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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환향
겨울호수가 용암처럼 끓고 있는 섬뜩한 광경을 보고 굳어진 일행 사이에서 유일하게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던 쥬다스가 예고도 없이 성큼성큼 호수로 다가갔다.
“……쥬다스 님!”
놀란 에단이 그를 막으려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파앗-
허공에서 물거품을 이리저리 흩뿌리며 나타난 푸른 늑대가 끓는 호수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우아하게 뻗은 다리가 수면을 딛자 이를 기준으로 둥글게 파장이 일어나며 푸른 기운이 호수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맹렬히 끓던 호수 물이 삽시간에 잔잔해졌다.
지켜보던 이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답고도 신비스런 모습이었다.
에단은 뛰쳐나가려던 자세를 바로 하고 쥬다스가 다루는 정령을 차분히 응시했다.
고요해진 호수를 딛고 선 물의 왕은 고개를 내려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그 안을 확인했다.
「블루와이번(Blue Wyvern)이로군.」
루니는 단숨에 호수 깊숙이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존재를 꿰뚫어 보았다.
와이번이란 드래곤과 생김새가 닮았지만 그 능력치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몬스터였다.
우선 현존하는 모든 생물체보다 고등한 지능을 지녔다는 드래곤에 비해 와이번은 심지어 인간보다도 지능이 훨씬 떨어졌다.
언어를 익힐 줄 모르고 이성보다는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니 용언은 당연히 사용할 수 없었고 복잡한 수식이 필요한 마법도 할 줄 몰랐다.
그렇지만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하급 몬스터는 아니었다.
드래곤과 비교했을 때 뒤떨어질 뿐, 와이번 한 마리의 전투력은 웬만큼 훈련받은 이능력자라 해도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그 무리는 여러 가지 속성으로 나뉘었다.
와이번은 폭탄도 뚫지 못하는 튼튼한 비늘과 땅을 가르는 괴력, 이에 더해 브레스를 포함한 속성별 고유능력을 가졌다.
블루와이번은 수(水) 속성이다.
물이 있는 곳에서만 살고 따뜻한 기온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어 철새처럼 서식지를 옮겨 다닌다.
정령처럼 물을 생성해 내거나 자유자재로 다루지는 못하지만 지금처럼 물길을 막아버리는 정도는 가능했다.
물론 정령들의 입장에선 수공예 전문가가 이제 막 종이접기를 배운 어린아이를 구경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루니가 끓고 있던 물을 조절하여 차가운 겨울호수로 되돌려 버리자, 성난 블루와이번이 물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촤아악!
콰르릉 대지가 울리며 지진이라도 나듯 산 전체가 흔들렸다.
호수에서 튀어나온 블루와이번은 몸집이 플라타너스 나무보다도 컸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비늘 위로 뾰족한 뿔과 아가미 등이 꿈틀거렸다.
꼬리는 몸통보다 두 배는 길었는데 길게 늘어진 꼬리를 죽 잇는다면 호수를 한 바퀴 감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놈이 거대한 두 날개를 활짝 펼치자 물기를 담은 바람이 주변으로 후욱 일어났다.
“진짜 드래곤……!”
세이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함께 지켜보던 콜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허허, 닮았지만 아닙니다. 크기나 생김새를 보아 아마도.”
“아마도 뭐랍니까?”
말끝을 흐리자 바이칼이 불쑥 끼어들어 재촉했다.
“와이번이 아닐까 싶소이다.”
“와이번?”
“거참, 신룡이라더니 결국 주는 밥 먹고 오동하게 잘 커가는 몬스터였군요.”
바이칼은 스태프로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대꾸했다.
드래곤만큼은 아니더라도 같은 용 계열 몬스터였기에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그들은 각자 무기를 고쳐 잡으며 쥬다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캬르르르.”
와이번이 입을 벌려 톱날같이 촘촘한 이빨을 내보였다.
놈은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중에 찾아온 불청객들에게 무척 화가 난 상태였다.
긴 꼬리를 휘저어 물보라를 일으킨 와이번은 구토라도 하듯이 그륵거리기 시작했다.
그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아본 콜이 불의 정령을 불러내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때를 같이하여 와이번이 주둥이를 쩍 벌리고 브레스를 뿜었다.
