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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서막
백작이 두른 흑담비 모피 코트는 척 보기에도 값비싼 태가 났다.
마치 살아 있는 담비를 보는 것처럼 번들번들 윤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봄기운이 돌기 시작한 날씨에는 과한 모피 코트였지만 백작은 보란 듯이 단추까지 여미고 밖으로 나섰다.
그 으스대는 꼴에 세이지는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동생의 머리를 살짝 두드려 준 쥬다스가 백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외투도 발목까지 덮는 맥시 코트였지만 모피가 들어가지 않은 얇은 재질이었다.
환절기에 가볍게 걸치는 용도로 제작된 코트였기에 전혀 과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 허전해 보이는 밋밋한 디자인이었다.
확연히 차이 나는 차림새 때문에 백작과 쥬다스는 겉보기에 마치 다른 계절에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백작도 그 사실을 느끼고 넌지시 그를 향해 물었다.
“겨울이 끝나간다지만 아직 한기가 가시질 않았네. 그 차림으로는 춥지 않겠는가?”
“음, 백작님처럼 멋진 겉옷을 챙겨왔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짐 가방에는 물론 본가의 옷장에도 그리 귀한 모피는 들여놓은 적이 없는 지라……. 그보다 정말 결이 좋은 코트로군요. 참으로 세련되십니다.”
“그야 그렇지. 제법 보는 안목이 있구만? 쉽게 구할 수 없는 한정 상품이라 들었네. 아마 자네가 평생 가도 만져보지 못할지도 모르지.”
“굉장하군요. 백작님 덕분에 제 눈이 호강합니다.”
백작은 띄워주는 말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나중에 구입처를 하나 알려줌세. 귀한 정보니 자네만 알고 있으라고.”
“정말이십니까? 하면 저는 벌써 백작님께 두 번째 은혜를 입는 셈이로군요.”
큰 선심이라도 쓰듯 거들먹거리는 백작을 향해 쥬다스가 잔잔히 웃으며 답했다.
저택을 나서기 직전 2층 계단에 앉아 걸레질하던 칼라와 눈이 마주쳤다.
칼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쥬다스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문을 나섰다.
탁-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칼라는 걸레질하던 걸 멈추고 동료 메이드에게 다가갔다.
“저…… 언니.”
“칼라?”
칼라보다 2년가량 앞서 저택 메이드로 들어온 수잔이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의 메이드는 전부 억울한 사연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사연을 말하지 않았지만 눈치껏 처지를 짐작하고 서로를 챙겼다.
그러한 맥락에서 수잔이 동병상련의 정으로 챙겨주고 있는 막내 메이드가 바로 칼라였다.
처음 저택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어여쁜 소녀였던 칼라는 시간이 갈수록 병든 나무처럼 비실비실 말라갔다.
백작이 내리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려 하고, 시키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 매질을 당하곤 했다.
이러한 와중에 아직 어린 칼라가 한 가지 지킬 수 있었던 건 정절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이젠 백작의 손님으로 온 귀족이 취해간 걸로 보였으니 수잔의 입장에선 여린 꽃잎 같은 칼라가 삶을 비관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다.
수잔은 어린 강아지처럼 떨며 다가온 칼라의 양손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괜찮……. 음, 아니야. 힘들면 좀 쉬고 있으렴. 오늘은 내가 네 몫까지 해놓을게!”
험한 꼴을 당했다고 여겨지는 아이에게 ‘괜찮아?’라는 질문은 독설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수잔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황급히 말을 바꾸어 그녀를 다독였다.
그러자 칼라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언니. 저 사실은…….”
“응?”
칼라는 흔들리는 갈색 눈망울로 수잔을 바라보았다.
지난 밤 울음을 터뜨린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준 후, 쥬다스가 부탁했던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일 레이븐 백작과 함께 이 저택을 비울 것이다. 저택 내에 그가 저지른 악행을 증명할 증거가 있다면 찾아서 내일 밤 내게 전해주면 좋겠구나. 혹은 증거가 될 만한 소문을 모아 알려주어도 괜찮단다.’
‘이 일은 오늘 밤이 지날 때까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주저 말고 내 이름을 대거라. 지금 이 일은 너를 위험에 빠뜨리고자 함이 아니니.’
