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93화 (9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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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서막

올해 19살이 된 에단은 제국법상으로 이미 작년에 성인식을 마친 어른이었다.

같이 루바흐를 다녔던 당시보다 키가 훌쩍 커 있었고 철저한 자기관리로 인해 검을 휘두르기 적합한 위치에 필요한 만큼의 근육을 만들어두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목선을 따라 깔끔하게 잘라 단정함을 유지했고 매일같이 수염을 깎아 매끈한 턱은 한층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본래 책임감 강하고 매사에 철저한 성격이긴 했지만 황태자친위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라는 중직을 맡으면서 좀 더 신중해졌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이곳에는 오래 머물지 않으시는 편이.”

“에단.”

“……예.”

부드러운 부름에 에단은 고개를 숙였다.

“이곳은 궁 밖이질 않느냐. 계속 그리 부르다간 잠행이 아니라 행차를 하게 될 것 같구만.”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하면, 어찌 시정할 생각인고?”

“…….”

에단은 짓궂게 물어오는 쥬다스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친위기사단장이 된 그로서는 주군의 잠행을 보좌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태자를 황태자라 부르지 못하고 친위대를 친위대라 하지 못하는 상황을 뒤늦게 실감한 그가 일자로 입을 다물자 쥬다스가 작게 웃어 보였다.

“예전처럼 이름으로 충분하다. 그리해 주겠느냐.”

“……!”

어찌 감히, 라고 답하려던 에단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5년이라는 세월을 주군의 곁에서 보필하며 지내온 그로서는 저 유순해 보이는 황태자의 고집이 쇠심줄보다 질기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시찰 임무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 쥬다스는 눈에 띄는 은발마저 평범한 갈색으로 바꾼 상태였다.

색을 바꾸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황실마법사들이 연구해 낸 특수 모자를 쓰기만 하면 되었다.

챙이 좁은 검은색 중절모는 머리에 착용하는 순간 본래 색이 무엇이었든 간에 마법의 효과로 갈색으로 바꿔 버렸다.

반대로 다시 색을 되돌리는 것 역시 모자를 벗기만 하면 되므로 매우 간단한 방식이었다.

황태자의 이름이야 유명하긴 했지만 어차피 제국에서 그 혼자 쓰는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상관이 없었다.

원래 당대의 유명한 위인이나 귀인의 이름은 아이들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다.

같은 맥락으로 ‘이그레트’라는 이름도 이 시대 많은 아이가 가지고 있었다.

“어, 식사 준비 끝났는데요. 두 분 거기서 무얼 하십니까?”

학자용 푸른 로브를 걸친 바이칼이 그들에게 다가와 기웃거렸다.

쥬다스와 에단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보거라.”

“예?”

바이칼은 쥬다스가 내민 손바닥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그 안엔 까맣게 말라비틀어진 식물의 잎사귀가 놓여 있었다.

“근처엔 개울이 흐르고 땅은 건강함에도 식물이 이리 죽을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흠,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꼭 무슨 병에 걸려 죽은…….”

쥬다스의 손바닥에 놓인 죽은 잎사귀를 자세히 살핀 바이칼은 고개를 돌려 언덕을 따라 전부 시들어버린 나무를 확인하고 쯧 혀를 찼다.

“여기서 뭐 전염병이라도 도는 걸까요?”

「에에엥.」

「뭐가 또 ‘에에엥’이야?」

토니가 그 말에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이건 병 아니다요. 병이라면 이런 식으로 까맣게 말라죽지 않는다요!」

실체화되어 있는 채로 열렬히 고개를 내젓는 토니에게 세 사람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쥬다스 뿐이었지만 에단과 바이칼도 멈칫 생각이 미치는 바가 있었다.

“설마.”

“……사령?”

