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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서막
“……썩은 뿌리라?”
맑은 금안과 백작의 시퍼런 눈이 마주했다.
“모든 나무에는 뿌리가 여러 갈래 있게 마련이니까요. 어느 뿌리가 썩고 있는지는 직접 땅을 파내봐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백작은 굳은 표정을 풀고 씩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제법 귀족다운 말을 하고 있구먼?”
분명 웃고 있는데도 그 표정이 초봄의 빗줄기처럼 차가웠다.
“참 마음에 드는 친군데 말이야. 한 가지, 처음부터 자네에 대해 거슬리는 게 있더군.”
쥬다스는 태연히 그를 마주 보았다.
정작 주변을 호위하던 에단과 바이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날 선 공기 속에서 백작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게서 뭘 원하나?”
“…….”
레이븐 백작은 욕심이 많은 인간이었지만 그 욕심을 전부 충족시킬 만한 머리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세한 이유까진 알지 못하더라도 쥬다스 일행이 그에게 일부러 접근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백작이 데리고 나온 기사들과 쥬다스의 호위들 사이에 긴장감이 부풀기 시작했다.
“그냥 여행자치곤 자네 동생 태도도 그렇고, 영 석연치가 않단 말이지. 솔직하게 말해보게. 누구의 명을 받고 온 건가?”
백작은 배후가 있나 떠보기까지 했다.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어조에 세이지는 움찔 어깨를 떨었지만 쥬다스의 얼굴엔 긴장감이라곤 없었다.
백작을 가만 마주 보던 쥬다스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내려섰다.
“오해이십니다. 이런, 본의는 아니었으나 제가 무례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본의가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실은 오늘 영지를 둘러본 뒤 천천히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습니다만…….”
다음 그가 취한 행동에 백작의 시퍼런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아, 전하, 제발!’
뭘 그렇게까지 하신 답니까!
지켜보던 바이칼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쥬다스는 백작이 탄 말 앞에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귀족은 귀족들만의 프라이드가 있다.
작위가 낮은 귀족이라고 해서 높은 직분의 귀족에게 쉽사리 머리를 깊이 조아리지는 않는다.
귀족으로 교육받아 자라온 자가 황제의 앞이 아닌 곳에서 허리 숙여 사죄한다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걸 넘어 수치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불명예였다.
“무례를 보임에 사과드립니다.”
“흠흠. 뭐 됐네. 겁을 주려던 건 아니었으니.”
쥬다스가 고개를 들자 백작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게서 얻고 싶은 것이 당최 무엇이길래 그리 뜸을 들이나?”
“뭔가를 얻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넓은 세상을 보고 배우러 온 것이지요. 레이븐에 와서도 백작님 덕에 식견을 많이 넓혔지 않았습니까.”
백작은 말에 올라탄 채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쥬다스를 내려다보았다.
“보시다시피 저나 제 동생은 아직 귀족으로서 경험이 많이 부족합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다른 이의 삶을 지척에서 보게 되면 질투도 나고 거부감이 들기도 하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나를 질투했다?”
듣기에 나쁜 소린 아니었다.
하지만 백작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뱀처럼 훑어보는 눈길이 그들 형제를 번갈아 보았다.
이내 레이븐 백작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일단 다시 말에 오르게. 아직 볼 것이 한참 남았으니 말이야.”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다시 넓은 영토를 돌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 저택으로 돌아온 백작은 거한 만찬을 열었다.
쥬다스가 허영심 가득한 귀족자제 흉내를 내며 곁에서 신명나게 비위를 맞춰준 탓에 기분이 몹시 좋아진 백작은 귀한 와인으로 술상을 벌였다.
“크흐~ 간만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니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구만!”
와인은 금방 동이 났다.
벌써 4병째 새 와인을 개봉한 백작은 취기가 도는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그에 반해 함께 잔을 들고 있는 쥬다스는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멀쩡했다.
물의 정령왕 루니의 가호를 받고 있는 그가 알코올 성분에 취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적당히 취한 척 어울렸다.
술기운에 코끝이 벌게진 레이븐 백작은 끌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도 오늘 봤다시피 이 레이븐에선 내가 왕이야.”
“‘왕’…… 입니까?”
“그래, 왕! 비옥한 땅도 맛좋은 과실도, 여자들도 전부! 내가 손짓하기만 하면 발밑에 우르르 엎어지질 않겠나.”
“멋지군요. 하지만 백작님, 그러다 혹 황제폐하의 법에 걸리시는 거 아닙니까? 저는 그 점이 조금 겁나서 영 찜찜한 것이…….”
“황제폐하? 하하하.”
넌지시 던진 질문에 백작은 피식 비웃었다.
“여기선 황제폐하의 법 같은 건 아무 소용없어. 내가 법이지.”
명백히 황권을 모독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곳에서 그는 정말로 왕이나 다름없었다.
백작은 그 뒤로도 한참을 술을 퍼마시고 자리를 파했다.
그 탓에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일행은 다시 한 방에 모일 수 있었다.
쥬다스와 세이지가 머무는 방에 에단, 바이칼이 찾아왔다.
다른 친위대원들은 명에 따라 대기 중이었으며, 칼라는 콜이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직접 불러오기로 했다.
“아까는 놀랐습니다.”
칼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1인용소파에 툭 걸터앉은 바이칼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유니를 손바닥에 얹고 무언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던 쥬다스가 그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바이칼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하아, 주군께서 그런 백돼지 같은 자에게 고개를 숙이시다니요. 그럴 필요까진 없었잖습니까?”
“아.”
“‘아’가 아니라고요! 차라리 그럴 바엔 그냥 쓸어버리는 편이 낫습니다. 대체 제국의 황……!”
“바이칼.”
