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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서막
안내해 준 다른 메이드가 문을 닫고 나가자, 소녀는 손마저 덜덜 떨기 시작했다.
“…….”
세이지가 안쓰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볼품없이 짧게 자른 단발이긴 했지만 싱그러운 풀을 따다가 물들인 듯한 어여쁜 연두색이었다.
그 색깔만큼은 쥬다스가 다루는 바람의 정령 유니와도 닮아 있었다.
소녀의 커다랗고 맑은 갈색 눈동자 위로 투명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잔뜩 겁에 질린 그녀를 돌아본 쥬다스가 짧게 한숨을 쉬며 겉옷을 벗었다.
펄럭!
“……!”
흠칫 놀라 떠는 소녀의 어깨 위로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코트가 내려앉았다.
번쩍 고개를 든 소녀의 시야에 미안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는 쥬다스가 들어왔다.
“미안하구나. 겁먹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얇은 슬립만 한 장 입고 있는 소녀에게 자신의 코트를 둘러준 그는 상대가 안심할 수 있게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였다.
백작과 대화할 때 들었던 허영 가득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다정하게 변한 어투에 소녀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나는 많은 사람의 삶을 보고 듣고자 시찰을 나온 황실의 일원이란다. 이 땅에 고통받는 자들이 있다 하여 이리 들렀거늘, 영주의 말만 듣고는 이보다 평화롭고 풍요로울 수가 없으니 당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기가 어렵구나.”
“화, 황실의…….”
연두색 단발머리의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따라했다.
쥬다스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갈등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을 믿어야 좋을지, 아니면 이로 인해 괜히 엉뚱하게 꼬투리를 잡혀 매질을 당하게 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던 참에 그들의 방으로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거라.”
깜짝 놀라 어깨를 덮은 코트를 꽉 부여잡은 소녀와 달리 쥬다스는 태연하게 입장을 허가했다.
문이 열리고 공손한 태도로 들어온 건 에단과 바이칼이었다.
그들은 쥬다스의 앞에 무릎 꿇고 상황을 보고했다.
“백작이 소유하고 있는 병력은 주로 창병과 궁병으로, 마법을 포함한 이능력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현재 저택에 기거하는 병사 규모는 대략 오십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어후, 저자도 참……. 나름 영지 치안에는 신경을 쓴 모양이더라구요? 사방에 병력을 배치하여 지키고 있더군요. 그래 봤자 자기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제 발 저려 감시하기 바쁜 거겠지만.”
바이칼은 어깨를 으쓱하며 보고를 마쳤다.
친위기사단원이 되고 나서도 바이칼은 쥬다스에게 그리 어렵게 굴지 않았다.
도를 넘진 않았지만 에단처럼 절도를 지켜 예의범절을 따지지는 않았다.
진솔한 성격을 가진 바이칼이 보이는 친밀함의 표현이었다.
그것이 그만의 장점이기도 했기에 쥬다스는 기꺼이 그 어필을 받아들였다.
“형님…….”
이제야 그가 하려는 일에 대해 갈피를 잡은 세이지가 안심하여 확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을 지우자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소녀는 방 안에 오도카니 선 채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쥬다스라 한단다. 너는?”
“……카, 칼라.”
“칼라, 내가 좋아하는 꽃 이름과 같구나. 그래. 우릴 도와줄 수 있겠느냐?”
따뜻함을 담은 금안이 자신을 향하자, 칼라는 코트 자락을 붙든 손아귀에 꾸욱 힘을 주었다.
어깨를 덮은 코트에서 좋은 향이 났다.
곧 그녀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찌하면……!”
“이야기를 해주렴.”
“네?”
“칼라, 네가 본 것들, 네가 들은 것들. 이곳에서 일어난 것들에 대해서.”
에단과 바이칼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방에 모인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사실에 칼라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아빠는, 정령술사셨어요…….”
볼품없이 빼빼 마른 소녀의 갈라진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빠의 정령님은 땅의 정령이랬어요. 엄마랑 전 직접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 정령님이 도와주셔서 과일나무가 잘 자라는 건 알 수 있었어요.”
그 뒤로 이어진 건 유니가 가져온 정보와 같은 내용이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 쥬다스와 달리 세이지는 충격받은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 제국의 귀족이란 자가 그런 짓을!”
“……이런 게 저희 삶인걸요. 나리들께선 평민의 삶 따위에 신경 쓰고 싶지 않으실 테지만…….”
칼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감정에 북받쳐 눈물만 흘렸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우리 아빠, 엄마. 복수까지는 못하더라도 원한만큼은 풀어드릴 수 있다면.”
“원한?”
“아빠는 가시는 날까지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셨거든요. 끊임없이 저주하고, 또 저주하시다가 그만…….”
그리고 근처를 맴돌던 땅의 정령이 그의 소망을 들었다.
큰 힘이 없고 나무를 돌보기 좋아하며 크고 달콤한 과실을 맺도록 도와주던 정령은 어쩔 줄 모르고 계약자의 주변만 빙글빙글 돌았다.
억울하게 피를 흘리고 죽어간 계약자의 마지막 소원을 들은 정령은 이를 똑똑히 기억했다.
마침내 계약자의 숨이 끊기는 순간, 아름다웠던 땅의 정령은 순식간에 검게 타락했다.
“분명 정령님이 아빠의 저주를 기억하고 있는 걸 거예요. 하지만 그래선 안 돼요. 우리 가족처럼 고통받는 사람들만 늘어날 뿐이니까. 그러니까.”
칼라는 조그맣게 애원했다.
“……도와주세요.”
본래 같았더라면 평민이 감히 귀족에게 부탁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무례였다.
