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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환향
“정말 여러 가지로요. 저런 이름뿐인 귀족이 있었을 줄이야.”
“흠.”
쥬다스가 알기로는 귀족 중엔 레이븐 백작과 비슷한 부류가 많았다.
타인을 손쉽게 절망에 빠뜨리고 그 절망을 비웃는 자들은 전생에 수도 없이 마주쳤다.
분명 그 이상으로 악독한 자도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심지어 세이지를 황태자로 옹립하려다 실패하고 싹 돌아서서 그의 몰락을 외면한 귀족들도 그들과 비슷한 부류였다.
5년간 침묵의 궁에 유폐되어 쥬다스를 제외하곤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었던 세이지로서는 그들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실상이 그랬다.
하지만 이미 많은 충격을 받은 세이지 앞에서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까진 없었다.
귀족이라 해서 전부 그런 것도 아니었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지키려 노력하는 이도 세상엔 많았다.
그의 배려하에 딱히 말이 이어지지 않자 세이지는 금방 다른 쪽에 관심을 갖고 화두를 던졌다.
“그러고 보면 사령이란 것들도 본래는 정령이었군요…….”
쥬다스는 실체화하지 않은 채 자신의 곁을 따라다니는 네 정령을 가만히 눈으로 훑었다.
그의 시선을 받자 정령들은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래.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실제로 눈앞에서 사령화되어가는 정령을 만난 건 나도 처음이란다.”
“정령이란 마냥 순수하고 초월적인 존재일 거라 생각했는데.”
문득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는 세이지를 보며 쥬다스가 작게 웃었다.
“하하, 그랬더냐. 하면 이제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게야?”
“……그런 존재들이 고작 인간의 소망 하나 때문에 타락하다니요. 이해가 잘 가지 않아요.”
“고작 인간의 소망 하나라.”
쥬다스는 동생이 한 말을 나직하게 따라 읊조렸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정령과 술사는 영혼으로 이어진 계약 관계란다. 정령은 세상의 그 어떤 법칙보다 계약자의 소망을 우선시하려 하지. 사령이 된다는 건 어쩌면 그들이 너무나도 순수하게 계약자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랑이요?”
“으음, 꼭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사랑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알을 품는 새나 어미를 따르는 어린 고양이처럼. 정령술사란 계약한 정령에게 있어 세상의 중심이 되어주는 거란다.”
세이지는 신기한 눈으로 헤에 입을 벌렸다.
지금 눈에 보이진 않아도 분명 형님의 주변에는 4속성의 정령이 함께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정말로 알을 품는 새처럼 그를 감싸고 있는 정령들을 상상한 세이지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형님에게 있어서 정령들은 어떤 존재예요?”
“으응? 글쎄…….”
딱히 구분해서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었다.
정령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곁에 있었다.
심지어 전생의 ‘이그레트’가 계약을 맺기 이전,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눈밭에 버려졌던 그 순간에조차 정령들은 주변을 맴돌았다.
말하는 법을 배우기 전부터 이미 정령을 알고 있었다.
「이그레트.」
대화를 듣고 있던 정령들은 그를 이해한다는 뜻에서 방실방실 웃었다.
쥬다스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단순명료한 답을 내놓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이란다.”
까르르-
정령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그를 감쌌다.
일행은 그 뒤로도 나흘 밤낮을 줄곧 이동했다.
드넓은 농장지대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자 울퉁불퉁한 산맥이 나타났다.
눈과 겨울 낙엽이 쌓인 퍼석퍼석한 산길을 올라 제법 높은 산줄기를 몇 개 넘다 보니 어느덧 눈앞에 광활한 평야가 펼쳐졌다.
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였다.
쥬다스 일행은 풀밭에 말을 세우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여기부터가 델피아 공작령입니다.”
에단이 분지 밑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산길 아래는 자그마한 마을이 하나 보였다.
“이 길을 따라 죽 내려가면 델피아 성이 있는 시엘해안과 만나게 됩니다.”
