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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환향
루바흐에서 쥬다스를 중심으로 한뜻으로 모인 그들은 만날 때마다 틱틱거리며 가시를 세우던 관계였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혈육만큼이나 서로를 마음 깊이 신뢰했기에 마음 놓고 투닥거릴 수 있었다.
학원 시절부터 황태자의 수족으로 자리매김한 이들이 바로 에단, 바이칼, 크리스티나, 마르젠까지 네 사람이었다.
이 중 마르젠은 일찍이 정계에 진출하여 각종 로비와 회의를 통해 귀족세력 간 이해관계를 다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여성인 크리스티나는 졸업 후 가문으로 돌아가 귀족영애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물론 여성이긴 해도 문무 출중한 실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다양했다.
조만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델피아 공작령을 다스리게 될 알시오스의 곁에서 업무를 나눠 맡을지, 혹은 뛰어난 지략과 무력을 바탕으로 여성 장교로 지원할지, 이도 아니면 혼인을 통해 평범한 여인의 길을 걸을 것인지.
크리스티나는 수많은 선택지를 앞에 두고 신중하게 시기를 살폈다.
그렇게 그녀는 지난 3년간 델피아 영지에서 공작가의 후손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며 선택의 순간을 기다렸다.
“또 당했다지?”
“말도 말라더군. 이번엔 배가 완전 걸레짝이 되어서 돌아왔다지 뭐야. 오죽하면 공녀님께서 직접 깃발을 드셨겠어!”
쥬다스 일행은 말에서 내려 항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항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에단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어수선하군.’
델피아 성의 인구가 많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른 아침의 항구가 시장통처럼 바글거리는 모습은 그리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알아낼 수 있었다.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
“살아남은 사람은 없고 자꾸 찌그러진 유령선만 항구로 돌아오니. 도대체 저 바다 너머에 어떤 끔찍한 괴물이 살고 있기에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 걸까?”
“이번에 공녀님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델피아 정예군함이 출항한다지 않나. 믿고 기다려 보자고.”
최근 들어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간 어선이나 무역선들이 종종 유령선이 되어 돌아온다는 소문이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은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배만 덜렁 항구로 돌아왔다.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당하는지 정확한 기준조차 없다.
알려진 사실이라곤 특정 해역이라는 장소뿐.
그저 어느 순간 항구를 떠났던 배중 하나가 텅 빈 채로 돌아오게 될 뿐이다.
그런데다 돌아온 배를 살펴보면 괴이쩍게도 전투의 흔적이 없었다.
그 대신 암초에 받아 구멍 나고 깨어진 흔적은 제법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파되거나 가라앉지 않고 항구까지 돌아오긴 하였으니 사람들이 통째로 사라질 이유는 없었다.
그야말로 정황을 파악할 수 없는 괴기사건이었다.
델피아 공작가에선 이를 흉악한 마력을 사용하는 몬스터의 습격이라 추측했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세이렌이 있다던데.”
“날개 달린 몬스터 떼의 습격일지도 모른다더군. 하늘에서부터 사람만 낚아채서 사라진 게 아닐까 하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명확하지 않은 적에 대한 공포심은 델피아 성의 주민들에게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그들은 더 이상 항해하길 두려워하여 항구에 발길을 끊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에 나선 이가 델피아 공작가의 하나뿐인 여식,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해양몬스터 토벌을 목적으로 하여 군함 세 척을 이끌고 일선에 나섰다.
시끌시끌한 사람들 틈에서 이야기를 주워듣던 바이칼이 문득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어, 근데 공녀님이라면…….”
“오셨다―!”
그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와 하고 소란이 일어났다.
여기저기 모여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인파에 치이지 않게 한쪽 구석에 뭉쳐 있던 쥬다스 일행은 한 호흡 늦게 그 뒤를 따라 발길을 움직였다.
“어디야? 어디?”
“저길 봐, 지금 막 도착했다고!”
우글우글 몰려든 틈바구니에서 누군가 크게 환호했다.
“크리스티나 공녀님!”
척척!
군용부츠가 일정하게 딛는 발자국 소리가 장엄히 울려 퍼졌다.
