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98화 (98/252)

0098 / 0240 ----------------------------------------------

12장. 서막

“게다가 평소엔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해서, 거기에 뭐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요. 저기, 사실은 별거 아닐지도 몰라요.”

“이야기해 주어서 고맙다, 칼라. 흠, 그럼 가서 직접 보고 와야겠구나.”

“네?!”

칼라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반문했다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행히도 쥬다스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창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울 뿐이었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세이지도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놀란 건 칼라 혼자였고, 에단과 바이칼은 익숙한 태도로 그들의 뒤에 따라붙었다.

콜이 문을 열어주자 쥬다스는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칼라를 멈칫 돌아보았다.

“같이 가보련?”

“……제가? 저도요?”

“강요하는 건 아니야. 네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면 가는 거고, 크게 관심이 없다면 여기 남아 쉬고 있으면 돼. 부탁했던 일은 아주 잘해내주었다.”

쥬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이건 너의 선택이란다.”

칼라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스르륵 내렸다. 그리곤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라죽어가던 소녀가 조금씩 스스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쥬다스는 그녀의 비상을 응원하며 그 나뭇가지 같은 마른 손을 잡아주었다.

* * *

쥬다스는 즉시 헛간으로 향했다.

에단, 바이칼은 물론 열두 명의 친위기사도 함께였다.

여기에 콜과 세이지, 칼라까지 붙으니 제법 대인원이 되었다.

그들이 헛간 입구에 나타나자 지키고 있던 경비들이 험악하게 창을 겨누었다.

“웬 놈들이냐!”

횃불아래 드러난 쥬다스의 얼굴을 알아본 경비들은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물었다.

“손님분들 아니십니까?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로.”

“안을 좀 살펴도 되겠나.”

“불가합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백작님의 엄명이 있으셨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경비들은 일행을 흉흉한 기세로 경계했다.

‘과연. 헛간을 지키는 경비치고는 과한 감이 있군.’

그들이 몸에 품은 기운을 단숨에 알아본 에단이 조용히 검손잡이를 말아 쥐었다.

무인은 무인을 알아보는 법이다.

특히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은 신체에 영기(靈氣)를 쌓는 이능을 가지게 된다.

쌓인 기운은 몸의 내구력을 높이고 일시적으로 외부로 분출해 무기를 감싸 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한다.

저들이 품은 영기는 일개 경비로 쓰기에는 아까운 능력치였다. 하지만 돌려 말한다면.

‘그만한 실력자들이 지켜야만 하는 중한 장소.’

칼라가 제대로 짚었다는 뜻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 낸 에단은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으음, 하는 수 없지.”

“……?”

쥬다스가 미안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녹색바람이 경비들을 훅 덮쳤다.

꽃향기 가득한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을 감싼다 싶더니 어느 순간 그들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풀썩!

유니가 사용하는 ‘수면의 바람’이었다.

정령왕이 일으킨 강력한 수면 효과에 의해 경비들은 일제히 창을 놓치고 주르륵 쓰러져 잠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쥬다스 일행은 수월히 헛간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끼이익 하는 오래된 문소리와 함께 캄캄한 내부가 펼쳐졌다.

바이칼이 마법구를 띄워 주변을 밝히자 지푸라기로 뒤덮인 바닥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드러났다.

“굉장히 많은…… 와인들이로군요.”

이 헛간은 그야말로 와인 창고였다.

벽을 따라 가득 늘어선 와인 상자, 그리고 말린 블루베리 열매가 가득 들어 있는 부댓자루 등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너무 오래 두어 하얗게 곰팡이가 슬은 것들도 있었다.

먼지가 앉은 와인병을 손가락을 살짝 문질러본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분명, 개인이 쥐고 있기에 지나치게 많은 물량이긴 합니다만.”

“그래. 굳이 이 정도 물건을 그리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는 건 영 앞뒤가 맞지 않는구나.”

쥬다스가 그의 곁에 다가와 동감을 표했다.

