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06화 (10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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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환향

델피아 공작령.

시엘 해안의 절벽을 따라 지어진 요새 형태의 성이 바위산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철갑을 두른 듯 두텁고 빽빽한 하얀 바윗돌을 쌓아 굳건한 성벽을 이루었다.

성벽은 두꺼울 뿐 아니라 높기까지 하여 바다를 통해서는 절대로 진입할 수 없는 구조였다.

험준한 산맥과 깊은 바다 사이에 위치한 델피아 성은 멀리서 보면 하늘 위를 떠가는 부유섬으로도 보였다.

사실은 깊은 해저에서부터 뻗어 나간 거대한 절벽바위 위에 지어진 성지만 구름과 맞닿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었기에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는 하얀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 철썩대며 부서져 내렸다.

거대한 성벽에 감싸인 성내엔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었다.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다듬어진 색색의 돌로 길을 만들고 집집마다 화사한 단색으로 칠했다.

파란 집, 노란 집, 빨간 집 등 그림동화책 속의 한 장면처럼 알록달록한 집들이 늘어섰다.

그리고 그중 제일 높은 중앙에는 공작이 살고 있는 대저택이 위치해 있었다.

쾅!

저택 안에서 흉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책상을 내려친 공작 후계, 알시오스 C.델피아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안 돼.”

“오라버니.”

“크리스틴.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분노에 겨워 활활 타는 듯한 시선 끝엔 올해로 19살이 된 크리스티나가 서 있었다.

허리께까지 길게 굽이치는 머리카락은 보는 각도에 따라 연한 하늘색에서부터 청록색까지 색을 달리 하는 바닷빛이었다.

정수리는 하늘색을 연상시키는 푸름이었지만 밑으로 내려갈수록 짙은 청록색을 띠었다.

어릴 적에도 조각품처럼 예뻤던 그녀였지만 성인식을 마친 지금은 갓 피어난 꽃잎처럼 곱고 청초했다.

보통 여자들에 비해 늘씬하게 큰 키와 몸 여기저기 자리 잡은 잔근육은 탄력적인 몸매를 완성시켰다.

거기에다 루바흐를 다닐 적부터 돋보이던 미모에 물이 올라 지금 사교계에서도 아름답다는 명성이 자자했다.

“네가 영리하고 강하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벌써 많은 인명피해가 나왔다. 이능을 가진 기사들도 놈을 잡지 못했어. 그런 위험천만한 곳에 너를 보낼 수 없다. 아니…….”

알시오스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고 나서 마저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너도 내 말을 이해하리라 믿었다만. 왜 그리 고집인 거니? 크리스틴.”

오라비의 강경한 태도에도 크리스티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제가 가겠다는 겁니다.”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하면.”

그녀는 흔들림 없는 물빛 눈동자로 올곧게 알시오스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의 말씀은 제가 델피아 가문의 일원이 아니란 뜻인가요?”

“하아, 크리스틴. 내가 널 두고 어찌 그런 뜻으로 말했겠니.”

“작금의 사태는 델피아 영토 자체에 크나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치대나 기사단만으로는 쉬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더 적합한 인력이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모두가 겁먹고 항해를 멈춘 때에 이 땅의 주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대관절 누가 나선단 말입니까.”

“…….”

냉정히 상황을 판단하여 지적하는 크리스티나의 말에 알시오스는 이마를 짚었다.

그는 더 이상 저 영특하고 고집 센 여동생을 말리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그의 예상대로 크리스티나는 형형히 빛나는 눈을 들어 자기주장에 쐐기를 박았다.

“저 크리스티나 R.델피아, 가문의 일원으로서 더 이상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깃발을 들고 출항하겠습니다.”

* * *

쥬다스 일행은 피난민들을 만났던 때로부터 사흘 밤낮을 더 달려 산을 내려왔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지형이 점차 험준해졌다.

울퉁불퉁한 바위와 중간에 길이 뚝 끊긴 절벽 등 말이 달리기 어려운 구간도 있었다.

그런 지형을 만나면 콜이 바람의 정령을 부려 안전하게 지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흘째 되는 날 아침, 그들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시엘 해안에 도달했다.

드디어 델피아 영지에 진입한 것이다.

시엘 해안은 바위섬과 깎아 지르는 절벽을 끼고 끝없이 이어지는 드넓은 바다를 끼고 펼쳐져 있었다.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굵은 알갱이와 조개껍데기가 섞여 거친 모래가 해변에 가득했다.