나흘간 이어진 강행군에 기사가 아닌 일반인 그룹은 제법 지쳐 있었다.
같은 기사단원에 속했지만 마법기사인 바이칼도 마찬가지였다.
늦겨울과 초봄 사이에 있는 애매한 날씨 속에서 학자용 로브를 두른 바이칼은 후드 단추를 푸르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으, 말을 탈 땐 후드를 쓰니까 더워죽겠습니다. 겨울 날씨에 맞춰 보온력 짱짱한 로브를 고른 건데 생각보다 날이 빨리 풀리네요.”
“벗고 타라.”
“……아직 그랬다간 얼어 죽지 말입니다, 단장.”
에단의 심플한 충고에 바이칼이 표정을 팍 구겼다.
“아무튼 시엘해안 쪽으로 내려가면 성에서 요즘 날씨에 입을 만한 로브 한 벌 구해야겠습니다. 이러다 땀띠로 사망할 것 같네요.”
“땀띠로는 죽지 않으니 걱정 마라.”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옷이 입으면 덥고 벗으면 춥고! 완전 환장할 노릇이라.”
“나약하군. 그 정도도 버티기 어렵나. 마법기사라지만 체력 훈련을 게을리하진 말도록.”
“……하, 지금 저 복창 터져서 죽으라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 맞죠?”
“눈치가 빠른 점은 합격.”
피워놓은 모닥불 앞에 앉아 두 사람의 공방을 구경하던 쥬다스는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때 유니가 포록 날아올라 모닥불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사람이 없는 분지라 모습을 드러낸 채 반짝이는 바람의 정령을 향해 모두가 눈을 모았다.
「근처에 사람들이 오고 있어.」
유니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기 아랫마을 주민들이래. 근데, 어음, 다들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같아.」
“…….”
녹색 빛의 정령을 손바닥에 얹은 쥬다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함께 휴식하던 전원이 우르르 일어서며 모닥불과 늘어놓은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틈에 유니를 곁눈질한 바이칼이 슬쩍 물어왔다.
“크흠, 무슨 일이십니까? 혹 주변에 누가 온답니까?”
“음? 정말로 눈치가 빠르구나, 바이칼. 과연 에단에게서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주군까지 이러시깁니까.”
차마 쥬다스에겐 툴툴대지 못하고 시무룩해진 바이칼이었다.
농을 건 쥬다스는 작게 웃고는 말에 올랐다.
“근처에 아랫마을 사람들이 올라온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 상태가 영 좋지 않다 하니, 한번 살필 필요가 있겠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빠릿하게 대답한 바이칼도 자신의 말을 찾아 뛰어갔다.
대열이 갖춰지자 일행은 분지를 떠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니의 정보대로 얼마 가지 않아 힘들게 언덕을 올라오던 마을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특별히 상처를 입었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몰골은 한눈에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였다.
하나같이 눈이 퀭하게 패였으며 피부가 푸석푸석하게 말라 있었다.
손을 덜덜 떨거나 두통을 호소하는 신음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렸다.
쥬다스 일행과 마주친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더니 정신없이 다가와 한 가지를 갈구했다.
“물……! 물 좀 주시오……!”
마을 사람들은 전부 탈수에 시달리고 있었다.
목소리마저 가뭄의 논밭처럼 쩍쩍 갈라졌다.
“제발, 여행자 나리들, 물 좀 나누어 주시오.”
“부탁드려요. 아이에게만이라도.”
아직 어린 아기를 품에 안은 여인도 앞으로 나서서 빌었다.
쥬다스는 말에서 내리며 루니를 실체화시켰다.
포옹!
물거품을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낸 푸른 늑대는 마을 사람들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갑자기 나타난 늑대의 형상에 놀란 사람들이 숨을 집어삼키며 돌덩이처럼 제자리에 굳었다.
“맙소사. 허공에서 늑대가?!”
