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91화 (9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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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출사표

이제 겨우 왕좌에 앉아 나라를 어느 정도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한 서윤은 제 누이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조카를 보고 싶어 했다.

“알겠습니다. 당장은 어려우니 기다려 주신다면 잊지 않고 꼭 방문하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감읍할 따름입니다, 전하.”

수호 연은 다시금 깊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후 그는 사신으로서 소임을 다했으니 그길로 루바르잔을 떠났다.

쥬다스는 방학 기간 동안 황궁에 머물며 군주의 후계자로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약식으로 익혔다.

본래 좀 더 어렸을 때 후계의 인을 받고 루바흐가 아닌 황실 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어야 하는 그였다.

뒤늦은 시작인 데다 그가 학원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후계 수업은 졸업 이후로 미루어졌다.

대신 앞으로 익혀야 할 것들에 대해 미리 안내받았기 때문에 혼자서라도 독학할 수 있는 것들이 꽤 생겼다.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 세 사람은 방학이 끝날 때까지 종종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다음 학기 어떤 수업을 신청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도 함께 나누었으며 서로에게 부담 없이 연락을 주고받는 등 부쩍 친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한여름 밤 꿈처럼 방학이 지나가 버리고, 이제 루바흐로 돌아갈 시기가 되었다.

쥬다스는 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세이지를 찾아갔다.

죽은 사야 황후의 간계가 밝혀짐으로 인해 그녀의 아들인 3황자 세이지는 ‘침묵의 궁’에 갇혀 있었다.

황족 전용 감옥이라 불릴 정도로 황량하고 감시자들의 눈길이 가득한 장소였다.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는 그곳이 어딘들 상관없었다.

별도로 가두지 않았더라도 세이지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터였다.

늘 생기 있게 반짝이던 9살 소년의 눈동자는 죽은 물고기처럼 탁했다.

멍하니 창가에 기대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아이는 형의 방문 소식에 고개를 돌렸다.

“……형님.”

“오랜만이구나, 세이지.”

쥬다스가 두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찾아온 이유는 아이에게도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쥬다스가 황후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위험천만한 도박 게임에 뛰어들어 제 목을 조른 건 황후 자신이었다.

그녀는 게임에서 졌고, 그래서 죽었다.

사실이 그랬지만 그렇다 한들 쥬다스를 보는 세이지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지난 두 달간 세이지는 홀로 마음껏 울었다.

울다 지쳐 기절하듯 잠들고 꿈속에서도 울었으며 깨어나서도 서러워 울었다.

쥬다스가 피해자에 불과하단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원망하기도 했다.

‘……형님만 아니었으면.’

이기적인 생각이었으나 막 어미를 비참하게 잃은 어린 세이지로서는 자연스럽게 가슴을 메운 원망이었다.

하지만 그 원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슬픔이 지나쳐 양은 냄비 끓듯 파르륵 끓어올랐던 분노였다.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일 뿐, 진정으로 쥬다스가 악인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기에 과열되었던 머릿속이 식는 속도도 빨랐다.

대신 세이지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은 걸인처럼 무너졌다.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은 푸석하게 엉켰으며 옷은 오래 갈아입지 않아 더러웠다.

눈물자국이 마르지 않아 얼굴에 두드러기처럼 피부염이 일어났으며 제대로 먹지 못해 전체적으로 몸이 비실비실했다.

얼굴 가득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한 쥬다스는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창가에 기대 선 세이지는 멍하니 걸어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게도 알려주겠느냐?”

“…….”

쥬다스는 세이지 곁에 서서 함께 창가에 기댔다.

은은한 바람이 불어 커튼이 펄럭였고 열린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와 보석처럼 반짝였다.

“……저는.”

한참 만에 세이지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선택했어요.”

“그래.”

“전부 알고 있었는데. 그랬으면서 말리지 못했어요. 남들에게 알리지도 못했고요.”

“그랬구나.”

부드럽게 말을 받아주는 쥬다스를 보며 세이지는 울컥 소리쳤다.

“그런데 왜!”

너무 오랜만에 큰소리를 내는 바람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쉰 소리가 나는 목을 가다듬을 생각도 않고 아이는 재차 말을 이었다.

“왜 형님은 아직도 그런 표정이세요? 전 다 알고 있었다구요. 형님의 어머니를 죽인 게 누군지, 형님을 죽이기 위해 사령과 계약한 게 누군지, 이번에 형님이 이겨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전부 알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빨갛게 일어난 볼 위로 주륵 눈물이 흘렀다.

