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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서막
「무슨 욕심이요?」
카니가 다홍빛 눈망울 가득 호기심을 담고 물었다.
그러자 유니는 표정을 살짝 구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영지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유명한 농가가 하나 있었대. 유달리 맛있는 열매가 나고 그 양도 다른 땅에 비해 무지막지하게 많이 나왔다고. 부부와 딸래미가 같이 운영하는 블루베리 농장이었는데, 점점 유명해지니까 소문을 들은 손님들이 그 집 과실만 찾으러오고! 그래서 욕심 많은 영주가 그 꼴을 보고 아주 배 아파 죽으려 했지.」
레이븐의 영주는 결국 농장을 빼앗기에 이르렀다.
일부러 농장에서 사고를 일으켜 죄를 뒤집어씌운 후 농장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심지어 농부의 아름다운 부인마저 빼앗아 첩으로 삼았다.
그들 사이에 있던 열세 살짜리 어린 딸은 하녀로 삼아 끌고 갔다.
딸은 아직 어려 첩으로 삼을 순 없었으니 하녀 일이라도 시키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농부의 부인은 첩살이를 요구하자 그대로 목을 매 자결해 버렸다.
하루아침에 그동안 열심히 일군 땅과 재산, 부인마저 잃어버린 농부는 눈이 뒤집혀 영주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감히 귀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죽도록 두들겨 맞고 쓰러졌다.
제압하는 과정에 머리를 잘못 맞고 사망하게 된 농부는 마지막으로 영주를 저주하며 죽어갔다.
‘네놈……. 네 사악한 짓거리를 하늘이 보고 땅이 보았으니. 네 영지에서 나는 모든 나무는 꽃을 맺지 못할 것이며 과실을 얻을 수 없으리라. 네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이든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기이한 일은 그다음부터였다.
마치 그 저주를 정말 땅이 듣기라도 하듯, 그날부터 정말로 모든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한 해가 지났을 뿐이므로, 영주는 이를 가볍게 여겼다.
이미 거둬들인 과실로 담근 주류나 말린 블루베리 등 여분이 잔뜩 쌓여 있었고 굳이 블루베리가 아니더라도 그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많았다.
결국 이 시점에서 농부의 저주는 영주보다는 다른 농가의 주민들을 피 말려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그 저주란 게 참 이상하지? 아무리 원한이 있어도 이능을 가진 자도 아닌데 전부 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게 말이 안 돼.」
유니는 쥬다스의 어깨 위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사령의 기운이 느껴져. 분명 이번 일, 사령이 개입되어 있어.」
“흐음.”
우뚝, 그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그에 따라 일행이 전부 정지했다.
쥬다스는 가장 곁에 있던 에단과 바이칼, 세이지와 찬찬히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부터.”
“예.”
“바보가 될 생각인데 말이다.”
“……?”
하도 황당하니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굳어버린 일행을 대표하여 에단이 가까스로 반문했다.
“……예?”
“같이 바보놀음에 좀 어울려 주겠느냐?”
“……예?”
쥬다스는 이미 바보가 되어버린 듯한 일행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 * *
“허허허.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얼마나 많았나?”
“하하. 아닙니다, 백작님. 경관이 아름답고 구경거리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으니 고생을 느낄 틈도 없었습니다.”
“거 감수성이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구만 그래. 응? 드로셀라 후작의 조카라 그런가?”
호방한 웃음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쥬다스는 레이븐 영지의 영주, 즉 레이븐 백작과 대면하는 중이었다.
그가 임시로 사용하는 신분은 멀리 떨어진 영지에서부터 출발해 여행 중인 자작가의 영식이자 후작의 조카인 ‘디노 캘런’이었다.
귀족들이 여행 도중 다른 지역의 귀족을 찾아가 대접을 받는 일은 매우 흔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친목을 다지고 정치적인 줄을 대기도 했다.
화기애애한 만남 속에서 로비가 오간다.