쥬다스는 더 소란이 일기 전에 그들을 진정시켰다.
“이 아이는 제가 다루는 물의 정령이니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져온 양동이를 주시면 그곳에 물을 채워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마침 물을 기르러 가던 참인 듯 그나마 힘 좋은 장정들이 커다란 양동이를 이고 지고 있었다.
정령이란 말에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사람들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양동이를 앞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늑대에 물려죽는 것보다 목이 말라 죽는 게 더욱 두려웠다.
“루니.”
「알았다.」
계약자의 소망을 읽어낸 푸른 늑대가 가볍게 대꾸했다.
늑대의 이마에 달린 푸른 보석이 은은하게 일렁이더니, 곧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
“물이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텅 비어 있던 양동이들이 깨끗한 물로 가득 채워진 것이다.
물을 먹지 못해 죽어가던 사람들은 양동이에 달라붙어 허겁지겁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갓 생성해 낸 물은 맑고 청량했다.
아무리 마셔도 양동이의 물은 줄어들지 않았다.
지하수를 끌어오는 샘물처럼 마셔도 줄지 않고 퐁퐁 솟아오르는 물 덕에 죽어가던 사람들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가, 물이야. 한 모금만 마셔 보렴. 응? 아가야.”
쥬다스는 살았다는 기쁨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사람들 틈에서 여전히 절박한 목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한 여인이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 되어 보이는 어린 아기를 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아기들은 탈수나 영양실조 등 어른이라면 며칠 거뜬히 견뎌낼 만한 증상에도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되곤 했다.
여인이 안고 있는 아기도 마찬가지로 지독한 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여인은 손으로 물을 떠 아이 입술이라도 적셔 주며 정신을 들게 하고자 노력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에 쥬다스는 천천히 그 앞에 꿇어앉았다.
“시엘, 내 아가야. 제발.”
“잠시 아이를 봐도 괜찮겠습니까.”
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모르던 여인은 그제야 쥬다스가 가까이 온 사실을 알고 멍하니 그를 돌아보았다.
시야 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마저 바닥에 꿇은 쥬다스의 맑은 금안을 마주한 여인은 안고 있던 아기를 천천히 보여주었다.
수분 부족으로 정신을 잃은 아기는 물을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입가에 질질 흘리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억지로 먹인 물이 기도로 넘어가지 않고 도로 흘러나온 게 다행이었다.
쥬다스는 아기의 이마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릉.
곁에 앉아 꼬리를 한 번 살랑거린 루니가 기꺼이 그에게 힘을 빌려주었다.
쥬다스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간 정령의 힘이 수분 부족으로 망가져 있던 아기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푸석하던 아기의 피부가 제 나이에 맞게끔 뽀송뽀송 보드라워졌다.
늘어졌던 팔다리에 힘이 돌아왔고, 낯빛도 밝아졌다.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기 시작하자 아기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아기는 쥬다스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꺄아.”
“세상에, 시엘!”
“아우!”
건강을 되찾은 아기의 모습에 여인은 쥬다스에게 하염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령술사님.”
“……형님.”
세이지가 다가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에단과 바이칼, 콜도 함께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명하신 대로 전원 물을 마시고 휴식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저들이 기운을 차릴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자꾸나.”
“옙!”
뜻하지 않게 오늘의 두 번째 휴식을 취하게 된 바이칼은 기분 좋게 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에단이 못 말린다는 뜻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기 엄마를 자리가 깔린 휴식터에 앉히고 나서 그들도 그 반대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쉬었다.
이젠 제법 익숙하게 바닥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은 세이지가 마을 사람들을 눈짓하며 말했다.
“근데 형님. 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상한 이야기?”
“저 사람들이요. 이 길을 따라 죽 올라가면 분지 너머에 커다란 호수가 하나 있대요. 마을에 분명 식수대가 설치되어 있고 큰 호수까지 있는데 왜 물을 마시지 못하냐고 물어보니까…….”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연재속도를 맞추기 위해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