그들뿐인 방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정체를 언급하는 건 곤란했다.
에단이 가볍게 제지하자 바이칼은 답답함에 몸부림치며 밤색머리칼을 벅벅 긁어내렸다.
“……아오! 어쨌든, 그런 분께서 그리 쉽게 고개를 숙이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꼭 로한 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쥬다스는 쿡쿡 웃었다.
황궁에서 머무는 동안 그의 수발을 들던 시종 로한은 황실예법이나 황족으로서의 품위 등에 대해 언제나 강조했다.
그 덕분에 황궁 안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품격 있고 완벽한 황태자로서 활동했던 쥬다스였다.
하지만 이번 잠행에선 그동안의 수업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굴었다.
특히 이번 바이칼이 열 내는 사건은 더욱 그랬다.
에단도 이번만큼은 바이칼을 제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직접 수모를 겪으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에단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예, 차라리 명을 내리십시오.”
에단은 창가에 기대서 있던 쥬다스 앞에 무릎 꿇고 검집을 들어올렸다.
에단 R.헤이가는 황태자의 친위기사단장, 즉 쥬다스의 오른팔이었다.
주군의 한마디면 에단은 검을 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에단의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까맣게 빛났다.
그의 결의를 알아본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진 힘을 휘둘러 대우를 받고자했다면 굳이 이렇게 힘들여 나오지도 않았을 게야.”
“하지만.”
“‘직접 보겠다’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 있단다. 에단, 바이칼.”
바이칼은 여전히 찝찝한 표정이었다.
그도 올해 벌써 열아홉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쥬다스는 심통 난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충분히 본 뒤 그에 걸맞은 답을 내리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착취받는 자뿐 아니라 착취하는 자의 입장을 전부 들어보아야 하겠지.”
“……저 정도면 더 볼 것도 없겠던데요, 뭐.”
툴툴거리긴 했어도 바이칼도 현재 레이븐 백작을 대놓고 치기엔 확실히 이렇다 할 증거와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높은 신분을 거머쥔 자일수록, 명명백백 문서화되지 않은 악행은 처벌받기 어렵다.
“혹 답할 수 있겠느냐? 어디까지가 욕심이고, 또 어디까지가 그저 사람 사는 삶인 것인지.”
쥬다스는 두 사람을 향해 한숨처럼 웃었다.
“……나는 아직 그 기준을 모르겠구나.”
청년으로 자라난 두 기사는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침대에 앉아 죽 그들의 대화를 지켜본 세이지도 복잡한 얼굴로 상념에 빠졌다.
‘형님은 내게도 보여주고 싶으신 거야.’
내내 차분했던 쥬다스와 달리 세이지는 오늘 하루 종일 손톱에 가시 박힌 사람처럼 불편한 티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황궁 안에서 배운 세상은 이런 게 아니었다.
비록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고 후회하며 자랐지만, 세이지는 어릴 적부터 올바른 길만 보고 자랐다.
그에게 있어 대놓고 사람을 핍박하며 부정을 저지르는 인물은 레이븐 백작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견디지 못했다.
‘왜 그냥 처벌하지 않으시는 거지?’
백작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치욕마저 감내하는 형을 보며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렇지만 세이지는 자신의 형이 현명한 사람임을 믿었다.
형의 존재로 인해 어머니를 잃었지만, 다시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 것도 형이었다.
유일하게 신뢰하는 자가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세이지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려 노력했다.
‘형님이라면.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야.’
톡, 톡-
그때, 조심조심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칼라를 데리고 온 콜이었다.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방문을 닫고 들어온 칼라가 쭈뼛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저…….”
“늦은 밤중에 불러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귀족이 자신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저런 사소한 이유로 사과를 받다니, 칼라는 분에 넘치는 값비싼 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고?”
자신이 맡은 임무를 보고할 생각에 결연히 이 방을 찾아왔던 칼라로서는 무척이나 당혹스런 질문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갈색 눈망울을 굴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나, 나쁘지는…….”
말끝이 불분명하게 흐려지며 입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나쁘진 않았다? 나도 마침 그리 여기던 참인데, 우린 같은 하루를 보낸 셈이로구나.”
칼라는 멍하니 중절모를 쓴 귀족소년을 올려다보았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적인 대화였는데도 어느덧 떨리던 손끝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핏기가 돌기 시작한 볼에 붉은 혈색이 돌았다.
그녀는 길게 심호흡을 하곤 입을 열었다.
“……저택 뒤뜰에 헛간이 하나 있어요.”
칼라는 낮에 동료 메이드인 수잔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쥬다스는 잠시 침묵했다.
대신 바이칼이 팔짱을 끼며 의문을 제기했다.
“너무 대놓고 수상한데. 그동안 감찰에는 왜 안 걸렸답니까?”
“……저도 잘 모르지만, 관례랬어요.”
“뭐요? 관례?”
바이칼은 황당함에 두 눈을 끔뻑거리다가 다시 그녀의 말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니까, 여기 와서 받을 거 다 받아 처먹고 놀 거 잘 놀고. 그냥 돌아갔다? 그치들이 그걸 관례라고 합디까?”
“네, 네에. 저는 그래서 처음엔 나리들도 그러실 줄 알고…….”
으르렁거리듯 화난 기색에 칼라는 어쩔 줄 몰라 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표지가 바뀐 걸 알아보신 독자님들이 계시네요!ㅎ 출판사선생님으로부터 전달받은 신규표지입니다. 예쁘쥬? (...남주인데 예쁜 게 함정)
크리스티나는 조만간 등장할 예정입니다. 2부에서도 주요인물이니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보여드리겠습니다.ㅎㅎ
(타 연재처와 연재속도를 맞춰야하므로 연속해서 다음 화가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