두 사람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5년 전 사야 황후의 사령술 사건 이후로 ‘사령’이란 더 이상 그들에게 있어 생소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금기로 막아둔 사령술은 그날을 기점으로 여기저기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사령술을 익힌 자는 엄벌로 다스린다 하였지만 누군가 일부러 술법을 전파하고 다니기라도 하듯 사령술사에 대한 신고가 점차 늘었다.

더 크고 강력한 힘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사령이란 배고픈 고양이 앞의 생선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탓에 하루가 멀다 하고 사령술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터졌다.

“내 생각도 너희와 같구나. 허나…….”

쥬다스는 손안에 든 죽은 잎사귀를 털어버렸다.

바뀐 머리색과 달리 여전히 맑게 빛나는 금안이 부드럽게 그들을 향했다.

“우선 무슨 목적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겠지.”

“예에?”

“왜 하필 이 땅의 나무들을 다 말려 죽인 것인가.”

바이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덤덤한 답이 돌아왔다.

“사령의 힘이라면 사람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저 덤덤하게 듣기엔 그 내용이 제법 시렸다.

사령술에 대해 차가운 분노를 살짝 드러낸 쥬다스는 나무들을 정화하지 않고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세 사람이 언덕에서 내려오자 친위기사들이 준비해 둔 스프와 빵을 가져다주었다.

에단이 기사단장이 되면서 다른 친위기사들과도 자주 안면을 익혀둔 쥬다스는 익숙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갔다.

냄비를 끓이느라 피워둔 모닥불 앞에 붉은 머리 소년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쥬다스는 접시를 든 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아직 날씨가 제법 쌀쌀하구나.”

“……형님.”

“모닥불 앞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지?”

빵을 든 채 먹지도 않고 멍하니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만 있던 세이지가 쥬다스를 보곤 미소 지었다.

“네, 전 모닥불을 이렇게 피우는 건 줄 몰랐어요.”

“처음 본 게로구나.”

“따뜻해요. 궁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이제 열네 살이 된 세이지는 생기발랄하고 치기가 넘치던 어릴 때와 달리 매우 침착해졌다.

침묵의 궁에 오래 갇혀 있던 탓에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해 소극적이 된 면도 있었다.

그래도 꾸준히 자신을 만나러 와주고, 지금은 아예 궁 밖으로 데리고 나와 준 형이 있기에 아이는 비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자라날 수 있었다.

두 형제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함께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었다.

대충 식사를 마무리하고 일어날 때쯤 쥬다스는 본래 더 달리려던 말고삐를 돌려 근처에 위치한 도시로 향했다.

일행의 행선지를 정하는 건 오로지 쥬다스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모두들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그의 뜻에 따랐다.

‘레이븐 시티.’

팻말에 적힌 도시명에 눈길을 준 쥬다스가 벗어놓고 있던 마법모자를 가볍게 머리에 얹었다.

신비롭게 반짝이던 은발이 순식간에 평범한 갈색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그의 의지에 따라 실체화되어 있던 정령들도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말의 속도를 줄여 도시 입구까지 천천히 이동했다.

레이븐은 도시명이기도 했지만 주변 자잘한 마을을 포함한 영지명이기도 했다.

레이븐 영지는 농업과 산림업 등을 통해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동네였다.

“정지! 신분을 검사하고 있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영주가 사는 모든 도시에선 입구에서부터 신분을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특히나 요즘처럼 뒤숭숭한 시점에선 철저한 보안이 필수였다.

쥬다스 일행은 미리 챙겨둔 위장용 신분증을 사용하여 검문을 통과했다.

그들이 이번 잠행에서 임시로 사용하는 신분은 여행 중인 귀족 도련님과 호위기사들이었다.

딱 봐도 호위를 명목으로 우르르 붙어 있는 친위대를 두고 평민 노릇을 할 수는 없었기에 제일 무난한 귀족가 영식을 택한 것이다.

십 대의 귀족 도령이 호위들을 끌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일이야 워낙 흔했다.

대개는 마차를 이용하거나 포탈을 타는 편이지만 쥬다스처럼 몸소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나이 또래의 불타는 모험심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 탓이었다.

