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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환향
레이븐 백작은 그 자리에서 즉각 체포당했다.
연락을 받자마자 포탈을 타고 날아온 황실 수사관과 군사들이 뒤처리를 인계받았다.
백작 대신 영지관리를 임시로 맡아줄 대리인이 봉해졌고, 억울한 사연으로 죄인의 낙인을 받은 노역자들은 전부 수사관에게 재검토를 받았으며, 빼앗긴 토지와 재산을 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박스에 납치되었던 여인들은 일단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치료사들을 붙여주었고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연락을 취했다.
그중 작위는 낮지만 엄연한 귀족의 여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경악했고 그로써 백작의 죄질은 훨씬 무거워졌다.
남은 건 까맣게 말라죽은 나무들에 대한 처리뿐이었다.
영지민들은 사악한 영주를 끌어낸 것만으로도 환호했으나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땅과 나무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다.
이대로 올해 과실을 수확하지 못한다면 농민들의 삶은 또 얼마나 비참하게 바뀔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쥬다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처우를 마친 뒤, 칼라를 데리고 그녀의 농장으로 향했다.
친위기사단을 비롯한 모든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사계절이 지난 뒤에야 겨우 부모님과 함께 일궜던 농장으로 돌아온 칼라는 갈색 눈망울 한가득 눈물을 글썽이며 까맣게 말라죽은 나뭇가지를 붙들었다.
“엄마…… 아빠…….”
경사진 토지를 따라 빼곡하게 심어놓은 나무들은 온통 검게 시들어 있었다.
그녀가 어루만지자 나뭇잎이 파삭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손안에서 퍼지는 메마른 감촉에 칼라는 소리 죽여 흐느꼈다.
다신 못 볼 줄 알았던 땅이었다.
더 이상 원수의 밑에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죄인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도 되찾았다.
백작은 저지른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었고, 부모의 억울한 누명도 벗겨냈다.
하지만 칼라는 가슴을 가득 메운 설움에 어깨를 떨었다.
‘전부 꿈같은데. 꿈에서 깨어 다시 눈을 떠보면 예전으로 돌아갈 것만 같은데.’
꿈보다 더 꿈같은 게 그녀의 현실이었다.
슬슬 봄기운을 실은 바람이 살랑살랑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왔다.
말라비틀어진 블루베리나무에는 원래 이맘때쯤이면 푸르른 잎사귀와 꽃 몽우리가 매달릴 시기였다.
‘……허무해.’
텅 빈 가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칼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 허무하기만 했다. 모든 게 해결되었는데도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칼라.”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쥬다스였다.
칼라는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나리, 아니, 태자님. 도와주셔서요.”
평민으로 자라 나무 가꾸는 재주만 키운 칼라가 궁중예법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빼빼 마른 열네 살 소녀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허리를 숙여 쥬다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연두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감사드리…….”
“아직.”
쥬다스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네게 부탁할 일이 하나 남았단다.”
“……네?”
칼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숙였던 허리를 우물쭈물 폈다.
쥬다스가 손바닥을 내밀자 그 위에 작은 황톳빛 정령이 통통 튀는 몸짓으로 내려앉았다.
「그 녀석을 찾아서 여기로 데려오면 된다요?」
“부탁한다, 토니.”
「응요!」
토니는 땅의 힘을 주관하는 정령왕이었으니 본래 땅의 정령이었던 사령을 추적하는 데에 가장 적임이었다.
다만 이미 타락해 버려 사령화가 진행된 정령이었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토니가 땅의 기운을 탐색하는 동안 쥬다스의 어깨에 걸터앉아 있던 유니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치만 이그레트, 그게 통할까?」
“…….”
「원래 땅의 정령이었다던 녀석 말이야. 그 녀석의 계약자는 저 칼라라는 애 아빠였다며.」
「하긴 그래요. 정령의 계약은 술사와의 일대일 관계니까요. 계약자의 딸이라고 해도 그 정령이 과연 좋게 반응해 올지 모르겠어요.」
유니의 의견에 카니도 동조했다.
