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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출사표
그렇게 그들은 오로지 계약자 한 사람만을 위해 소망했다.
그 절대적이고도 부드러운 바람을 알고 있는 쥬다스는 마찬가지로 정령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왔다.
그들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의 사익을 위해 도구처럼 이용되지 않도록 늘 주의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는 조금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다.
‘무조건 배려만 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게 아니었어.’
그건 마치 관상용 꽃을 창가에 올려두고 때 묻지 않게 지켜주는 행동과도 같았다.
정령은 꽃이나 잘 닦인 보석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선 그 자신이 좀 더 능동적이 될 필요가 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 생각한 쥬다스가 미안함을 담아 정령들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전하, 로한입니다. 기침하셨습니까?”
“들어 오거라.”
시종 로한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그에게 말을 전했다.
“존안을 뵙고자 청해 온 손들이 있습니다.”
그간 손님들을 전부 거절해 온 쥬다스였다.
굳이 그 말을 또 전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 그가 로한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시종은 한마디 덧붙였다.
“루바흐의 친우분들입니다.”
“……그 아이들이?”
의외였다.
방학을 맞아 각자의 자택에서 편히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아이들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쥬다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즉시 친우들을 방 안에 데려오도록 지시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침의 위에 얇은 겉옷을 하나 걸쳤다.
아직 대외적으로는 사령의 공격을 받고 병상에 누운 황태자였기에 제대로 예복을 갖춰 입을 필요는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루바흐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도착했다.
“쥬다스 님!”
제일 먼저 바이칼이 그 앞으로 달려왔다.
“황궁 안이다. 체통머리 없이 굴지 말고 전하께 예를 지키도록.”
그 뒤를 따라 크리스티나가 도도한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들어왔다.
그녀의 일침에 찔끔한 바이칼이 한 발 늦게 품행을 바로 했다.
그러는 사이 마지막으로 들어온 에단이 쥬다스의 안부를 물었다.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별일 아니…….”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으려던 쥬다스는 문득 멈칫 말을 멈추었다.
자신을 찾아온 세 아이의 얼굴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걱정이 물들어 있었다.
예전에 투르케 사막에서 프리드와의 전투가 있었을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저 걱정하지 말라 고개를 저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크리스티나가 처음으로 그에게 서운한 속내를 드러냈었다.
‘너무 완벽해 보이는 게 더 불안합니다.’
‘…….’
‘……저희에겐 걱정할 틈도 안 주시는 것 같으니까요.’
그때엔 크리스티나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다.
그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투정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들이 얼마만큼 걱정하고 또 불안해하는지에 대해서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그들의 마음이 잔잔하게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마치 빳빳한 흰 도화지 끝에 물감이 번지듯 그렇게 천천히 이해했다.
그래서 쥬다스는 하려던 말에서 방향을 바꿔 말했다.
“……아니, 약간 다치긴 했으나 잘 치료받고 쉬어서 지금은 거의 다 나았단다. 다들 걱정해 주어서 고맙구나.”
“전하.”
세 아이는 모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를 따르고자 마음먹은 아이들에게 있어선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척 보기에도 크게 다친 곳 없이 건강해 보이는 쥬다스였기에 그들은 크게 안도하여 그제야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즉위식 전과 다름없이 훈훈한 분위기로 떠들썩해진 아이들을 가만 바라보던 쥬다스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장소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온 김에 지난번처럼 꽃구경이라도 가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어어, 그런데 전하께선 지금 쉬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활기차게 대답부터 한 바이칼이 뒷목을 긁적이며 슬그머니 덧붙였다.
크리스티나와 에단도 동조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저희 때문에 편히 쉬지 못하시는 건 아닌지.”
“오히려 이럴 때야말로 바깥공기를 쐬어야 기운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구나. 그렇잖아도 혼자 나가기 적적하던 참에 너희가 찾아와 아주 잘되었지 무어냐. 하니 그런 걱정일랑 말거라.”
“……예.”
본인이 괜찮다는데 더 만류할 수는 없어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외로 나오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살갗에 와 닿았다.
