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99화 (9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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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서막

“허허, 간단히 육포를 좀 챙겨 왔는데 드시겠소이까?”

“크! 역시 영감님. 센스 좋으시구만.”

그간 쥬다스를 주축으로 왕래가 잦았던 콜과 친위기사단이었다.

친밀해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세이지가 눈을 끔뻑거렸다.

마치 소풍이라도 온 마냥 화기애애했다.

“저…….”

“세이지 님도 육포 같은 거 드십니까?”

“……안 먹어봤는데.”

“흠, 입맛에 맞으실 진 모르겠는데. 이게 시간 죽일 때 씹기 딱입니다. 한번 드셔보십쇼.”

세이지는 얼결에 육포를 건네받았다.

한입 작게 물자 딱딱한 질감과 함께 고소한 참기름 맛이 베어 나왔다.

“……음.”

“먹을 만하죠? 사실 여기에 술이 한 잔 있으면 딱인데.”

“허허허.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잔 같이 나눕시다.”

“거 좋지요!”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세이지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들의 태연함은 결국 형님을 향한 강한 신뢰로구나.’

이제는 이들의 엉뚱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조금씩 관계에 대해 배워가고 있었다.

살짝 감았다 뜬 탁한 금안에 제 형과 같은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언제 처음 만났어요?”

“으엑, 존대하지 마십시오, 세이지 님.”

“맞습니다. 세이지 님까지 그러시면 이 늙은이 제명에 못 갈 것 같단…….”

어쩐지 숨은 사연이 있는 것처럼 콜의 주름진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세이지는 아하하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돌아오세요, 형님.’

힐끗 올려다본 검은 박스는 한밤의 호수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 * *

마력에 휩싸여 박스 안으로 들어온 쥬다스와 에단, 칼라는 검은색 타일로 촘촘하게 이어진 복도에서 눈을 떴다.

박스에 흐르는 마력 탓에 정령들도 모조리 강제적으로 실체화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내부가 워낙 어둡기도 했고,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느라 칼라는 뒤에 나타난 정령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으으. 여긴 올 때마다 기분 나빠. 도무지가 적응을 못하겠다니까?」

「빨리 나가고 싶다요.」

「으응. 그래도 지난번처럼 던전 형태는 아닌 모양이에요.」

카니가 고개를 기울이며 앞을 손짓했다.

등 뒤는 벽으로 막혀 있었고 일직선으로 복도가 이어졌다.

까맣고 매끈거리는 타일들을 따라 이동하니 얼마 가지 않아 철창이 달린 감옥이 나타났다.

“……!”

어둑어둑한 감옥에는 6명의 여자가 갇혀 있었다.

모두 젊고 빼어난 미모를 가진 아리따운 여인들이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텅 빈 눈으로 주저앉아 있던 그녀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들을 보고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묶여 있군요.”

에단이 먼저 철창 너머로 그녀들의 상태를 대략적으로 확인했다.

여자들은 밧줄도 아니고 아주 얇은 명주실 같은 것에 칭칭 묶여 있었다.

그중 유일하게 일행을 향해 눈길을 돌린 금발의 여성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환상이라 여겨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진짜로 낯선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금발 여성의 눈에 차츰 생기가 돌았다.

“누구…… 세요?”

“미리엘 언니?”

“칼라!”

칼라가 아는 사람이었다.

미리엘이라 불린 여인은 아는 사람을 발견하자 급기야 눈물까지 글썽이기 시작했다.

“도우러 왔습니다. 일단 여기서 나간 다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쥬다스의 차분한 안내에 미리엘은 눈물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여성들은 여전히 넋이 나가 가느다란 실에 묶인 채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감옥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걱!

에단이 검을 뽑아 감옥 문을 단숨에 내리긋자 철창이 잘려 나가며 수수깡처럼 전부 반 토막 나버렸다.

그 무시무시한 괴력에 놀란 여인이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 난리가 났는데도 미동조차 없었다.