불길이 회오리치며 일직선으로 토해졌다.
와이번의 브레스는 몸속에 품고 있는 화기를 배출하는 형태였다.
동화 속에 나오는 ‘불 뿜는 용’, ‘기사가 물리치는 악룡’ 등으로 표현되는 건 대부분 와이번이 모델이었다.
와이번이 뿜어낸 불길은 콜의 정령에게 가로막혀 허공으로 분수처럼 솟구쳤다.
막아내긴 했지만 그 열기가 주변을 후끈하게 달구었다.
마치 가까이서 폭죽놀이를 구경하듯이 일행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가 졌다.
“캬아아아!”
침입자를 불태우는 데에 실패한 와이번은 더욱 분노하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호수물이 파도처럼 뭍으로 넘쳐흐르고 긴 꼬리에 맞아 부러진 나무들이 우르르 바닥에 쓰러졌다.
주변을 한 바퀴 휩쓴 와이번의 꼬리가 이번엔 쥬다스 일행 쪽으로 날아들었다.
에단이 검을 뽑아 들고 놈의 꼬리를 쳐 냈다.
꽝 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과 꼬리가 맞부딪혔다.
“……!”
오로지 힘으로 받아치긴 했으나 검신이 견디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에단이 들고 있던 게 집안에서 물려받은 명검이 아니었다면 아마 산산조각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단은 이를 힐끗 내려다보곤 붉은 오러를 일으켰다.
“바이칼, 지원.”
“그 정도는 시키지 않아도 한다고요!”
투덜거리면서도 바이칼의 스태프 끝에는 별빛 같은 마력입자가 모여들고 있었다.
시동어와 함께 허공에 빛나는 화살이 일곱 개 생겨났다.
다시 매섭게 날아오는 와이번의 꼬리를 향해 에단이 단숨에 달려들었다.
조금 전과 달리 오러에 휩싸인 검은 충격을 흡수하는 건 물론이고 단단한 비늘에 길게 흠집을 내는 데에 성공했다.
놀란 와이번이 꼬리를 물리는 순간 바이칼의 지원사격이 이어졌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화살들이 일제히 와이번에게로 내리꽂혔다.
워낙 비늘이 단단하여 큰 타격은 입히지 못했지만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꼬리가 주춤했다.
놈은 그나마 물 밖으로는 나오려 하지 않았다.
거리가 멀어지면 브레스를 뿜었고 가까이 다가올 때만 꼬리를 휘저어 공격을 가할 뿐 계속 호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와이번의 공격패턴을 파악한 에단이 다시 검을 회수하여 제대로 일격을 가하려던 순간이었다.
“기다려 보거라, 에단.”
“……예.”
부드럽게 그를 제지한 쥬다스가 루니를 불렀다.
“아무래도 우리가 제 보금자리를 찾아와 화가 난 모양이야. 일단 진정시키자꾸나.”
「알겠다.」
여전히 호수 위에 고고히 서 있던 푸른 늑대는 가볍게 톡 발을 굴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까득, 꽈드득!
수분이 응고하여 얼어붙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 깜짝할 새 호수 전체가 꽁꽁 얼어붙어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바뀌어 버렸다.
그 한가운데에는 조각상처럼 끼어버린 와이번이 있었다.
다리 아래부터는 완전히 얼음 속에 파묻혀 옴짝달싹 못하게 된 와이번은 몸부림치다 쿵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와이번은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자 당황하여 낑낑 강아지 울 듯 울었다.
와이번의 움직임이 봉쇄되자 쥬다스가 단단하게 얼어붙은 호수 위로 천천히 걸어갔다.
끙끙대던 와이번은 주홍빛 눈알을 번뜩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캬르르!”
사납게 이빨을 드러낸 순간, 루니가 와이번의 머리를 앞발로 텁 내리눌렀다.
푸른 늑대의 콧잔등에 험악스레 주름이 잡혔다.
「감히 누구한테 건방을.」
“……끼잉.”
와이번은 물의 정령왕의 기세에 눌려 힘없이 코로 울었다.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들은 쥬다스가 넌지시 물었다.
“그래, 무리지어 산다는 와이번이 어찌 이런 호수에 홀로 남아 울고 있는 것이냐?”
“푸흥.”