바다 수심이 금방 쑥 깊어지는데다 바람이 강하니 파도 역시 대체적으로 크고 사나웠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메아리처럼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때때로 파도에 밀려 온 해초들이 구불구불 띠를 그리며 바윗돌에 걸려 있기도 했다.

마침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서 말을 세운 일행은 이곳에서 와이번을 방생하기로 결정하였다.

“얌마, 나와라.”

“삐이.”

그사이 바이칼의 따뜻한 로브 안에 있던 와이번은 꾸벅꾸벅 졸던 눈을 반짝 떴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밖에 나오지는 않았다.

놈은 둥지 튼 새마냥 콕 틀어박혀 바이칼의 무릎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편히 누웠다.

로브를 들춰 그 모습을 본 바이칼은 허 하고 한숨을 뱉으며 와이번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뭐해, 겨울잠이라도 자냐? 이거 아주 와이번이 아니라 뱀이네, 뱀. 먹는 것보다 잠이 더 좋냐?”

“삐애액!”

자는데 자꾸 건드리자 와이번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짜증을 부렸다.

“어쭈? 이놈 이거 안 되겠는데요? 아직 사회성 훈련이 덜된 듯해 보이는 게……. 그냥 아싸리 며칠 더 빡세게 굴려볼까요?”

“아무래도 물 밖에 오래 나와 있다 보니 많이 피곤한 모양이야.”

루니를 통해 생명 활동에 필요한 만큼의 수분은 꾸준히 전달해 주었지만 아무래도 블루와이번이 본래 물속에서 서식하는 종족이다 보니 쉽게 피로를 느꼈다.

쥬다스는 말에서 내려 바이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따뜻한 로브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않고 캬르르거리는 와이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이리 나와 보련.”

“삐이이?”

빼꼼, 와이번이 고개를 내밀었다.

자기가 깨울 땐 꿈쩍도 안 하더니 쥬다스의 한마디에 냉큼 일어난 와이번을 내려다보며 바이칼은 배신감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젠 하다하다 뱀대가리한테까지 차별을…….”

파다닥!

제대로 멀리 날진 못했지만 바이칼의 로브 속에서 튀어나와 쥬다스의 품에 안길 정도의 단거리는 비행이 가능했다.

흡사 한 마리의 닭이 퍼덕이는 모양새였다.

와이번은 쥬다스에게 아기처럼 안겨 볼을 부비며 애교까지 부려댔다.

“삐익, 삐익!”

“오냐. 잘 잤나 보구나.”

“삐이익.”

가볍게 머리를 토닥여 준 쥬다스가 와이번을 안은 채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머지 일행도 그를 따라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바다 특유의 짭조름한 향기와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와이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바로 바다란다. 네 고향과 닮아 있지 않느냐.”

“……삐잉.”

와이번은 바다를 보며 아주 어린 새끼 때를 떠올렸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내리쬐는 태양, 반짝이는 물결 전부 분명 본 적 있는 장면이었다.

와이번은 본능에 이끌려 밀려온 파도를 향해 훌쩍 뛰어올랐다.

퐁당!

와이번은 멀리 날지는 못하고 가까운 바닷물에 입수했다. 그리고 물을 흡수하여 점차 몸을 본래대로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와.”

쥬다스 곁에 선 세이지가 작게 감탄을 흘렸다.

조그맣게 줄어 있을 때와 달리 본래 크기를 되찾은 와이번은 확실히 신룡이라고도 불릴 만한 모습이었다.

머리끝부터 등줄기를 따라 뾰족하게 돋아난 뿔이며 거대한 두 날개, 몸통보다 두 배 이상 기다란 꼬리까지, 온몸을 뒤덮은 푸른 비늘이 번쩍거렸다.

와이번은 신나게 바다를 헤엄쳐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았다.

녀석이 겨우 몸만 담그고 살던 호수와는 다르게 바다는 그 거대한 몸집이 들어가도 끄떡도 없었다.

오히려 멀리서 길게 물결치는 파도만도 못해 보였다.

넓고 낯익은 바다에 몸을 맡긴 와이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를 헤엄쳐 갔다.

크워어어어!

거대한 포효가 파도 소리와 함께 바다를 뒤흔들었다.