쥬다스가 지금 하려는 일은 타락한 땅의 정령과 칼라를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로인해 정령이 하는 일을 멈추고 본래대로 돌아올 수 있도록 재계약을 시킨다면, 이 영토에 내려진 저주는 사라진다.
하지만 계약자가 아닌 타인에게는 결코 반응하지 않는 정령의 습성상 그리 현실성 있는 계획은 아니었다.
유니는 다리를 까딱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물론 네가 있으니까 일반적인 상황이랑은 다를 테지만.」
쥬다스에게는 전생에서부터 정령들을 매료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마치 향기가 몹시 달콤한 꽃에 홀리는 벌, 나비처럼 정령이 한 번 그를 만나면 쉽사리 떨어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술사의 자질이 증폭되기 때문에 정령과의 계약, 힘의 발동 등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효과를 발휘했다.
지금은 그러한 그의 고유특성에 기대보는 수밖에 없었다.
「뭣하면 싸워서 물리쳐야지.」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유니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말이 좋아서 ‘물리친다’였지 재계약에 실패한다면 그대로 소멸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토니는 타락한 땅의 정령을 찾아내어 그들의 앞에 강제로 불러왔다.
콰드득
땅이 갈라지며 어른 손바닥만 한 갈색너구리가 퐁 하고 튀어나왔다.
눈코입을 기준으로 정확히 반을 나누어 색깔이 까맣게 물든 상태였다.
반은 까맣고 반은 본래의 갈색 털을 유지하고 있는 너구리는 발발 떨며 토니의 눈치를 살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너구리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형님, 저것도 정령인가요?”
세이지가 너구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일반적인 너구리라고 하기엔 크기가 너무 작았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온몸에서 반짝이는 흙이 부슬부슬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 본래 계약자를 도와 이 땅을 풍요롭게 돌봐주는 일을 하던 정령이란다.”
쥬다스의 설명을 들은 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구리를 바라보았다.
“……아빠의 정령님?”
따로 실체화를 시켜준 계약자가 없어도 모든 사람이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몸의 절반을 물들인 검은 기운 탓이었다.
너구리 외형을 취한 땅의 정령은 죽은 계약자의 마지막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스스로 타락했다.
정령은 나무를 자라게 하고 달콤한 과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돌봐왔던 땅을 저주했다.
한순간에 돌변한 땅의 힘은 그 어떤 나무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모조리 말라 죽였다.
하지만 아직 이 땅의 정령은 완벽히 사령이 된 건 아니었다.
“힘들어 보여요.”
「…….」
칼라는 쥬다스가 시키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너구리의 앞에 쪼그려 앉은 칼라는 검게 물든 반쪽 털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차가워.’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찬 털을 쓸어주며 칼라가 울먹였다.
“이제 그만해 주세요, 정령님. 아빠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
“그르릉.”
너구리 모습을 한 땅의 정령이 불만스럽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스멀거리는 검은 기운이 정령의 몸을 점차 감싸기 시작했다.
「역시 자기 계약자가 아니라 소용이 없나 봐. 저대로 두면 여자애까지 위험해질지도 몰라.」
유니의 경고에도 쥬다스는 그저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정령님, 우리 아빠는요.”
칼라가 정령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이 농장을 정말 사랑하셨어요. 엄마랑, 나랑 함께 묘목을 심고 물을 주고. 나무 하나하나 물을 주느라 무지무지 고생하기도 했지만. 꽃이 피고 열매를 따는 날이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그날은 이제…… 다신 돌아오지 않아.」
땅의 정령이 처음으로 대답했다.
정령은 분노와 절망에 물들어 붉어진 눈으로 칼라를 올려다보았다.
「전부 끝났어.」
“아뇨. 정령님을 직접 눈으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요. 나, 알고 있었어요.”