친위기사들이 사방으로 퍼져 헛간내부를 샅샅이 수색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친위기사단을 보며 칼라가 잔뜩 긴장한 채 쥬다스의 곁에 아기캥거루처럼 착 붙었다.

그러던 중 바이칼이 달려와 보고했다.

“그 백돼지 놈, 보기보다 꼼꼼한데요? 벽에 마법진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푸대자루를 치워낸 헛간 벽에는 아무런 특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스태프를 꺼내 바닥을 콱 찍은 바이칼이 마력을 재배열하자, 먼지뿐이던 바닥에서 희미하게 빛줄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파앗!

제일 먼저 벽선을 따라 거대한 원이 드러나고, 그 안에 수많은 마법문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마법진의 파훼는 빠르고 정확한 계산력을 필요로 했다.

만일 시간 내에 배열을 완료하지 못한다면 알람이 울릴 것이고, 빨리 계산해 낸다 한들 틀린 부분이 한 군데라도 있다면 역시 파훼에 실패하고 알람마법이 발동하게 된다.

“디스펠 필드(Dispel Field).”

마법 특기로 루바흐를 졸업한 바이칼은 실수 없이 마법진을 제거해 냈다.

마법진이 사라지자 그냥 평범한 벽이었던 곳에 밀어서 열 수 있는 문이 하나 생겼다.

기사 하나가 나서서 손잡이를 잡고 힘껏 밀자 드르륵 돌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박스’군요.”

마력에 의해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검은 상자가 보였다.

익숙한 형태를 곧장 알아본 콜이 품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박스를 꺼내 비교해 보았다.

크기며 색깔, 생김새까지 동일했다.

루바흐에서 훈련용으로 종종 사용하던 박스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보게 된 일행이 황당한 눈으로 이를 쳐다보았다.

“왜 이런 곳에 ‘박스’가?”

바이칼이 중얼거리며 박스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탁!

콜이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눈짓했다.

“발동 중인 박스이외다.”

“허?”

“지금 건드리면 박스에 입장하게 될 거요. 무슨 프로그램이 입력된 박스인지 모르니 일단 조심합시다.”

“엇,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자신의 경솔함을 깨달은 바이칼이 머쓱하게 손을 거두며 감사를 표했다.

콜은 인자하게 미소를 짓고는 박스로 가까이 다가가 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 발짝 뒤에서 이를 지켜본 쥬다스는 박스 위에 떠 있는 입장 인원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6>

저 정체모를 박스에 6명이나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훈련용 박스는 아닌 것 같고. 좀 개조한 것 같소이다.”

“개조라니, 무엇으로요?”

“자세한 건 박스연구소로 가져가거나 직접 입장해 봐야 알 수 있소. 문제는 이대로 발동을 해지하면 입장한 사람들이 무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건데…….”

“……무사하지 못하다는 건 즉 어떻게 된다는 뜻입니까?”

침묵을 지키던 에단이 물었다.

그러자 콜은 제법 길게 기른 수염을 쓸어내리며 질문에 답했다.

“아시다시피 박스는 마력을 이용해 환상의 공간을 보여주는 도구라오. 하지만 박스 내부의 세계가 전부 환상은 아니지요. 지금 저 박스에 입장한 사람들의 육신은 박스 안에 프로그래밍된 아공간에 갇혀 있을 겝니다.”

“그 말은.”

“사람을 먼저 꺼내지 않고 강제로 박스를 해지하게 되면, 그들의 정신에 큰 타격이 올 수 있소이다. 어쩌면 아공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영원히 갇힐지도 모를 일이지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던 칼라가 하얗게 질려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허공에 둥둥 뜬 채 까맣게 빛나고 있는 박스가 지옥에서 올라온 물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겁에 질린 칼라를 누군가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허면 직접 데리고 나오는 수밖에 없겠구나.”

“……!”

“쥬다스 님?!”

깜짝 놀란 콜 대신 바이칼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만류했다.

