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92화 (9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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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프롤로그 / 12장. 서막

1황자 쥬다스가 황태자로 즉위한 지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는 자신이 미리 예고한 대로 2년 안에 모든 학업을 끝마치고 루바흐 조기 졸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졸업 후 군주의 후계로서 해야 할 과정을 착실하게 밟아나갔다.

17살이 된 지금, 쥬다스는 황태자로서 받는 마지막 수업의 일종인 ‘순례의 길’을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순례의 길이란 대제국 루바르잔을 다스리는 군주의 후계가 꼭 거쳐야 하는 관례였다.

다스리는 자는 통치를 받는 영지와 속국을 시찰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예행하여 군주로서의 책임감을 다지는 것이 이 순례의 목적이었다.

보통은 황태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수많은 황실호위대와 기사단이 따라붙으며 그의 방문을 각 영지에 미리 알린다.

그리하여 시찰보다는 유람 겸 귀족들과의 친목도모를 위한 성대한 행차 삼아 다녀오곤 했지만 쥬다스는 그리하길 거부했다.

그는 직접 나서서 황제에게 청을 넣었다.

“이 기회를 헛되이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 부디 청컨대 사람들의 참된 삶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제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지 알고자 합니다.”

전생에서는 그저 피하기에만 급급했던 것들에 대해 지금은 몹시 궁금해졌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알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행차를 할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서 어디에도 알리지 않은 채 잠행을 나갈 것을 요청했다.

황태자의 당돌하기까지 한 청을 받은 황제는 긴 침묵 끝에 무거운 허락을 내렸다.

대신 조건으로 황태자친위기사단과 황실소속 그림자호위 둘을 동행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황제는 쥬다스를 향해 날카로운 경고를 남겼다.

“네 어깨에 걸린 것들은 더 이상 5년 전과 같은 무게가 아니다. 너는 루바르잔의 차기 태양이다. 혹 너의 목에 위협이 가해진다면 너를 따르는 모든 이의 목이 달아날 것이며, 경솔히 행동하여 작은 상처라도 입는다면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이를 명심하라.”

만일 이번 순례의 길에서 쥬다스가 잘못된다면 후계자리는 자연히 2황자에게 넘어간다.

2황자 카이제르는 쥬다스보다 고작 두 살 어린 15살 소년이었다.

유순한 성격에 신체적인 이능이 뛰어났던 그는 세이지처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외척 세력이 없어 크게 눈에 띄진 않았지만 그래도 황제의 후계로서 모난 구석은 없는 훌륭한 황자였다.

쥬다스가 날개를 펴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따르고 차기 군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제법 있었지만 5년 전 죽은 사야 황후가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지금으로선 4속성 정령술이라는 강력한 이능과 수많은 귀족이 지지하고 있는 1황자를 밀어낼 세력도 이유도 없었다.

쥬다스는 루바르잔의 황태자로서 완벽했다.

더 이상 반발은 없었으며 유순한 성격의 2황자 역시 큰 야욕 없이 무예를 연마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쥬다스가 순례의 길을 잠행으로 떠나겠다고 한 것은 어찌 보면 또 다른 분란을 조장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막지 않았다.

‘뜻이 있다면 어디 스스로 이루어 보거라. 여기서 쓰러질 나무라면 어차피 더 큰 싸움에선 살아남지도 못할 터.’

황태자가 처음으로 올린 청에 대한 허락이자 시험이었고, 또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다.

황제의 허가하에 황궁에선 조용히 그에 대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황태자친위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은 에단 R.헤이가였다.

쥬다스보다 1년 반 늦게 루바흐를 졸업한 에단은 공작가인 집안의 원조와 그간 갈고닦은 우수한 무예 성과를 기반으로 거리낄 것 없이 곧장 기사가 되었고, 작년 초 친위기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살의 나이로 이미 검으로는 제국 내에서 당해낼 자가 없으니 황태자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기엔 적격이었다.

친위대는 일반 기사뿐 아니라 마법기사와 치유술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중 마법기사로 입단한 바이칼은 쥬다스의 곁에서 실질적인 사회 정보나 진솔한 충언 등을 도맡아 참모 격으로 일했다.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졸업한 마르젠은 가문을 이을 백작 후계로서 정계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활동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티나의 경우 공작영애로 돌아가 개인 교습을 받으며 간간히 사교 활동에 참석하는 것으로 소식을 알렸다.

그리하여 곧 출발할 ‘순례의 길’에는 에단이 이끄는 친위기사단 열둘과 황실소속 그림자호위 두 사람이 더 붙어 총 열다섯의 인원이 함께하게 되었다.

그렇게 정리되었던 것이, 출발 전날이 되자 조금 변동이 일어났다.

“저만 빼고 가시려 하시다니 서운합니다, 스승님.”

“……이런, 어찌 알았느냐?”

“허허. 저도 바람의 정령술사라는 걸 잊으신 겝니까? 여튼 저도 반드시 동행할 겝니다. 말리지 마십시오.”

굳은 의지를 다지며 나타난 것은 콜이었다.

이제 일흔이 넘은 나이의 콜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지만 정령을 다루는 술사였기에 나이에 비해 건장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무리하게 움직이기엔 어려울 수 있는 연령이었다.

그 점을 염두에 둔 쥬다스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매일같이 장거리를 움직여야 하는 데다 그리 편안한 일정은 아닐 터인데.”

“상관없습니다. 스승님은 제 나이 때 벌써 거동이 불편하셨던지요? 자연의 정령과 계약한 술사는 보통 사람들보다 노화도 느리고 늘 생기가 넘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 원 녀석도.”