어깨 위를 덮은 따뜻한 온기 때문이었을까, 칼라는 자신이 염치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온기를 두 손으로 꾹 붙들었다.
어차피 이제 더 이상 떨어질 나락도 없었다.
이대로 어른이 되어 백작의 장난감으로 비참하게 살다 가느니 목이 날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앞의 손님들을 믿기보다 당장 자신의 앞에 펼쳐진 미래를 믿었다.
그래서 애원했다.
“제발요. 황실 나리들.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 원하신다면 몸이든 마음이든 전부 드릴 테니까.”
쥬다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소녀의 애원을 들었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깨끗한 금색 눈동자를 마주 본 칼라는 지레 겁먹어 입을 다물었다.
‘감성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야. 이 사람도 역시 귀족……. 그럼 난 이제 어떡해야.’
가진 것 없이 메이드로 노역하는 칼라로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그간 시찰 나온 관리들을 아예 만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백작이 영지주민들에게 저지른 일 정도로는 그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백작은 교활하게 자신의 죄를 감출 줄을 알았다.
모든 것은 철저히 평민의 죄로 돌아갔고, 그가 탐낸 제물과 여인들은 전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겉보기엔 멀쩡히 굴러가는 영지였고 오히려 가난한 민생을 거두느라 세금 낼 돈도 없다며 우는 소릴 하는 백작에게 처벌을 할 명분도, 그러고자 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번 감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잠시 쥬다스가 보인 따뜻함에 흔들렸던 칼라는 빠르게 체념했다.
그때, 훌쩍이는 칼라를 본 바이칼이 목덜미를 벅벅 긁으면서 중얼거렸다.
“거참, 뭐 볼 게 있다고. 가뜩이나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미녀들을 들이밀어도 눈길조차 안 주시는 분한테.”
그러자 에단이 곧장 서늘하게 눈치를 주었다.
“……바이칼.”
“예이, 다물고 있겠습니다.”
이제 에단의 구박에도 익숙해진 바이칼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장난처럼 내뱉긴 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차기 군주자리에 앉은 쥬다스에게 접근하는 여인은 많았다.
수많은 귀족가문에서 황태자비의 영예를 노리고 아리따운 여식들을 보내왔다.
대놓고 접근하든 우연을 가장하여 마주치든 어딜 가나 그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미녀들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열일곱이라는 나이가 되도록 쥬다스는 황태자비감을 고르지 않는 건 물론이고 하룻밤 열애로 타오르는 스캔들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으니 비를 맞이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여인을 만나지 않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본래 아흔이 넘는 수명을 누려온 전생을 기억하는 쥬다스로서는 도저히 손녀딸 같은 아이들을 여자로 볼 수 없었을 뿐이지만, 그를 보필하는 수하들은 은근히 걱정의 눈길을 주고받곤 했다.
그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칼라는 투덜거리는 바이칼과 한숨을 쉬는 에단을 번갈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난감해진 장본인 쥬다스는 턱을 짚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너와 네 부모님의 복수를 해줄 생각은 없단다.”
“…….”
이미 체념한 상태인 칼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에 달린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이어지는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하나 죄인을 모른 척 눈 감을 생각도 없으니.”
“……!”
“적법한 절차에 따라 그를 치죄하도록 할 생각이다. 그러려면 네 도움이 필요하다, 칼라.”
칼라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빛나는 금안을 보며 생각했다.
‘……감성에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야. 이분은…….’
“도와주겠느냐.”
“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처음부터 어떤 것에도 흔들린 적 없었던 거야.’
뒤늦게 알아본 의지와 함께 포기했던 희망이 다시금 소녀의 가슴속에 부풀었다.
‘오직 우리 얘길 듣기 위해서.’
쥬다스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간 이 레이븐 영지를 지나쳐 간 시찰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저택에 들려 상황을 살피고 접대를 위한 자리에서 일부러 그녀를 지목한 것도 전부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의 금안에 깃든 부드럽고 강한 빛이 어디까지 비출 수 있을 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백작의 사악한 술수 아래 저 빛마저 무너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칼라는 그 앞에 온 마음을 다해 무릎 꿇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리.”
연신 절을 하는 소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쥬다스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멈추었다.
“좀 더 일찍 알아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흡, 흐어어엉.”
부모를 잃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홀로 버텨야 했던 열네 살 소녀는 이제야 막혔던 울음을 터뜨렸다.
사계절을 참았다 터뜨린 울음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 쥬다스는 날이 밝자마자 백작을 다시 만났다.
늘 하던 대로 손님을 대접한 백작은 그에 대한 감탄을 늘어놓는 쥬다스를 보며 만족스레 껄껄 웃었다.
아침부터 진귀한 과일들과 갖가지 빵이며 케이크, 노릇노릇하게 구운 베이컨, 요거트와 신선한 과일주스 등으로 상을 채운 백작은 제대로 영지 구경을 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혀를 차며 외투를 껴입었다.
“따라오게. 내 자네들에게 이곳 레이븐의 참 가치를 맛보게 해주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말씀하시는 대로 댓글은 줄었지만 소중히 남겨주시는 코멘트 하나하나가 정말 많은 힘이 됩니다!^^ 반갑기도 하고요 ㅎ
뭐랄까.... 메마른 황무지에서 사람을 만난 그런 느낌적인 느낌...운명의 데스티니(?)
Q. 에스티오와 이그레트는 1일1연재인가요?
A. 에스티오는 2월달까진 1일1연재로,
이그레트는 다음주부터 "월/화/수/목/금"연재로 진행됩니다.ㅎ
(질문을 늦게 확인해서 죄송합니다.ㅠ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