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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서막
카니가 일으킨 불길로 인해 다른 여인들을 칭칭 묶고 있던 거미줄도 함께 녹아 있었다.
아라크네의 프로그램이 해지되자 독기에 취해 있던 여인들은 작게 신음하며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여긴……?”
“허억! 거미, 거미는?”
“꿈이었나?”
너무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여인들은 아직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아직 거미에 대한 공포에 질려 있는 이도 있었다.
보물 상자를 집어 든 쥬다스가 그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물었다.
“자아, 집중. 다들 제 말이 잘 들립니까?”
“……?”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쥬다스는 한 명 한 명 눈을 맞춰 초점을 확인했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으나 다행히도 전부 큰 이상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쥬다스라고 합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많이 놀라셨겠지만 여러분을 도우러 왔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천천히 하겠습니다. 우선 이 박스 안에서 나갑시다.”
“나간다구요?”
“진짜?”
“우리…… 여기서 탈출하는 거야?”
여자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한결 생기가 돌아온 눈빛으로 웅성거리는 그들을 앞에 두고 쥬다스는 보물 상자를 열었다.
지잉-
상자가 열리면서 허공에 박스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하얀 문이 생성되었다.
쥬다스와 에단은 일단 갇혀 있던 여자들부터 문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고 나서 맨 마지막으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이그레트! 아까 콜이란 아이에게 맡겨두었던 ‘바람의 인도’야. 아무래도 바깥에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야.」
유니의 외침과 동시에 쥬다스의 발밑에 녹색 바람이 원을 그리며 몰려들었다.
쥬다스는 당황하지 않고 곧장 에단을 돌아보았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우리가 조금 늦은 모양이다.”
“그 말씀은.”
에단도 바깥 상황을 짐작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보자꾸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쥬다스는 정령의 힘에 의해 박스 밖으로 즉시 인도되었다.
밖에는 먼저 박스에서 빠져나온 여자들이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짧게는 한 달에서 일 년, 가장 오래 갇혀 있었던 자는 삼 년도 넘게 바깥공기를 마셔보지 못했다.
마력으로 분리된 특수공간이라 먹고 마시지 않아도 생명 활동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온몸에 힘이 없어 비실거렸다.
대부분은 장기간 박스를 이용한 부작용으로 어지럼증을 호소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는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들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칼라는 어지럼증으로 쓰러진 미리엘을 부축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탓!
바람에 감싸여 자리에 나타난 쥬다스를 향해 콜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나오시는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기다릴 것을요. 아무래도 더 지체했다간 위험할 것 같아…….”
“예, 그래 보이는군요. 좋은 판단입니다, 스승님.”
쥬다스는 주위를 둘러보곤 빙긋 웃었다.
그의 칭찬에 콜이 멋쩍게 허헛 하고 같이 웃었다.
콰쾅!
그때 밖에서 무언가 크게 폭발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일순 평화로웠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쥬다스는 고개를 돌려 폭발 소리가 들려온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콜이 여전히 깜빡이며 발동 중이던 박스를 해제하여 품 안에 갈무리했다.
쥬다스는 콜과 에단을 대동한 채 헛간 입구로 걸어 나갔다.
“형님!”
세이지가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고작 30분 만에 다시 만난 사이 같지 않게 제법 애틋했다.
바이칼을 비롯한 열둘의 친위기사들은 헛간 밖에서 창칼을 든 병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스태프를 꺼내든 채 마법으로 아군을 보호하는 진을 유지하던 바이칼이 훅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돌아섰다.
“늦으셨습니다, 주군.”
“음, 미안하구나.”
부하의 질책에 순순히 사과하는 상관을 보며 에단이 이마를 짚었다.
대체 저 주종관계의 어딜 먼저 짚어야 좋을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들이 태연스레 행동하자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네놈이었군. 내 이럴 줄 알았지.”
레이븐 백작이 창을 든 병사들 뒤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깊은 새벽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어두운 하늘과 별개로 헛간 주변은 환하게 불이 켜진 상태였다.
사방에서 치켜든 횃불이 뱀의 혀처럼 넘실거렸다.
레이븐 백작은 차가운 눈으로 쥬다스를 응시했다.