겉보기엔 그저 여행 중 잠시 인사차 들른 것 같아도 귀족들 사이에선 이런 만남이야말로 서로 챙길 것을 챙기는 접대였다.
호위들은 전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실제 그렇듯이 동생으로 소개된 세이지는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음료만 기울이고 있었다.
“아, 그래. 이 레이븐에 왔으니 특산 와인은 벌써 먹어봤겠지 싶은데. 어땠는가?”
제국의 귀족이라 하면 12살부터 교양상식으로 와인 문화에 대해 배운다.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금지되는 것은 전문적인 술집이나 공개적인 술자리였다.
대개 사적인 만남이나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식사자리에선 와인 한 병쯤이야 관례적으로 허락되는 부분이었다.
쥬다스는 몹시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깍지 꼈다.
“안 그래도 그 특산품이란 게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아니! 설마 아직 맛도 못 본 것인가? 내 당장 그 맛을 알려줌세.”
레이븐 백작은 가볍게 손짓했다.
그 사인을 알아들은 집사가 유리장에서 빳빳한 천 조각에 밑동을 감싸둔 와인병을 꺼내 가져왔다.
그리고 크리스털로 만든 잔에다 와인을 기울여 따르기 시작했다.
잔에 와인이 차오르는 걸 힐끔 쳐다본 쥬다스가 백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블루베리와인. 이게 참 일반 와인과 다르게 쓴맛이 없이 달고 향긋하다더군요.”
“이런, 그 맛이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지. 먹어봐야 아는 게야. 자네는 나 아니었음 어디 가서 레이븐에 방문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뻔 했겠군그래.”
“하핫, 그러게 말입니다.”
유쾌하게 답하는 쥬다스와 달리 그 곁에 앉은 세이지는 불안한 표정으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백작은 대화에 끼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세이지에게도 잔을 건네주었다.
“자네 동생은 숫기가 없는 편이로군. 왜 그리 긴장했나?”
“…….”
세이지는 고급 와인이 담긴 잔을 바라만 볼 뿐 입을 굳게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열넷이 된 아이의 시선에도 백작의 사치가 보였다.
필요 이상으로 큰 저택과 최고급 목재와 보석을 사용한 인테리어.
농업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영지에서 맛보기 힘든 온갖 산해진미가 담긴 고급 사기그릇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메이드들이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유리장을 따라 칸칸이 쌓여 있는 와인병은 지금은 말라죽어 찾아볼 수 없는 블루베리로 담가놓은 최고급 품질이었다.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세이지를 잠시 쳐다보던 백작은 금방 흥미를 잃고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 따라놓은 게 지독한 가뭄이 들었던 해에 담근 12년산일세.”
레이븐 백작이 먼저 잔을 들었다.
그를 따라 쥬다스가 고고한 손짓으로 와인잔을 마주 들었다.
세이지는 무릎에 손을 올려놓은 채 묵묵히 자기 몫으로 주어진 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이는 아직 주도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하시지요.”
“크흠.”
못마땅한 눈으로 헛기침을 뱉은 백작은 쥬다스의 말대로 다시 하려던 말을 이었다.
“……본래 과실이란 게 말일세, 가뭄이 들수록 그 맛이 진하게 우러나오는 법이야. 물렁거리지 않고 햇빛을 그대로 흡수하지. 지금도 비록 나무들이 가물긴 했지만 올해도 이 12년산처럼 귀한 열매를 맺으리라 기대하고 있네.”
“과연, 귀한 것일수록 진가가 빛나는 법이지요. 쉽사리 얻지 못해야 손에 넣는 재미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호라! 벌써 그 재미를 안단 말인가? 자네와는 역시 말이 잘 통하는군.”
백작은 껄껄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백작이 눈짓하자 쥬다스 역시 들고 있던 잔을 기울였다.