70대 노인이 17세 소년에게 부릴 투정은 아니었지만 쥬다스는 콜의 말뜻을 곧장 이해하고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아흔이 넘는 나이까지 정정히 살다 간 전생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일흔은 한창나이였다.

본인이 저렇게 원하는데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쥬다스는 나이 든 제자의 투정에 져주는 수밖에 없었다.

「쟤도 참 언제 철이 들까 몰라.」

「후후~ 너무 그러지 말아요. 유니. 나름 귀여운데요, 뭘.」

유니의 심드렁한 감상에 카니가 쿡쿡 웃었다.

바람과 불에 최상급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콜이었으니 그들 눈에는 제법 귀여워 보이긴 했다.

대신 토니와 루니는 침묵했다.

「그런데 이그레트.」

“음?”

함께 가겠다며 확답을 받아낸 콜이 자리를 떠나자 유니가 쥬다스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한 방향을 가리켰다.

후웅-

녹색빛으로 반짝이는 미풍이 유니가 가리킨 쪽으로 산들산들 흘렀다.

「저 애는 왜 데려가겠다고 한 거야?」

벚나무 아래 앉아 휴식을 즐기던 쥬다스는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긴 은발이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든 햇살을 받아 아침호수처럼 반짝였다.

“글쎄, 변덕이려나. 그 아이에게도 세상을 볼 기회를 나눠주고 싶더구나.”

그의 시선은 침묵의 궁이 자리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어제 3황자 세이지, 이제 열넷이 된 배다른 동생을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어미를 잃고 홀로 침묵의 궁에 갇혀 지내던 세이지를 위한 황태자의 또 다른 청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번 순례의 길에 3황자를 동행할 것.

중신들은 크게 반대했으나 황제는 기어코 그의 청에 허가를 내렸다.

그리하여 다음 날 출발할 황태자의 순례행렬에는 총 열일곱의 인원이 함께하게 되었다.

이것이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이 역사서에 기록될 첫 번째 발자취였다.

* * *

황태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황궁을 떠났다.

중직을 맡은 일부 귀족들은 그가 순례의 길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정확히 언제 출발해서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해서는 몰랐다.

잠행을 결정한 쥬다스는 심지어 떠나는 당일, 황제조차 만나지 않고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함께 움직이는 일행도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첫 번째 행선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포탈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고 마차를 타지도 않았다.

이동수단은 황실에서 특별히 관리하고 있던 말이었다.

웜브레드로 특수 배양된 경종마들이었는데 새끼 때부터 기초훈련은 물론이고 전투훈련까지 받아 체력이 강하고 영리했다.

또한 각각 금속재질의 단단한 보호대를 차고 있었는데 거기에 안전과 편리를 위한 특수마법이 걸려 있어 장시간 승마하더라도 탄 사람의 몸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에단과 열둘의 기사단은 물론이고 어린 세이지조차 승마를 할 줄 알았다.

나이가 많은 콜도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편안히 말 위에 올랐다.

그렇게 그들은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곧장 출발했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어둑한 새벽녘, 열다섯 기의 말발굽 소리가 찬 공기를 뚫고 울려 퍼졌다.

그들과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황제가 붙여준 그림자호위 둘도 은밀히 그 뒤를 따랐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수도를 빠져나간 쥬다스는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오후 무렵에서야 한 개울 앞에서 멈춰 섰다.

봄기운에 얼음이 녹아 맑고 깨끗한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일행은 그곳에서 말들의 목을 축이고 휴식할 겸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쥬다스는 직접 자신이 타고 온 말에게 물을 먹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법 수도와 멀리 떨어진 위치였는데 노랗게 죽은 풀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전방에는 낮은 경사를 따라 빼곡하게 키 작은 과일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겨우 어른 허벅지 정도에 닿을 정도로 조그마한 나무들은 초봄의 포근한 햇살을 받으면서도 기운 없이 축 가지를 늘어뜨렸다.

볼품없이 말라 있는 죽은 잎사귀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의 머리 위를 차지하고 매달려 있던 토니가 툭 바닥에 내려앉았다.

「이그레트! 여기 이상하다요.」

「이상한 줄은 보면 알아, 얘.」

타박을 놓으면서도 유니는 포로록 날아올랐다.

부드러운 녹색 바람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산들산들 불어왔다.

「그치만 여기 나무들이 다 죽었다요. 우웅, 땅은 멀쩡한데. 누가 일부러 죽인 거 다요!」

토니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땅강아지처럼 흙에서 통통 튀어 다녔다.

척 보기에도 지나치게 황량한 땅이다.

개울에 물이 흐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봄이 시작되어 날씨가 추운 것도 아닌데 전체적으로 식물들이 시들시들 말라죽어 있었다.

쥬다스는 개울에 말을 두고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실체화하여 모습을 드러낸 4속성 정령이 함께였기 때문에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반짝이는 물거품과 녹색 바람이 흩어졌다.

본래대로였다면 이 시기쯤 푸르게 잎사귀가 돋았을 나무들은 까맣게 죽은 잎을 매단 채 전부 시들어 있었다.

비탈진 경사를 따라 넓게 심어둔 나무 전체가 그랬다.

가까이 다가간 그가 죽은 나뭇잎에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이었다.

“전하.”

어느샌가 에단이 그의 뒤를 따라와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안녕하세요, 2부의 시작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ㅎ

소제목에 표기해놓긴 했지만 이번 편은 앞부분에 미리 공개해두었던 프롤로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부는 따로 1장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12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서 붙입니다!

오늘 이어서 다음화까지 업로드해놓겠습니다.

그럼 2부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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