“그래, 처음부터 뭔가 뒤가 구리다싶었는데. 혹시나 싶어 박스에 침입자 감시 시스템을 걸어놓길 잘했어.”
“허 참. 구린 건 그쪽이지. 앞이나 뒤나 똑같이 구려서 앞뒤 분간할 필요도 없어서 좋겠네.”
바이칼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답했다.
그 말에 백작은 인상을 굳혔으며 실체화하지 않고 쥬다스의 곁을 지키던 정령들 사이에서 환호성처럼 동조가 터져 나왔다.
「맞아! 앞도 엄청 구려.」
「헤헤~ 너무 대놓고 구리다요.」
「이건 이거대로 보기 드문 인간이에요. 저렇게까지 구리기 힘든데.」
「……근처에 있기만 해도 기분 나쁘군.」
정령의 기준에서도 레이븐 백작의 영혼은 무척 구렸다.
그들의 아우성을 들었더라면 수치스러워했을 테지만 백작에겐 다행히도 정령들의 소리는 쥬다스만 들을 수 있었다.
때문에 쥬다스는 깔깔거리는 유니를 진정시키느라 어색하게 어깨 위를 매만졌다.
“그 부하마저도 건방지군. 일이 이리 되었으니 더 이상 숨길 것 없이 바른 대로 고하게. 누구의 사주를 받고 움직였지?”
레이븐 백작은 섣불리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쥬다스를 향해 물었다.
쥬다스는 그저 물끄러미 그를 마주 볼 뿐 답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의 총책임자는 쥬다스였다.
따로 명령을 받은 게 아니니 답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레이븐 백작은 굳게 입을 다문 쥬다스를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흐, 쓸데없이 끈질기게 구는구먼.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네.”
백작이 척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를 신호로 우르르 몰려온 궁병들이 헛간을 둥글게 포위했다.
그리고 일제히 활에 시위를 겨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말이야.”
원하는 대로 계속 다물게 해주지, 백작이 낮게 웃었다.
사방에서 활을 겨누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쥬다스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는 에단으로부터 벗어두었던 코트를 건네받아 걸치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법으로 지정된 적정량보다 과하게 징수한 세금,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영지민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와 기물들, 그래 놓고도 상부에 보고할 때에는 가난한 민생을 위해 힘쓰느라 자금이 부족하다 청원을 제출하여 구휼금을 타냈다…….”
“뭐?”
“죄인이 아닌 자를 죄인이라 하며 잔혹하게 살해, 그 식솔은 매질해 옥에 가두거나 죄인의 낙인을 찍어 하녀로 삼아 노예처럼 부렸으며.”
“지금 네놈이 무슨 소릴!”
“마음에 드는 여인은 납치 감금하였다. 그중엔 귀족 출신의 여성도 섞여 있었고.”
“뭐, 뭐라. 그걸 어찌―”
샅샅이 드러나는 죄목에 당황하여 입술마저 바르르 떨던 백작은 헛간에서 부축을 받아 나오는 6인의 여인들과 칼라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저년이……!”
서슬 퍼런 기세에 칼라는 불에 데인 듯 놀라 치맛자락을 꾹 붙들었다.
“횡령. 귀족 납치 및 상해. 또한 평민 대상으로라도 날조된 죄인의 낙인과 과한 처벌 행위는 국법에 어긋난다. 이 중 틀린 것이 있는가.”
“뭐라? 이 발칙한 녀석! 네놈이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나보구나.”
백작은 코웃음 치며 들고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눈짓했다.
“국법에 어긋남을 알면 무얼 하나! 보라, 이 땅에선 내가 왕이나 다름없다.”
“…….”
“그리 귀하게 대접해 주었더니 돌아오는 꼬락서니하곤. 어디, 네 아비가 그리 가르쳤더냐? 쯧쯧, 본데없긴.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이죽거리며 혀를 차는 모습에 에단이 검손잡이를 꾹 쥐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쥬다스는 흔들림 없이 백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레이븐 백작은 그 멍청한 모습을 비웃으며 오른손을 내려 신호했다.
피잉!
미리 장전하고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십 개의 화살이 사방에서 동시에 날아들었다.