영혼이 없는 인형처럼 축 늘어진 그녀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핀 칼라가 그나마 정신이 온전한 미리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사람들은 다 왜 이렇게…… 그리고 언니는 여기 왜…….”

칼라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칼라. 일단 그들과 함께 벽에 붙어주려무나.”

“네?”

“지금부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으니.”

양 어깨와 오른손에 각각 정령들을 얹은 쥬다스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의 곁에는 푸른 늑대가 함께였다.

칼라는 이제야 겨우 정령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정령술사셨어?!’

평생 한 번 보기도 어렵다는 정령을, 그것도 넷이나 데리고 있는 모습에 칼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부친이 땅의 정령과 계약했다고는 하나 실체화 능력이 없어 그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황실에서 파견된 감찰. 4속성의 정령술사.’

불현듯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칼라의 머릿속에 한 가지 답이 떠올랐다.

최근 들어 제국을 폭풍처럼 휘몰고 지나간 소문의 주인공.

황태자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칼라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태자님은……. 알려지기론 은발에 금안이라 들었는데.’

금안은 맞았지만 머리색은 흔히 볼 수 있는 갈색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쿵 하고 대지가 흔들렸다.

《경고합니다. ‘마스터 레이븐’의 승인을 받지 않은 침입자는 더 이상 이 박스에 머무실 수 없습니다.》

위잉 위이잉-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를 듣고 무언가 행동을 취할 겨를도 없이 천장에서부터 핏 하고 무언가 날아들었다.

에단이 황급히 검을 들어 막았지만 튕겨 나가지 않고 그대로 녹아내린 사탕처럼 검에 눌어붙었다.

철퍽!

자세히 보니 여인들을 묶어둔 하얀 실과 같았다.

에단은 미간을 좁히며 실뭉치가 날아온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미?’

천장에 매달린 건 보통 거미가 아니었다.

여덟 개의 긴 다리로 감옥 천장을 온통 감싸 안을 정도의 거대한 크기며 검정, 노랑, 연두 삼색으로 알록달록한 줄무늬가 특징인 몬스터.

학자들 사이에서 정식 기재된 명칭은 ‘아라크네(Arachne)’였다.

“키이익.”

아라크네는 네 갈래로 갈라진 입을 꿈틀거리며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동물이 우는 것과 다르게 쉭쉭거리는 소리를 들은 칼라와 미리엘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거미줄에 독이 묻어 있어요! 잘은 몰라도 뭔가 마취제 같은 게……!”

미리엘이 다급히 쥬다스를 향해 소리쳤다.

주변의 다른 여성들이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는 이유가 바로 그들을 칭칭 감은 거미줄 탓이었다.

박스 안에 갇힌 그녀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갉아먹은 건 바로 저 아라크네였다.

아라크네의 거미줄에는 최면 성분이 든 독이 묻어 있었다.

이 독은 시간이 갈수록 감염자의 정신을 마비시켰다.

처음에는 잠시 어지러운 정도에서 그치다가 조금 지나면 환상을 보고, 나중에는 아예 정신을 잃고 인형처럼 변해버린다.

그리되면 죽지도 못하니 박스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영영 사라지는 셈이다.

훈련용 박스를 개조하여 만든 악질적인 감금시설이었다.

그런 패턴 속에 갇힌 여성들은 강제적으로 백작의 노리개가 되었다.

그나마 미리엘은 이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독에 취해 있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던 것이다.

철퍽! 철퍽!

마치 우박처럼 천장에서부터 거미줄 뭉치가 떨어져 내렸다.

처음에는 그저 검으로 내려치던 에단은 자꾸만 검날에 달라붙는 거미줄을 보고 체내에 쌓아둔 영기를 일으켰다.

그가 쥔 검이 우웅 진동하며 붉은색 오러를 일으켰다.

달라붙었던 거미줄이 단숨에 녹아내릴 정도로 검에 홧홧한 열기가 이글거렸다.

