자 세이지는 아직 어린 나이기도 했고 직접적으로 얽힌 것이 없다 판단되어 침묵의 궁에 유폐되는 한에서 처벌이 내려졌다.

상황이 이쯤 되자 귀족들은 알아서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괜히 꼬투리 잡혀 피바람에 휩쓸릴 필요는 없었다.

3황자파는 물론이고 2황자를 따르던 무리들도 자연스럽게 기세를 죽이고 뿔뿔이 흩어졌다.

정계는 여름을 적시는 보슬비처럼 잠잠해졌으며 축축한 눈물과 수군거림으로 얼룩졌다.

그런 와중에 황태자가 된 쥬다스를 찾는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늘어 있었다.

중립에 서 있던 귀족들은 물론이고 확실히 그에게 붙어 눈도장을 찍으려는 자들, 그리고 즉위를 축하하고자 찾아온 대귀족들까지 모두 그에게 대면을 청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일단 부상을 핑계로 모든 만남을 거절했다.

실제로 치료를 받긴 했으나 그간 끔찍한 저주에 시달리기도 했고 상처 부위가 완전히 치유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저주가 풀려 간만에 푹 휴식을 취한 그는 한결 나아진 낯빛으로 눈을 떴다.

「일어났어?」

“유니.”

따뜻한 녹색 바람이 그의 주변을 한 차례 휘감았다.

쥬다스가 몸을 일으켜 앉자 유니가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이미 이불 위를 뒹굴거리고 있던 토니도 엉금엉금 기어 그의 무르팍에 매달렸다.

「헤헤, 잘 잤다요?」

「아픈 곳은 없고요?」

불의 정령왕 카니도 그에게 달라붙어 안위를 확인했다.

여전히 호들갑스러운 정령들의 아침 인사에 쥬다스는 그만 실없이 웃고 말았다.

“하하…… 괜찮단다.”

「응, 죽 지켜봤는데 푹 잘 자고 있길래 안심했어. 이제 악몽 같은 거 꾸지 마, 이그레트.」

그는 대답 대신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의 정령들을 아이 어르듯 다독여 주었다.

“언제나 좋은 꿈만 꾸고 살 수는 없어. 오히려 악몽을 꿨기 때문에 얻은 것도 있지.”

「그치만, 그래도 난 네가 좋은 꿈만 꿨으면 좋겠어.」

「그게 우리의 바람인걸요.」

정령이란 언제나 그래 왔듯 계약자를 맹목적으로 생각했다.

갓 새끼를 낳은 어미개가 새끼를 품듯, 혹은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오리가 제일 처음 본 사람을 머릿속에 각인하여 따르듯.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셨나요?ㅎㅎ

올해는 케빈이 아니라 해리와 함께였다는...(?)

농이고, 간만에 집에서 하루종일 푹 자서 좋았습니다.

...솔로라서 일부러 잔 게 아니라요...진짜로 쉬려고.....ㅠㅠ

자느라 사X퍼X 쇼타임도 참여를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이상하네요. 왜 눈에 땀이;)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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