고래처럼 물을 뿜기도 하고 깊이 잠수했다 뛰어오르기도 하는 등 와이번은 무척 신이 난 모습이었다.

잠깐 사이 점처럼 멀어진 와이번을 바라보던 바이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찼다.

“쳇, 이래서 파충류한테는 잘해줘도 소용이 없다니까요.”

“이런, 인사도 없이 떠나서 많이 서운한 게로구나.”

“누, 누가 서운하다고……! 그런 거 아닙니다.”

바이칼은 손사래를 치며 홱 돌아섰다.

일행은 다시 말에 올랐다.

와이번을 무사히 바다에 방생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더는 바닷가에 미련 둘 이유가 없었다.

말의 허리를 박차기 전, 바이칼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반짝이는 바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하지 그랬냐. 이 배신자 와이번 같으니.’

멀리서 별처럼 빛나는 푸른 반짝임을 보며 바이칼은 피식 웃고 말을 출발시켰다.

“잘 지내라, 꼬맹아.”

아주 속이 시원하구만 뭘.

바이칼은 말과는 다르게 씁쓸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바이칼을 흘낏 쳐다본 쥬다스가 가만히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 위로 몰려든 녹색 바람은 이내 작은 소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네가 바란 대로 잘 적응하는지 보고 왔어! 그 녀석 되게 기분 좋아 보이더라. 신나서 지금 우리와 헤어졌단 사실도 눈치 못 챈 것 같아. 나중에 혼자 있단 걸 깨달으면 조금 쓸쓸해할지도 모르겠어. 아, 근데 마침 바다 멀리에 와이번 무리가 서식하는 지역이 있더라구?」

“와이번 서식지?”

「응응. 저 꼬마 와이번이 잃어버린 무리인지는 모르겠는데, 비늘이 푸른색인 걸 보니 동족인 블루와이번들이야. 아마 저대로 돌아다니다 보면 그 무리랑 마주치게 될걸?」

“……음.”

쥬다스는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보를 전달하던 유니가 휙 날아올라 그의 왼쪽 어깨에 자리 잡았다.

「왜 그래? 이그레트.」

“동족이라. 그 아이가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으응?」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낙오자를 버리고 갈 정도로 무리 질서가 강한 종족인데. 이제 와서 동족이 나타났다고 해서 쉽사리 반길 것 같진 않아요. 오히려.」

「오히려 어떻게 된다는 거다요?」

카니의 의견을 듣자 토니도 뒷말을 궁금해했다.

바람의 정령과 땅의 정령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으며 카니는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경계하고 쫓아낼 가능성이 높아요. 보자마자 공격하지 않으면 다행일걸요?」

「헤에, 동족이라고 봐주는 게 없구나.」

「우우웅.」

쥬다스는 정령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묵묵히 이동에 집중했다.

얼마 가지 않아 크고 작은 배들을 묶어놓은 항구가 나왔다.

나무판자를 깔아놓아 넓게 이어진 항구 근처로는 제법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배낚시를 떠나는 사람부터 다른 항구로 떠나기 위해 바쁘게 준비하는 화물선 선원들, 그리고 델피아 공작가의 문장이 찍힌 군함에서도 병사들이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다.

“……군함이 출항 준비를 하는군요.”

에단이 넌지시 이점을 짚었다.

델피아 공작가에서 맡고 있는 역할 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이 해상 전력이다.

루바르잔 제국의 왼쪽 날개라 불리는 델피아 가문은 바다로부터 적의 침략을 막고 역으로 바다로 침투해 들어가는 작전을 수행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단장. 지금은 딱히 전시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꼭 전시가 아니라도 바다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델피아가는 영토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전력을 아끼지 않지.”

바이칼의 질문에 에단은 막힘없이 답했다.

“과연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명예로운 대귀족답질 않나.”

그들은 동시에 바다를 닮은 도도한 소녀를 떠올렸다.

크리스티나 R.델피아.

루바흐를 졸업한 이후로는 서로 바빠 만날 기회가 없던 그녀와 3년만의 재회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물에 넣으면 불어나는 공룡! (...) 거기서 영감을 얻은 건 아니었는데 뭔가 비슷한 느낌이라 말씀듣고 저도 웃었습니다.ㅋㅋ

드디어 크리스티나가 등장하네요.ㅎ 개인적으로 예뻐라하는 캐릭인데.. 등장이 좀 늦었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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