봄과 달리 여름햇살은 포근하지 않았다.
뜨겁다 못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열기가 지상을 달구었다.
궁 뒤뜰에는 생생히 자라난 짙푸른 잔디가 가지런히 손질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벚나무가 홀로 자리했다.
원래는 봄 한 철 아름답게 피고 지는 벚꽃이었지만 나무에 깃들어 있는 정령의 힘으로 사시사철 아름답게 만개한 분홍색 꽃잎을 볼 수 있었다.
궁의 사용인들이 야외용 파라솔과 다과상을 솜씨 좋게 차려 주었다.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지만 나무그늘 아래에서 얼음을 띄운 아이스티를 마시고 있자니 제법 운치가 있었다.
다시 한자리에 모인 그들은 먼저 쥬다스가 겪은 이번 사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들은 후 그간 각자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즐겼다.
“그 쥐방울만 한 동생 녀석이 어찌나 떼를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오, 남동생은 안 그러는데 진짜 여동생은 오라비 알기를 무슨 제 시종으로 안다니까요? 여자 형제들은 원래 이런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여자든 남자든 대우할 만한 사람을 대우하겠지.”
“예? 그 말씀은 크리스티나 님이 보기에 제가 대우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흠, 확실히.”
“……뭐요?”
모처럼 뜻이 통한 크리스티나와 에단은 같은 눈빛으로 바이칼을 심드렁하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욱한 바이칼이 열성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변호를 늘어놓았다.
“아, 솔직히 제가 뭐 동생들한테 잘해주는 편까지는 아니긴 한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딱히 못해 주고 그런 건 아닙니다. 뭐, 어릴 때야 자주 싸우면서 자랐으니까 골탕도 좀 먹이고 놀리고 그런 건 했지만. 그래도 때린 적은 없다고요! 생일 때면 꼬박꼬박 선물도 챙겨주고. 괴롭히는 녀석 있으면 대신 가서 혼내주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부분을 오라비로서 존경하길 바라는 거지?”
“……예?”
“존경할 부분.”
바이칼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딱히 존경받을 구석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말을 못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기에 그는 어거지로 아무거나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어, 그래도 제가 걔보단 나이가 많으니까…….”
웅얼거리던 바이칼은 에단과 눈이 마주치고 입을 닫았다.
따지고 보면 14살인 바이칼에 비해 15살인 에단이 나이 면에서는 더 우세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그도 에단을 존경해야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이 뇌리를 스치자 바이칼은 어물어물 말을 바꾸었다.
“어음, 동생보단 그래도 똑똑한 편…….”
문예과 수석과 차석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그는 한 차례 더 말을 돌렸다.
“……마법도 쓸 수 있고.”
쥬다스의 주변을 둘러싼 정령들이 말똥말똥 그를 쳐다보았다.
바이칼은 끝내 자신을 변호하길 포기한 채 두 손을 들어 항복을 선언했다.
“에라이, 됐습니다! 이 틈바구니에서 내 자랑을 한들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제 깨달았나.”
“자아성찰은 빠르군.”
“……이 양반들이 진짜.”
말은 저리해도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바이칼을 마음에 들어 하기에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이 드는구나. 하지만 꼭 대단하지 않더라도 네 동생에겐 충분히 멋진 오라비일 게다.”
“하아. 딱히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을걸요.”
바이칼은 자포자기하여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존경은 됐고 그냥 개뼈다귀 취급만 안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멋지다는 건 내 생각이란다.”
“……예?”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바이칼을 향해 쥬다스는 어깨를 두드려 주며 웃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는 그 아이의 삶 속에서 지금껏 오라비로, 형제로 자리한 것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단다.”
‘나면서부터 원수가 되어 결국 형제의 가슴을 찢어놓은 나와는 달리.’
쥬다스는 세이지를 떠올리며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전부 전해 들은 셋은 생략된 부분을 미루어 짐작하곤 조용히 입을 닫았다.