이제 저 배은망덕한 소년 일행이 벌집이 되어 쓰러질 것이라 여기고 돌아선 백작은 세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우뚝 멈춰서야 했다.
‘응?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활에 맞아 비명을 지르거나 하다못해 빗나간 화살이 헛간에 꽂히는 둔탁한 소리라도 들려야 했다.
하지만 활이 시위를 떠난 것치곤 지나치게 조용했다.
백작의 머릿속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휙 뒤를 돌았다.
값비싼 흑담비 모피 코트가 그의 거친 움직임에 따라 출렁였다.
“뭐야…….”
활을 쏜 궁병들도 제 눈이 잘못된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있었다.
마법진도 시동어도 없었다.
그저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그렇게 수십 개의 화살이 허공에 뜬 채 날아가던 중 정지해 있었다.
백작은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꼈다.
솨아아아-
자세히 보니 녹색 바람이 화살을 전부 감싸 안고 있었다.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연둣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유니의 힘이었다.
“정령?!”
누군가의 놀란 외침에 따라 사병들이 술렁였다.
그냥 정령이 아니었다.
날아오는 화살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은 꽤 정교한 컨트롤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건 사방에서 동시에 날린 화살을 한꺼번에 정지시켰다.
‘적어도 최상급 바람의 힘…….’
백작은 차게 식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더 생각하기도 전에 쥬다스의 곁에서 하나둘씩 실체화하기 시작한 정령들이 눈에 들어왔다.
녹빛으로 빛나는 작은 소녀와 붉은 보석을 이마에 단 소녀, 그리고 황토색으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소년과 물거품이 산개하는 푸른 늑대가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황토색 소년이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 하는 순간이었다.
쿠웅!
헛간을 포위하고 있던 모든 병사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뭐냐!”
“크아악.”
“무, 무거워……!”
비명 소리를 듣자니 자의에 의한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작의 생각처럼 병사들은 모두 토니의 힘에 의해 무거운 중력에 눌리고 있었다.
창과 칼, 활 등 무기를 놓치고 바닥에 엎드린 병사들 사이에서 백작만 홀로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자신의 명령에 반응할 병사가 전부 땅에 무릎 꿇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 서 있는 것도 중력 못지않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백작은 희게 질려 자신을 가만 바라보고 있는 쥬다스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안타까운 자로구나.”
쥬다스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소리가 쿵쿵 귓가에 울리는 착각이 들었다.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너, 너, 너는 도대체 무엇하는 자냐!”
“……아직도 그런 게 궁금한 건가.”
백작으로부터 다섯 걸음 정도를 남기고 멈춰 선 쥬다스는 모자를 벗어 한쪽 팔에 걸쳤다.
스륵-
흔하디흔한 갈색 머리카락이 고결한 은빛으로 뒤덮였다.
그 아래 은은하게 빛나는 금안을 들어 백작을 마주 본 쥬다스가 품에서 옥으로 만든 로드를 꺼내 들었다.
백작은 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무슨 막대 같긴 한데 크기가 작아서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 순간 조그맣던 로드가 순식간에 길어져 곤봉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곤봉을 한 손에 쥔 쥬다스가 이를 백작을 향해 척 겨누었다.
“이 정도면 네 죄를 벌하기 충분한가.”
턱 끝에 닿은 차가운 봉의 감촉에 백작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이를 훑었다.
새하얀 옥으로 조각한 봉의 몸통과 그 위에 뚜렷하게 새겨진 황룡을 알아본 레이븐 백작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루바르잔 제국 귀족이라면 모르려야 몰라볼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황룡쇄……!’
군주를 상징하는 황룡과 이를 파괴한다는 뜻이 담긴 이름, ‘황룡쇄’.
군주를 파괴할 수 있는 건 군주 자신뿐이다.
그 의미를 담아 황제가 후계에게 대대로 내리는 인장이 바로 저 황룡쇄였다.
토니의 힘이 백작에겐 적용되지 않았는데도 그 무릎이 흙바닥에 꿇려졌다.
레이븐 백작은 황망히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황…… 태자 전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황룡쇄의 주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화부턴 '13장. 환향'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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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