‘할 수 있겠느냐.’
칼라는 그 말을 들었을 때처럼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땀이 솟은 손으로 꾸욱 주먹 쥐었다.
“……저택 헛간에 가보고 싶어요.”
헛간이라는 단어에 수잔은 사색이 되어 칼라의 어깨를 붙들었다.
“미쳤니―?!”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만 수잔은 핫 입을 다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수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칼라를 끌고 구석진 복도로 데려갔다.
“언니.”
“칼라.”
수잔과 칼라는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칼라의 단호한 갈색 눈동자를 마주한 수잔은 이마를 짚으며 속닥거렸다.
“얘가 진짜 무슨 생각인 거야. 헛간 근처에만 가도 경비들한테 혼쭐이 난다고. 또 매질당하고 싶어?”
“그러니까 언니한테 부탁한 거예요. 저 좀 몰래 헛간에 들여보내줄 수 없을까요?”
“하……. 칼라, 너 정말 죽으려고 그래? 왜, 어제 그 꼴을 당하고 나니 죽고 싶어졌어? 그런 거야?”
칼라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밤새도록 생각해 봤지만 저택 내에서 수상한 곳이라면 역시 뒤뜰에 지어져 있는 헛간밖에 없었다.
나머지 장소는 메이드들이 청소를 비롯한 잔업을 맡으며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1년간 저택 생활을 해본 결과 백작은 치밀한 성격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자신의 비리를 쌓아두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저택에 가려진 헛간 은밀한 곳에 무언가를 감춰두고 경비를 세웠다.
심지어 자신의 처자식마저 헛간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금역.
백작 스스로를 제외하곤 아무도 걸음 할 수 없는 철저한 비공개구역이었다.
수잔은 칼라의 굳건한 의지를 확인하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깟 정조가 뭐라고 그래. 너도 알잖아. 우리 같은 천것들에게 그딴 자존심이 있어서 어쩌게? 일단 살아야지, 칼라. 살아남아야 태어난 의미가 있는 거야.”
“…….”
“알겠어? 우리가 지켜야 할 건 자존심이 아니라 목숨 하나뿐이라고.”
“죽으러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언니. 그럼 언니도 헛간에는 들어가 본 적 없어요?”
“거기 얘긴 이제 하지 마!”
칼라의 집요한 질문에 수잔은 몸서리를 쳤다.
칼라는 그런 수잔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애원하듯 답을 촉구했다.
“들리는 소문 같은 거라도 없을까요? 제발요.”
“…….”
하아, 수잔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허리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잘 몰라. 비 오는 날엔 거기서 처녀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도 있고……. 무서운 괴물을 키운다는 말도 있어.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귀신이나 괴물 따위보다 백작님이야. 그 근처에 얼씬거리다가 걸리면…… 정말 죽을 거야.”
메이드로 들어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칼라는 수잔이 무슨 얘길 하는지 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백작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관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 순진무구한 표정을 확인한 수잔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너는 백작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아직 몰라, 칼라.”
“네……?”
“물론 너도 험한 꼴을 당하고 끌려온 신세라지만 그 정도는 흔한 일이야. 솔직히 여기서 허드렛일하는 메이드들은 전부 죄인 신분이거든. 알잖아, 죄인은 평민보다 못한 천것이라는 거.”
지금껏 칼라는 자신이 겪은 불행을 감당하기만도 벅찼다.
부모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으며 가슴엔 뜨거운 쇳덩어리로 죄인의 낙인이 찍혔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나락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절망했고, 백작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며 매질당하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일했다.
그나마 친동생처럼 챙겨주는 수잔과 다른 메이드들이 없었다면 1년은 고사하고 한 달도 못 버티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너도 사실은 죄인이 아니란 걸 알아. 여기선 다 그래. 우리 집도 골동품을 수집해서 파는 상점이었거든. 근데 어느 날 가짜를 팔았다는 둥 귀족을 능멸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쓰고 쫄딱 망했어. 화가 나서 항의하던 오빠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오빠가 죽는 걸 본 부모님은 홧병에 앓다 돌아가시고…….”
“……우리 집도 그랬어요. 독이 든 와인을 진상했다고.”