세이지는 더 이상 표정을 관리하지 않았다.

“내가, 나쁜 거잖아요. 전부 나 때문인데 내가 모른 척 도망가서.”

“세이지.”

“차라리 욕해 주세요. 형님을 배신하고 폐하를 배신하고, 나쁜 건 줄 알면서도 죄를 지은 저를, 미워하셔야 하잖아요.”

“세이지.”

“그래야 제가, 그래야 저도.”

나를 미워하는 형님을 미워할 수 있을 테니까.

고요히 내려다보는 맑은 금안을 마주한 세이지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창틀에 얼굴을 묻었다.

일그러진 얼굴 대신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미안하다.”

“…….”

“내겐 너를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구나. 그것이 네게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단다.”

뚝 울음이 그쳤다. 세이지는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너는 누구도 배신한 적 없어, 세이지.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을 뿐.”

“…….”

“그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어.”

세이지는 히끅 딸꾹질을 했다.

우물쭈물 망설이다 형의 따뜻한 시선을 확인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아이는 그날 목이 쉬도록 울었다.

홀로 울었던 날들과 다르게, 형의 옷자락을 붙들고 어미 잃은 새끼고양이처럼 하염없이 울었다.

이는 3황자 세이지가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제 스스로 걸음마를 시작한 첫날이었다.

* * *

드디어 루바흐의 개학일이 밝았다.

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의 햇볕이 내리쬐었다.

방학 중엔 한산하던 교정에는 다시 교복을 차려 입은 학생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지나다녔다.

다시 루바흐로 돌아온 아이들은 새 학기의 시작에 대한 설렘과 학업에 대한 걱정 등으로 들떠있었다.

그런 학생들 사이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이슈는 다름 아닌 황태자 자리에 오른 쥬다스에 관한 소식이었다.

불과 반 년 전만 해도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볼 품 없는 ‘백로황자’가, 이젠 황제의 후계가 되어 돌아왔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침없는 행보였다.

그뿐 아니라 역사상 단 한 명뿐이었던 자연계 4속성 정령의 계약자라는 사실도 함께 드러나 그에 대한 경탄이 그치지 않았다.

학생들은 마치 새로운 시대의 전설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오셨대!”

“어디, 어디?”

그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루바흐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갔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왕의 행차를 구경하는 시민들처럼 좌악 늘어선 학생 무리를 지나는 한 소년이 있었다.

잡스럽지 않고 깨끗한 은발에 부드러운 빛을 담은 금안, 몰려든 인파를 보고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제 갈 길을 가는 쥬다스였다.

“쥬다스 님!”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아이들이 있었다.

방학 중에도 종종 얼굴을 봤지만 학교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새삼스럽게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간 황실 예복이나 고급 의상을 차려입고 만났던 것과 달리 다들 같은 교복을 입고 루바흐에 도착한 그들은 자연스레 쥬다스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바이칼, 크리스티나, 에단. 좋은 아침이구나.”

“옙, 슬슬 날씨도 풀리려나 본데요.”

“아침저녁으로는 이제 꽤 쌀쌀합니다. 겉옷을 하나 걸치심이.”

슬슬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환절기 특유의 급격한 온도 변화에 몸이라도 상할까 염려하는 아이들을 보며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괜찮단다. 날이 풀려서 시원한 것이 딱 좋아. 오히려 크리스티나 너는 여자아이니 몸을 따뜻이 하는 편이 좋겠구나.”

“……저 루바흐의 여기사님을 ‘여자아이’ 취급하시는 건 쥬다스 님이 유일하실걸요?”

바이칼이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고, 자신이 한 걱정을 돌려받은 크리스티나는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노란 머리의 소년이 한 명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쥬다스 님.”

“마르젠, 여기서 보니 반갑구나.”

“하하. 저도 반갑습니다.”

여전히 유들유들한 분위기의 마르젠이었다.

그는 방학 기간 중 다 같이 모이는 자리에 끼진 않았지만 따로 쥬다스를 찾아와 축하 겸 병문안을 다녀가곤 했다.

“이야, 모두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부는 딱히 묻지 않아도 그래 보이니 생략하지, 그대.”

“아하하. 여전히 매정하시긴~”

크리스티나의 푸대접에도 마르젠은 익숙한 듯 웃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들 일행 틈에 끼어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숙소는 반대 방향이신 걸로 압니다만.”