블루베리 특유의 달큰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어떤가? 레이븐 최고의 술이라네. 천것들은 평생 밭일을 해도 감히 입에 대보지도 못할 귀주야. 심지어 황제폐하께도 진상하지 않았지. 오직 나를 위해 바치는 이 땅의 수확물이란 말일세. 오늘은 내 특별히 자네와의 만남을 빛내기 위해 꺼내왔네만.”
“…….”
“이 정도면 내 저택의 손님들이 즐거이 여길 만한가?”
아주 잠깐이지만 쥬다스의 금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쥬다스는 이를 와인과 함께 깊은 내면으로 넘겨 버렸다.
맛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뜬 그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즐겁다마다. 이 땅을 찾는 모든 객이 백작님의 은혜를 찬미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호탕한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울렸다.
어둠이 내린 창밖으로 그들의 웃음소리가 불빛과 함께 새어 나갔다.
세이지는 웃고 떠드는 분위기 속에서 자리가 파할 때까지 끼지 못했다.
일행들에게 미리 예고하고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도무지 쥬다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그야말로 바보가 아닌가.’
현명한 형님은 이미 이 저택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바보놀음’을 제안하면서, 쥬다스는 일행에게 영주의 악행으로 인해 고통받는 레이븐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었다.
감히 군주의 눈을 피해 권력을 악용하여 민생을 착취하고 있다는 괘씸한 내용에 세이지는 분개하여 당장 레이븐 백작을 끌어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흥분한 동생을 말리며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독충만 제거한들 독에 중독된 사람들까지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니란다.’
쏘인 자국을 찾고 알맞은 치료약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 말한 쥬다스는 백작의 저택을 찾아와 사치와 향락에 눈이 먼 멍청한 귀족 자제를 흉내 내고 있었다.
세이지는 그런 형의 연기에 장단을 맞추기 어려워 조개처럼 입만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기분이 좋아진 백작은 그들에게 크고 좋은 방을 내어주고 여자까지 붙여주겠노라며 눈앞에 얇은 슬립만 한 장 입혀놓은 메이드들을 세워놓고 직접 고르도록 했다.
그 바람에 세이지는 질겁하여 형을 쳐다보았지만 쥬다스는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부사항까지 지정하여 요구하기까지 했다.
“가급적 저보다 어린 편이 좋습니다. 대담한 쪽보다는 내성적인 쪽으로. 여자에게 휘어 잡히는 건 별로 원하지 않는지라.”
“크크, 자네도 아직 어리군. 계집은 자고로 적극적일수록 풍미가 깊은 법이거늘 말일세.”
백작은 음흉한 눈으로 메이드들을 훑어보며 와인 품평하듯 대꾸했다.
“뭐 취향대로 골라 데려가도록 하게. 즐거운 시간을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말고, 난 이만 빠져주도록 하지.”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이 은공을 어찌 다 갚을지…….”
“돌아가서 후작께 잘 말씀드려주기만 하면 갚을 일이지 않나. 하면 편히 쉬시게.”
백작이 응접실에서 나가자마자 석상처럼 굳어 있던 세이지는 자신은 필요 없다며 여성접대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연기가 끝난 줄 알았던 쥬다스는 신중히 메이드들 앞을 서성이다 이내 한 소녀를 지목했다.
“이 아이로 하지.”
‘형님?!’
그가 가리킨 건 미색은 빼어났으나 고생을 심하게 하여 피골이 상접한 어린 소녀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귀족의 선택은 절대적이었다.
소녀의 실제 나이는 벌써 열넷, 마냥 아이로만 볼 수 없는 시기였다.
다 자라지 않은 아이라고 해서 명을 거부할 수는 없다.
하는 수 없이 소녀는 겁에 질린 채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그렇게 다음 스토리는 노블레스로 이동되고....(?)
는 농담입니다. 쿨럭.
12시에 다시 이그레트로 뵙게 되니 기분이 묘하네요.ㅎ
그동안 연재는 안해도 혼자 열심히 쓰고는 있었는데..하하...
기다려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ㅠ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