길게 굽이치는 투톤의 바닷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성 장교를 선두로 델피아 정예해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색의 갑옷이 햇살을 받은 파도거품처럼 번쩍였다.
수십의 군사가 4명씩 대열을 맞춰 항구로 걸어오는 모습은 장엄한 걸 넘어서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주민들의 응원과 환호를 받으며 군함 앞까지 걸어간 크리스티나가 우뚝 자리에 멈췄다.
시엘 해안 특유의 거칠고 강한 바닷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휘저었지만 이에 신경 쓰지 않고 굳건한 표정으로 군사들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지금부터 델피아 영지민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원흉을 탐색, 척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에 나 크리스티나 R.델피아가 사령관으로서 진두지휘할 것이며 총 삼 척의 군함을 사용한다.”
진남색 장교복 위에 하얀 갑주를 걸친 크리스티나가 특유의 차가운 표정과 어투로 출정을 선언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근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미확인된 원흉을 찾아 정체를 밝히고 척결하는 것이다. 작전 도중 꼬리를 말 겁쟁이들은 쓸모없으니 내게 목숨을 맡길 전사들만 뒤를 따르라.”
이미 사태를 충분히 지켜봐 왔으며 명을 받자마자 두말 않고 갑주를 챙겨 나온 군사들의 눈에선 흔들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대열을 훑어 이탈자가 없음을 확인한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출항을 명하려던 순간이었다.
“저희도 지원하겠습니다!”
활과 조립식 발리스타를 챙겨 든 사내들이 앞으로 나섰다.
델피아 공작령은 영지민의 성품이 대체로 호전적이고 용감하여 영토를 지키기 위한 전투를 명예롭게 여겼다.
크리스티나가 직접 해군부대를 이끌고 나서기 전까지도 많은 민간 자치대들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용감하게 바다로 떠났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델피아의 영지민들은 뱃길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이는 그들의 긍지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크리스티나는 굳이 이들의 참전을 말리지 않았다.
“지원을 수락하지. 단 작전에 참여하는 때에 한에 자네들도 휘하의 군인으로 취급하겠다. 명령불복종으로 인해 향후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각자 짊어지도록.”
“예!”
사내들은 일제히 씩씩하게 대답했다.
크리스티나는 홱 돌아 배에 올랐고, 그녀를 따르는 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각 위치로 향했다.
민간 지원자들도 지정된 칸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 개의 군함이 모두 출발 준비를 마쳤다.
“출항!”
뿌우우우-!
승리와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고동소리가 묵직하게 항구를 울렸다.
출발과 동시에 급격히 차이 나는 파고로 인해 배가 위아래로 출렁였다.
해상 활동에 익숙해진 해군들과 뱃사람들은 익숙하게 균형을 잡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무리도 있었다.
“토, 토할 것 같.”
“참아라.”
“저 배 처음 타보…… 웁.”
지원자들의 틈에 섞여 배에 오른 쥬다스 일행이었다.
정령의 가호를 받는 쥬다스와 콜은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고 극상의 신체 능력을 지닌 에단도 역시 너울 치는 시야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반면 다른 친위기사들과 세이지는 뱃멀미로 인해 안색이 질려가고 있었는데 그중 유독 멀미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바이칼이었다.
“아으 씨……. 배는 타지 말걸.”
한바탕 속을 게워낸 후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구석에 널브러진 바이칼을 보며 에단이 작게 혀를 찼다.
“허약하군. 역시 체력 단련이 필요해.”
“체력……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또한 훈련으로 해결될 일이다.”
“아 거 쫌! 제가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닙…… 우웨엑!”
“…….”
이제 더 나올 것도 없는데도 웩웩거린 바이칼은 결국 비쩍 골은 고라니마냥 비틀거리다 벽을 짚고 주르륵 드러누워 버렸다.
군함은 제법 넓고 튼튼하게 설계되어 있었는데도 제국 서해의 거친 파도에는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지원자들은 호출이 있기 전까진 돌아다녀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다 같이 한 칸에 머무르고 있었다.
가장 크고 설비가 좋은 D3027함, 바로 크리스티나가 오른 함선이었다.