“들러야 할 곳이 한 군데 있어서 말이다.”

“아.”

그제야 쥬다스의 이능에 생각이 미친 마르젠은 알겠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세 아이는 이미 그가 향할 곳을 알고 있었기에 딱히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얼마 걷지 않아 목적지에 도달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꽃의 가짓수가 늘어나 화사해진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은은한 꽃향기와 팔랑거리는 나비가 정원의 분위기를 한층 따뜻하게 꾸며 주었다.

정령학 연구소의 정원이었다.

“어? 오빠다!”

연분홍색 머리카락에 파란 리본 핀을 꽂은 리베흐가 쥬다스를 발견하고 도도도 뛰어왔다.

그녀의 들뜬 기분에 따라 겨울바람정령 비비가 살랑살랑 눈송이가 섞인 바람을 일으켰다.

반짝이는 얼음 결정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손을 뻗는 마르젠과 나머지 세 사람을 힐끗 쳐다본 리베흐는 경계하듯 쥬다스에게 폭 달라붙었다.

“……누구?”

“내 친구들이란다.”

“오빠 친구?”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오빠’ 호칭에 쥬다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래.”

“웅, 네! 오빠는 리베흐 친구니까. 친구의 친구님들, 안녕하세요.”

7살 소녀의 배꼽 인사에 네 사람은 웃으며 함께 인사해 주었다.

“반가워, 이름이 리베흐? 오빠는 마르젠이라고 해, 마르젠.”

“마르젠 오빠?”

“그렇지! 리베흐는 똑똑하구나, 하하.”

제일 사교성이 뛰어난 마르젠이 빠르게 리베흐와 친해졌다.

그러는 사이 멀리서 아벨이 그들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곁에는 남매처럼 닮은 투르키가 함께였다.

“전하! 어, 언제 오신. 아니, 괜찮으신. 아니, 추, 축하드립니다.”

아벨은 정신없이 말을 더듬으며 그에게 하려던 말을 늘어놓았다.

표현은 미숙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알아본 쥬다스는 아벨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고맙구나, 아벨.”

“어머나, 쥬다스 님? 손님들도 함께 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허허. 오셨습니까?”

이사벨, 그리고 콜도 그에게로 다가왔다.

정원을 가꾸다 말고 온 그들은 물뿌리개와 화분 등을 들고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다른 정령학 수업을 듣는 아이들도 다가와 그들을 반겨 주었다.

“……그래, 돌아왔구나.”

그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정령들이 까르르 웃으며 반응했다.

「편안해 보여, 이그레트.」

「재밌는 사람이 많다요!」

「다들 진심으로 반겨 주는 게 보여요.」

「그리고 너 역시. 저들을 만나 기뻐하고 있군.」

처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고 두렵지도 않았다.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고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그 시선 속에 자신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결국 관계란 그런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도 하고 위해 주기도 하면서, 혹은 상대를 위해 헌신하기도 하고 반대로 무언가 해주길 바라기도 하는, 그런 복잡한 것들이 전부 인간관계였다.

정작 그 자신도 지금 눈앞의 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지금과 같은 친우로 남아주길.’

변하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

늘 지금 같을 순 없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 바람은 그가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욕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되지 않더라도 더는 실망하거나 도망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프지 않고 날갯짓하는 새는 없다.

겉보기에 잔잔해 보일지라도 바다에는 파도란 굴곡이 존재하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미래가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라고.

그래서 그는 두 번째 삶에서만큼은 인간답게 살아보기로 했다.

그것이, 그가 이제부터 느리지만 똑바로 걸어갈 세상에 대한 출사표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큽, 드디어 1부완결을 찍었습니다!

1부완결 기념으로 Q/A를 받아보려합니다. (...계실까)

혹 질문사항이 있으시다면 'Q.질문'을 해주시면 다음 화에 'A.답'을 달아드리겠습니다.

이제 2015년의 마지막 날이 되었네요. 올 한 해 마무리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바라며,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는 내일 바닷가로 떠나 새해 첫 일출을 보러갑니다. 흐흐..

다녀와서 독자님들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야겠네요.ㅎㅎ

그럼 이틀 뒤, 내년에(?) 에필로그와 집필후기로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메세지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돌님께서 팬아트로 유니를 그려주셨습니다. 곧 공지에 추가해두겠습니다.ㅎ 귀한 선물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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