아라크네는 몬스터긴 했어도 기본바탕이 거미였기에 온도 변화에 민감했다.

밑에서 급작스럽게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자 천장에 매달려 거미줄을 뱉어내던 아라크네는 다리를 마구 꿈틀대며 밑으로 쿵 떨어졌다.

에단의 오러에 위협을 느끼거나 데미지를 입은 건 아니었다.

“키에에엑!”

바닥에 내려선 아라크네는 찢어지는 소리를 내지르며 포효했다.

사람이 바퀴벌레나 쥐 같은 혐오스러운 동물을 봤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아라크네의 첫 번째 다리가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갈고리처럼 에단을 향해 내리 찍혔다.

쩡!

거미 다리는 제법 단단했다.

그 위로 부숭부숭 돋은 검고 노란 털이 징그럽게 바르륵 떨렸다.

가볍게 공격을 막아낸 에단이 섬광처럼 검을 휘둘렀다.

지켜보던 칼라와 미리엘은 그의 검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지조차 눈으로 쫓지 못할 정도였다.

퍽 하고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라크네의 첫 번째 다리가 부러졌다.

다리가 토막 나자 아라크네는 광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단은 거대 몬스터의 폭주에도 침착하게 검의 궤도를 정돈했다.

웅웅거리는 붉은 오러가 허공에 흩어졌다.

황태자친위기사단 단장이자 제국 제일의 무예가문 헤이가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은 에단에게 있어 아라크네 정도는 그리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딱히 쥬다스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이어지는 에단의 일격에 아라크네는 남은 다리 중 3개에 뜨거운 열상을 입고 미친 듯이 펄떡거렸다.

“키익! 키에! 키이익!”

아라크네는 마치 누군가를 부르듯 짤막한 소리를 여러 번 내질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빠득거리는 수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끼 벌레가 알을 뚫고 나오는 소리였다.

끼이이-

끼르르르-

사방에서 손바닥만 한 새끼 거미들이 기어 나왔다.

먹이를 먹는 족족 사방에 알을 까는 아라크네의 습성을 정확하게 구현해 놓은 박스였다.

새끼라고는 하지만 이빨에 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덩치가 큰 아라크네라면 상대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지만 작고 떼로 몰려오는 새끼 거미들은 에단이 전부 커버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일시적으로 오러를 대량으로 뽑아내어 주변을 태워 버리는 광역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 건지 모체인 아라크네 먼저 처리할지 잠시 판단을 망설이던 에단의 뒤에서 화륵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쥬다스 님.”

그의 뒤에 선 쥬다스가 가볍게 손을 뻗고 있었다.

그 끝에 불의 정령왕 카니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작지만 어여쁜 소녀의 모습을 한 카니가 후후 웃었다.

「으응……. 귀여운 꼬마가 모처럼 활약하는 것도 보고 싶긴 했지만. 시간제한이 있는데 너무 오래 걸리면 곤란하니까요.」

번쩍!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불이라고 지칭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짧은 사이 불길이 거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주변의 적을 한순간에 불태워 남김없이 재로 만들어버리는 ‘화염의 파도’였다.

새끼 거미는 전부 불에 타 사라져 버렸고 모체인 아라크네는 워낙 크고 튼튼한 몬스터였던지라 불이 붙은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화염의 파도’는 순간적으로 적을 훑고 지나가는 불길이지만 마치 바이러스처럼 불씨를 심어놓는 특징이 있었다.

한 번 휩쓸린 적은 설령 물에 들어간다 해도 그 불이 꺼지지 않고 끝까지 몸을 불태운다.

아라크네는 바람 새는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키에에……!”

콰득!

박스 안에 프로그래밍되었을 뿐인 존재지만 숨통이 끊길 때까지는 발악을 멈추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에단은 불붙은 아라크네를 반으로 갈라 확실히 숨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거미는 파사삭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반짝이는 보물 상자가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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