그들 일행은 지원자들 틈에 섞여 들어왔기 때문에 아직 크리스티나와 만나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는 척하지 않은 것은 쥬다스가 그리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안위에 신경 쓰느라 맡은 임무에 충실하지 못할까 염려했다.
더불어 한편으로는 과연 만나지 못했던 3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조용히 지켜보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다.
쥬다스는 벽에 달린 커다란 창문 앞으로 다가가 솟구치는 하얀 물살을 바라보았다.
일반 어선은 노를 저었지만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무역선이나 함선의 경우 앞에서 배를 끄는 해마(海馬)를 사용했다.
육상의 마차를 끌고 가는 말들처럼 바다에도 배를 끄는 해마가 있다.
해마는 육지의 말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네 개의 다리 대신 지느러미와 꼬리로 헤엄친다.
창문 너머로 옆 함선을 끌고 있는 해마들이 보였다.
함선은 크기가 크고 무거운 편이기 때문에 힘이 좋고 건장한 해마 다섯이 배를 끌었다.
이들이 지칠 때를 대비하여 함선 안에는 잘 훈련된 예비용 해마들이 대기 중이었다.
해마는 길고 흰 메기수염에 두터운 눈썹, 붓으로 찍은 듯한 까만 점눈이 특징이었다.
몸통색은 흰색에서부터 갈색, 검은색점박이 등 다양했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는 쥬다스를 따라 유니가 창틀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그레트, 이렇게 큰 배에 타서 수심 깊은 바다까지 나와 본 적은 처음이지?」
「헤헤, 내 기억에도 그런 것 같다요.」
바람의 왕 곁에 톡 내려앉은 토니도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그레트는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 갈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카니의 말대로 쥬다스는 이전의 삶에서 아흔이 넘는 나이 동안 자신이 나고 자란 제국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나라가 그에게 어떤 일을 했는가와 관계없이 그는 기본적으로 고국에 대한 정을 가지고 살았다.
넓디넓은 제국을 방랑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에겐 늘 새로웠고 도전으로 다가왔다.
굳이 언어부터 시작해서 문화, 생활환경마저 다른 타국에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늘 수동적이었던 그는 아예 새로운 환경에서 처음부터 다시 적응하는 자체를 꺼려했다.
그래서 강을 건너거나 짧게 조각배를 이용해 본 경험은 있었어도, 지금처럼 장거리 이동을 배를 타고 해본 적은 없었다.
“…….”
쥬다스는 창문에 손바닥을 얹고 조금 멍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세상이라.’
배신과 저주 속에 홀로 늙어가며 딱딱하게 굳었던 심장이 너른 바다를 보고 나서야 조금씩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알지 못하는 걸 두려워했었지.’
그는 무엇이든 머리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알아야만 마음이 편했고 어떻게 대처할지 판단이 가능했다.
세상에서 그를 힘으로 떨게 할 자는 없었지만 정작 그 자신이 두려워했던 건 명확히 알아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이거야 원. 크리스티나 그 아이가 싫어하던 겁쟁이가 바로 나였구나.”
“……예?”
몇 걸음 뒤에서 그를 주시하던 에단이 의아한 눈을 했다.
쥬다스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힘차게 달리는 해마와 높은 파도에 흔들리는 뱃머리.
그들이 보고 지나는 모든 것엔 굴곡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겁쟁이가 되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어음, 그건 그렇지.」
「나요 무서운 거 많다요. 완전 무서운 거 투성이다요!」
「……어머, 토니. 그건 정말 겁쟁이인 게 아닐까요?」
자연계 4속성을 지배하는 정령왕들조차 겁쟁이가 되어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건 강인한 성정의 에단, 언뜻 차가워 보이는 크리스티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쥬다스는 겁쟁이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저 인정하기로 했다.
그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으나 편안해 보이는 주군의 어깨를 보며 에단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음, 크리스티나에 대해선...ㅎㅎㅎ 어디까지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냥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이칼은 묘하게 '까임신의 부름'같은 디버프가 걸려있어서... 저도 모르게 손이 가네요. ㄷㄷ 정말 지나가다 새똥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까임캐가 된 느낌이지만 그래도 똥까진 맞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 심한 거라면 모를까....(??)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오늘도 즐겁게 읽으셨길 바라며,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