칼라는 검게 물든 정령을 조심스럽게 품 안에 소중히 끌어안았다.
“……여긴 우리가 다함께 만든 농장이라는 걸요. 그렇죠?”
뚝, 정령의 코 위로 소녀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가슴속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슬픔을 느끼면서도 정령을 위로했다.
‘모든 걸 잃어버린 건 우리 둘 다 같으니까.’
그들이 느끼고 있는 좌절과 슬픔은 동질의 감정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서로의 기분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정령을 토닥였다.
마치 자기 자신을 달래듯이.
「……너의 이름은?」
정령이 본래 계약했던 아버지와는 다르지만, 분명 그를 닮아 있는 맑은 영혼이었다.
정령의 반쪽을 물들이고 있던 검은 사기가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와 정령을 지켜보며 쥬다스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칼라. 칼라라고 해요.”
「칼라. 내 ‘이름’을 지어다오.」
정령과 술사 사이에서 이름이란 서로를 구속하는 단어였다.
계약을 맺은 정령은 술사가 지어준 이름에 무조건 반응하게 되어 있었다.
너구리처럼 생긴 땅의 정령은 이미 죽어 계약이 끊겨 버린 이전 계약자 대신 칼라를 새 계약자로 지정했다.
그를 안아 들고 일어선 칼라가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게브’.”
땅을 다스리는 동화 속 요정의 이름이었다.
새 이름을 받아 칼라와 계약하게 된 땅의 정령은 그대로 너구리 외형을 유지했다.
새로운 계약자인 칼라가 그 형태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스스슷-
계약이 이루어지면서 칼라의 소망대로 땅에 뿌리박힌 저주가 거두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검은 아지랑이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장하구나, 칼라.”
“게브가 제 얘기를 들어주었을 뿐인걸요…….”
그리 말하면서 칼라는 품안에 있는 게브를 꼭 껴안았다.
“혼자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게브가 있어줘서 다행이에요.”
“다시 보거라.”
“……?”
칼라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이자 쥬다스는 그녀의 뒤쪽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 손짓을 따라 천천히 돌아선 칼라는 숨을 흡 들이켰다.
“보렴.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란다.”
흰 꽃망울 하나가 칼라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까맣게 말라죽었던 나무들이 옛 모습을 되찾아 무럭무럭 가지를 뻗고 있었다.
푸르른 잎사귀를 따라 은방울 같은 동글동글한 하얀 꽃망울이 셀 수 없을 만큼 피어올랐다.
하얀색 꽃의 파도가 바람결을 따라 눈부시게 너울졌다.
“아아…….”
완전히 되살아나 꽃을 한가득 피운 나무들을 한 바퀴 빙 둘러본 칼라의 볼 위로 멈췄던 눈물이 다시 뜨겁게 흐르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그제야 텅 비어 있던 가슴속에 희망이란 꽃이 활짝 피었다.
* * *
세이지는 말을 몰다 말고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비탈진 언덕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진 하얀 물결이 바람에 따라 이쪽저쪽 잔물결을 일으켰다.
마치 백사장에서 반짝이는 모래알처럼 수없이 많은 꽃들이 빛나고 있었다.
봄이 지나 저 꽃이 전부 지면, 그 자리에 달콤한 열매가 열리게 될 것이다.
그 장면을 상상한 세이지가 멍하니 뒤를 돌아본 채로 말을 몰자, 그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쥬다스가 세이지를 불렀다.
“세이지, 앞을 보면서 가거라. 그러다 혹 다칠까 걱정되는구나.”
“아. 네, 네! 형님.”
부드러운 충고에 세이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말을 타면서 딴 생각을 하는 건 확실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초보적인 실수를 범한 세이지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동생의 민망해하는 기색을 읽은 쥬다스가 곁에서 말을 몰며 넌지시 물었다.
“이번 일이 네게 있어 제법 놀랄 일이었던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번 화부터는 '13장. 환향'이 진행됩니다.ㅎ
오늘도 재밌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