와이번은 하얀 콧김을 뿜으며 루니의 눈치를 살폈다.
물의 정령왕인 루니는 생물의 내면적인 세계를 엿보는 것도 가능했기에 와이번의 기억을 대략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단체이동 중에 낙오되었다는군.」
「이그레트, 얘 아직 어린애야.」
유니가 와이번의 주변을 빙글 돌았다.
와이번도 용 계열인 만큼 특별한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평균수명이 400년 정도로 무척 길었다.
그리고 그중 100년가량을 성장기로 소모했다.
지금 이 호수에 살고 있는 블루와이번은 이제 겨우 성장기를 마치고 성체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어린 와이번이었다.
「막 알을 깨고 나왔을 때쯤 철이 바뀌어 서식지 이동이 시작되었다는군. 이 호수를 지나던 중 어미와이번이 실수로 놓친 모양이고. 너무 어린 시기에 무리와 떨어져 날갯짓도 배우지 못해 호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얼라료? 그동안 왜 떨어뜨린 어미가 찾아오지 않았다요?」
토니의 물음에 대답한 건 카니였다.
「무리 생활을 하는 종족은 낙오자를 챙기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설령 자기 새끼라고 해도 예외는 없죠.」
「우와앙, 유니보다 더 매정하다요!」
「……이게 진짜. 가만있는 나는 왜 걸고 넘어져?」
찌릿 노려보는 눈길에 토니는 찔끔하여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정령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쥬다스는 와이번의 주둥이를 살며시 쓸어주었다.
“배가 고팠던 게로구나.”
“…….”
블루와이번의 구슬 같은 주홍색 눈동자가 스르륵 쥬다스를 향했다.
놈은 더 이상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넘어진 채로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사람들이 보기엔 크고 무서운 괴수였지만 사실 성장기가 끝난 와이번치고는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블루와이번은 본래 에너지원으로 물을 흡수한다.
충분한 물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때부터 성질이 포악해지며 육식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와이번은 갓 태어난 새끼 때 호수로 떨어져 근처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룡이라 떠받들어졌다.
처음엔 산맥을 타고 흐르는 물을 흡수했지만 이로 인해 물길이 마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신룡이 노했다며 제물을 바쳤다.
그들이 제물로 가져오는 고기로 배를 채워 버릇한 와이번은 완전히 입맛이 길들여져 물을 흡수하는 대신 고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동물원에서 사육되는 사자처럼 사람들에게 길들여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와이번이 먹을 수 있는 고기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고, 놈은 그동안 성장기를 거쳐 점점 덩치가 커졌다.
「그니까 결국 땡깡을 부리고 있었단 소리지?」
「……아마도.」
이 블루와이번은 늘 배가 고팠다.
딴에는 사람들이 먹이를 가져다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며 참아왔지만 몸집이 커진 지금은 도저히 배고픔을 참기가 힘들었다.
아쉬운 대로 물을 흡수하여 배고픔을 달래다 보니 산맥에 물이 마르기 시작했고 그도 모자라 먹이를 달라며 떼를 쓰고 있던 셈이다.
쥬다스로부터 사정을 전해 들은 일행은 축 늘어진 와이번을 둘러싸고 회의를 열었다.
“여기 길 따라 쭉 내려가면 해안이 나온다면서요. 차라리 바다로 보내주는 게 어떻습니까?”
“……길 따라 내려간다는 게 얼마나 가야 하는지 알고 하는 소린가. 말을 타고도 사흘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으음, 날지도 못한다니 이동하는 방법도 문제예요. 와이번이 걸어서 해안까지 갈 수 있을까요?”
바이칼, 에단, 세이지 순으로 말을 주고받았지만 영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기에 콜이 한마디 더했다.
“바다로 간다한들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고 보오. 백 년 넘게 인간이 주는 먹이를 먹고 호수에서만 자라온 녀석인데 홀로 바다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요.”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면 와이번에게나 산골 주민들에게 서로 악영향을 끼칠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헉,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요즘 날씨가 무척 춥던데 독자님들 모두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저는 오늘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람으로부터 파워싸다구를...;; 순간 이그레트가 무진장 부러웠습니다. 유니를 데리고 있으면 바람한테 싸다구 맞을 일은 없겠지...(...)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늘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