“알아, 나 그때 그 자리에 있었어. 그때 독이 들었다던 와인병을 치운 게 나야. 그래서 난 너희 부모님이 죄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
수잔의 말에 칼라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직접 곁에서 아이의 불행을 지켜본 수잔이었기에 더욱 칼라를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칼라의 갈색 눈망울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자 수잔은 그녀를 안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있지. 나도 여기 들어오면서 알게 된 얘기인데, 심지어 몇 년 전에 우리 영지에 귀족 영애가 한 분 방문한 적이 있었대. 귀족 신분으로 왔던 건 아니고, 여행자로 신분을 숨기고 들어왔었다고 해. 그런데 그 영애가 아침이슬 같이 곱고 여신이 현신한 듯 아름다웠대. 그 영애를 본 백작님이 한눈에 반해 첩실로 들이고자 했는데, 가문이 조금 기울긴 했어도 귀족은 귀족이잖아. 백작님의 무례에 화를 벌컥 내고 떠나버렸는데…….”
“……그런데요?”
“그 뒤로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실종된 영애를 찾기 위해 가문에서 수색을 나왔지만 결국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수잔은 그녀를 백작이 죽였다고 생각했다.
“귀족도 해치는데 우린 더 말할 것도 없잖아? 눈에 거슬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
“…….”
“……우린 찾아줄 사람도 없잖니.”
수잔은 씁쓸하게 말을 맺었다.
* * *
한편, 레이븐 영지를 구경시켜 준다며 쥬다스 일행을 데리고 나온 백작은 천천히 말을 몰아 도시 밖으로 향했다.
그들이 지나는 길마다 평민들이 두려움에 떨며 몸을 사리거나 고개를 숙였다.
영주라고는 하나 과한 반응이었다.
왕이 행차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이 조용해졌다.
쥬다스는 비정상적으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태도를 확인하며 백작의 곁에서 말을 몰았다.
“어떤가.”
“…….”
갑작스레 물어온 백작의 말에 쥬다스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모든 이가 백작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잘 보았군. 이 땅이 전부 내 것이니 내게 경배를 돌리는 게 당연하지.”
레이븐 백작은 과시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도시 밖으로 나오자 끝없이 펼쳐진 농원이 보였다.
비탈진 땅과 맑은 개울, 아름다운 자연풍광 속에 과실나무들만 까맣게 말라죽어 있었다.
“쯧.”
백작은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요즘 천것들이 나태해져서 말일세.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놀고먹기만 하니 나무들이 죄 저 꼴이군.”
말라죽은 나무에서 소출이 나지 않자 당장 굶게 생긴 건 농사꾼들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오히려 그들을 비난했다.
“내 저들을 어찌 벌하면 좋겠나?”
“…….”
심지어 쥬다스에게 농민들을 벌 줄 방법까지 묻는 레이븐 백작의 행태에 세이지는 치미는 욕지기를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쥬다스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만일 그들이 나태하여 과실나무를 전부 죽게 만들었다면 벌해 마땅하지요.”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만에 하나.”
고개를 주억거리던 백작은 여상히 이어지는 쥬다스의 말에 멈칫 했다.
“그들에게 원인이 없다면 진짜 원인을 찾아 썩은 뿌리를 뽑아버려야 할 겁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5년사이 아부킹으로 진화한 주인공...(?)
Q. 얼마 차이 안나겠지만 부디 14k이상은 유지해주셨으면 ㅠㅡㅠ
A. 헙 ㅠㅠ 글자수 5천자 기준으로 끊고 있었는데 용량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지신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OTL
현재 99화까지는 이미 교정작업이 끝났기 때문에 용량조절이 불가능하다 하니, 100화 이후로는 최대한 늘려서 가져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ㅠㅠ
Q. 이그레트가 후회를 뜻한다고 했는데 쥬다스는 어떤 뜻인가요?
A. '쥬다스'는 성서에 나오는 '유다'가 어원이 맞습니다.ㅎ 왜 유다를 모티브로 잡았는가에 대해선 2부완결 후기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쿨럭...(...)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칭찬해달라 하셨는데 독자님들께 제가 감히 칭찬은 해드릴 수 없고... 그저 사랑합니다!!ㅠ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