잠깐 잔잔한 침묵이 감도는 사이 시종 로한이 다가와 쥬다스에게 또 다른 방문객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해동에서 전하의 즉위식을 참관하기 위해 찾아온 사신입니다. 전하를 꼭 뵙고 돌아가야 되니 상처가 회복되기까지 기다리겠다 하여.”
해동이라면 죽은 생모의 모국이었다.
나라 정세가 기울어가던 때에 왕녀를 보내 루바르잔 황제와의 동맹혼을 맺음으로 인해 가까스로 일어선 국가이기도 했다.
쥬다스는 먼저 찾아온 세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잠시 일어섰다.
공식적으로 찾아온 손님인 만큼 그를 궁내부의 응접실로 모시도록 했다.
그가 응접실로 들어서자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해동의 사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차렸다.
“루바르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해동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이 자리에 나온 ‘수호 연’이라 합니다. 해동 문관 귀족 연가(延家)의 가주로서 즉위를 축하드림과 동시에 제17대 임금이신 성왕의 전언을 전달드리고자 왔습니다.”
타국의 사신은 보통 그 나라에서도 중직을 맡은 귀족이 찾아오게 마련이었다.
쥬다스 역시 그를 향해 예의를 갖추어 답했다.
수호 연은 이방인답게 얇은 짐승 가죽으로 만든 경갑 옷 위로 하늘색 도포를 걸친 특이한 차림이었다.
또한 외형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황색 피부로 확실히 다른 나라 사람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나이는 30대 초반이었고 눈이 둥글고 코가 살짝 낮아 인상이 부드러워 보였다.
쥬다스는 얼굴을 보자마자 상대를 금방 기억해 냈다.
“지난번엔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즉위식이 있던 날, 피를 많이 흘리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순간 그를 붙들어준 이였다.
모친의 모국에서 온 사신이다 보니 수호는 퍽 자상한 태도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잠시 안부를 물은 해동의 사신은 쥬다스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차근차근 본론을 이야기했다.
“하윤 공주마마의 혈육이신 성왕께선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면목 없는 이야기지만 그간 해동국이 무너지지 않도록 힘쓰는 것만으로도 피가 마르는 각고의 상황이 있었기에……. 이리 늦게 찾아뵙게 된 점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또한 마마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전하.”
수호 연은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갑작스런 큰절에 쥬다스도 일어나 엎드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러지 마십시오. 미안해하실 필요도, 고마워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니요, 전하. 우리 해동은 전하께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성왕께선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마마의 변고를 애통해하시어 노하셨으나……. 하윤 공주마마의 무고를 강경히 주장하지 못함에 있어 가장 크게 비탄하셨습니다.”
해동의 제17대 임금인 성왕(成王) ‘서윤 리’.
그는 하윤 리의 하나뿐인 오라비이자 그녀의 동맹혼을 끝까지 반대했을 정도로 동생을 아낀 인물이었다.
하지만 해동은 무너져 가는 왕국이었고, 그들이 재기할 방법은 루바르잔 제국의 강대한 힘을 빌어 새롭게 기반을 다지는 수밖에 없었다.
하윤 공주는 이를 위한 공물이었다.
직접 하윤 공주를 대면한 루바르잔의 황제도 마침 그녀를 한눈에 마음에 들어 했고, 다양한 정치적인 거래를 통해 동맹혼이 성립되었다.
해동은 망해 가는 나라이긴 했으나 다른 적국에 빼앗기기엔 무수한 가치를 지닌 곳이기도 했다.
결국 동맹혼이 결정되고, 하윤 공주가 해동을 떠나는 그 전날까지 당시 세자였던 서윤은 끝까지 이를 반대하며 왕 앞에 무릎 꿇었다.
그런 서윤을 토닥이고 격려한 게 바로 하윤이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모국을 떠났다.
“하여, 전하를 꼭 해동에 초대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요즘 미세먼지가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먼지는 됐고 12월 끝나기 전에 눈이나 펑펑 내렸으면 좋겠네요.ㅠㅠ 눈오는 날을 참 좋아하는데 영 눈올 기미가 안보입니다. 끙.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끈따끈한 응원메세지에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ㅎ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