“어우 좀. 무슨 큰일 날 소릴 하십니까? 방금 설명 들으셨잖습니까. 저거 개조된 박스라 클리어 조건도 명확하지가 않다고요. 그사이에 누가 와서 박스를 해지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는……!”

“부탁한다.”

부드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금안에 바이칼은 억이 막혀 입을 닫고 말았다.

그 안에 깃든 깊은 신뢰에 도저히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황망한 눈으로 주군을 바라보는 바이칼을 제치고 에단이 나섰다.

“……제가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에단.”

“믿어주십시오.”

충직한 기사단장의 요청에 쥬다스는 조용히 웃었다.

“너희를 믿기에 이리 하려는 것이다.”

“하나…….”

“마력에 구애받지 않는 정령의 힘이라면 박스 클리어에 그리 애먹지 않을 게다. 지금은 한시 빨리 저 안의 사람들을 내보내고 일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아니더냐.”

“그럴 수 없습니다.”

에단은 단호하게 거부의사를 표했다.

황태자를 지키는 친위기사단장으로서 당연한 반대였다.

정체 모를 여섯 사람의 목숨보다 쥬다스의 안전이 훨씬 중요했다.

이대로는 날이 밝을 때까지 반대할 기세였기에 쥬다스는 난처하게 턱을 매만졌다.

사실상 이 인원에서 가장 빠르게, 그리고 무사히 박스를 클리어해 낼 사람은 마력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계 4속성 정령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쥬다스뿐이었다.

“흐음. 이거야 원, 내 너희에게 그리도 믿음을 주지 못했던가.”

“……그래서가 아닙니다.”

“그럼 이리하지.”

휘오오-

녹색 바람이 그의 손바닥에 몰려들었다.

그는 하나의 구체를 이룬 바람덩어리를 지니고 있던 작은 정령석에 흘려 넣었다.

투박한 돌처럼 보이던 정령석이 녹색 기운에 물들어 반짝이기 시작했다.

쥬다스는 이를 콜에게 건네주었다.

“‘바람의 인도’를 기록해 둔 정령석입니다. 혹 입장한 지 30분이 지나도록 박스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스승님이 이를 깨뜨리십시오. 그리하면 정령의 부름을 받아 강제로 박스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 스승의 고집을 익히 알고 있던 콜은 빠르게 체념하여 정령석을 받아들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친 쥬다스가 고개를 돌려 에단을 돌아보았다.

“이제 괜찮겠느냐?”

“……어찌 주군께서 제게 허락을 구하십니까. 다만 소신도 동행하도록 하여주십시오.”

“그러자꾸나.”

“아니, 그럼 저도!”

득달같이 끼어든 바이칼이었지만 에단이 칼같이 잘라내었다.

“너는 남아라.”

‘젠장…… 치사한 양반…….’

바이칼은 속으로 툴툴거리긴 했어도 에단의 뜻을 알아들었기에 얌전히 꼬리를 내렸다.

전부 자리를 비우면 위험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박스 밖에 남아 지킬 인원도 필요했다.

하는 수 없이 바이칼은 세이지와 콜, 그리고 나머지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쥬다스와 함께 박스로 들어가는 사람은 에단, 그리고 저택상황을 잘 아는 칼라 둘뿐이었다.

인원정리를 마친 쥬다스는 허공에서 반짝이는 박스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러자 박스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빛으로 그 앞에 마력의 문이 생성되었다.

“그럼, 다녀오마.”

동네 마실 가는 사람처럼 가볍게 인사한 쥬다스가 하얀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에단과 칼라도 박스에 입장했다.

<9>

박스 위에 표기된 인원수가 틱 소리와 함께 변경되었다.

그리고 세 사람을 집어삼킨 하얀 문은 스르륵 공중분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여전히 둥실둥실 떠 있는 검은색 박스뿐이었다.

“……형님.”

세이지가 걱정스런 눈으로 박스를 쳐다보았다.

반면 바이칼은 편한 자세로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뭐, 우린 30분 동안 노가리나 까고 있읍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