어찌 보면 쥬다스도 그 명목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제법 어울리는 역이었다.

“이곳 특산품은 뭔가?”

쥬다스는 새로운 도시를 구경할 기대에 가득 찬 귀족 자제처럼 경비를 향해 물었다.

일단 그의 신분이 귀족이라 확인되었기에 경비는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블루베리를 넣고 담근 와인입니다. 다른 곳에서 나는 베리류보다 훨씬 달고 향이 좋아 많이들 찾으시죠.”

“오, 그런가? 그런데 오면서 블루베리 나무 같은 건 못 본 것 같은데.”

일부러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경비들이 미안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흉작이 들더니 나무들이 전부 말라죽었습니다. 묘목들만 간신히 살려놓은 상태인데 아직 열매를 맺기엔 무리라서……. 그래도 재작년까지 담가둔 상품이 많으니 구하기 어려우시진 않을 겁니다.”

그 바람에 가격은 원가보다 다섯 배가 넘게 뛰었지만 경비는 부러 거기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그 속내를 뻔히 꿰뚫고 있는 쥬다스였으나 그는 그저 허허롭게 웃으며 지나쳤다.

“참고하도록 하지. 그럼 수고하시게.”

“레이븐 시티에서 즐거운 방문되십시오.”

도시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말에서 내려 말들을 보호소에 맡겨두었다.

떠들썩한 장터로 들어선 쥬다스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이것저것 행상을 구경했다.

정말 관람이라도 온 듯한 여유로운 태도였다.

따르는 이들은 평소답지 않은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골라, 골라! 3개에 1실버!”

“레이븐 시티에서만 나오는 시지 않고 달콤한 베리 주스 팝니다!”

“블루베리 빵 5개에 단돈 2실버, 다 떨어지기 전에 얼른 사가십쇼!”

왁자지껄한 장터에는 주로 먹거리가 가득했다.

쥬다스는 그중 주스와 빵을 구매해 일행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전하…… 아니, 쥬다스 님. 이런 데서 파는 음식은.”

“괜찮다. 사람 사는 곳에서 못 먹을 걸 팔겠느냐.”

“하나.”

“먹어 보거라. 달콤하니 맛이 아주 좋아. 혹 단 걸 먹기 싫어 투정 부리는 것이냐?”

“……아닙니다.”

황족은 아무 음식이나 입에 대서는 안 된다.

특히 황제의 후계로 자리매김한 쥬다스의 경우 각별한 관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잠행 나온 자리에서까지 귀한 것들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궁 안에서 입이 짧기로 소문난 황태자는 서민들의 음식을 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씹어 삼켰다.

그 모습에 에단을 비롯한 기사들이며 세이지나 콜 역시 자신 몫으로 주어진 간식을 맛보아야 했다.

달콤새콤한 블루베리를 넣어 만든 빵과 주스는 그 안에 설탕을 뿌려 자극적인 단맛을 만들어냈다.

단 음식을 질색하는 에단으로서는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음식이었으나 그는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고 빵을 씹었다.

후우웅

녹색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흩날렸다.

도시를 한 바퀴 돌고 온 유니가 쥬다스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으며 입을 열었다.

「알아왔어. 여기 영주가 문제인 것 같아.」

쥬다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정령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주스를 마시면서 덤덤히 행상을 구경하는 척하며 유니의 설명을 들었다.

「주민들을 아주 착취한다나 봐. 남의 건 자기 거, 지 거도 당연히 자기 거. 나눌 줄 모르고 오히려 뭐든 과하게 징수를 하고 빼앗아간대. 이번에 블루베리 농사가 망한 것도 영주란 인간이 욕심 부리다 그렇게 된 거라는데…….」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번 챕터의 소제목은 "서막"입니다.

가벼운(?) 사건과 마주하면서 2부에서 보여드리고자 하는 큰 뼈대를 조금씩 드러낼 예정입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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