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10화 (11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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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환향

‘라일러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크리스티나는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소녀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하늘색 머리카락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소녀는 울먹이며 애원하듯 말했다.

「나, 매일매일 기다렸는데.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네가 찾아오지 않아서.」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내 이름은 라일러스가 아니다.”

「응?」

크리스티나의 단호한 부정에 소녀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바다를 닮은 머리카락, 그 얼굴. 틀림없이 라일러스잖아?」

소녀가 크리스티나를 라일러스라 확신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머리색이었다.

투톤의 바닷빛 머리카락이라는 특징이 제일 결정적이었고 심지어 얼굴 생김새마저 흡사했다.

「설마……. 날 잊은 거야?」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본 적이 없으니 잊을 리도 없질 않나. 다시 묻겠다. 그대가 바다에서 사람들을 해쳤나? 제대로 정체를 밝혀라.”

「…….」

소녀는 뚫어져라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해진 크리스티나가 재차 물었다.

“이름은?”

그러자 소녀가 살짝 까치발을 들어 그녀의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난 이름이 없어. 라일러스가 지어주기로 약속했잖아.」

검게 물든 눈이 애정을 담고 휘어졌다.

「약속, 기억하고 있지?」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이미 활을 손에 쥐고 있었다.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력화살이 생성되며 소녀의 심장을 겨누었다.

“내 이름은 라일러스가 아닌 크리스티나 R.델피아다. 마지막으로 묻지. 사람들을 해친 게 너인가?”

「라일러스가…… 아니야?」

멍하니 크리스티나를 바라보던 소녀가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리곤 묘기를 부리듯 배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섰다.

혼란과 슬픔, 분노 등으로 표정이 일그러진 소녀의 주변으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거짓말! 꼭 다시 찾아와준다고 해놓고서!」

우르르릉!

맑은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크리스티나가 뒤를 돌아보자 요동치던 물결 너머로 거대한 파도가 꿀렁꿀렁 형성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태산처럼 어마어마한 높이로 일어난 파도 탓에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해일이었다.

‘이런 방식이었나.’

잠잠하던 바다를 조종해 삽시간에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는 힘을 본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대로 해일이 배를 덮치면 쓰러진 사람은 물론이고 전원 물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노랫소리에 홀려 수면상태에 빠진 군사들은 그대로 익사할 수밖에 없다.

크리스티나는 지금껏 바다로 떠났다가 유령선으로 돌아온 배들의 연유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대신 도로 홱 돌아서서 화난 표정의 소녀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쟁이들. 인간 따위 전부 죽어버려!」

검게 물든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소녀가 원하는 대로 거대한 파도가 함선들을 막 덮치려던 순간이었다.

「……?!」

파스슥 과자 부스러지듯 파도가 전부 공중분해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는 물방울 사이로 희미한 무지개마저 엿보였다.

“믿음을 배신당했다는 생각은 이 겨울바람보다 차갑지.”

크리스티나가 차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쥬다스가 놀라 눈을 크게 뜬 소녀를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후웅-

녹색바람이 몰려들어 소녀의 팔다리를 구속했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소녀가 뒤늦게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강대한 기운을 느끼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당신은…….」

“나도 그리 느꼈던 적이 있었다. 추워서 몸이 떨리지만 가슴만은 뜨겁게 타는 기분이더구나.”

소녀는 형형히 독기를 품은 눈으로 쥬다스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뭘 알아! 그들에게 이름을 주고, 신뢰를 주고받은 당신은.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그 모든 걸 다 가진 당신이 그 심정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

자연계 4속성 정령왕과 한 번에 계약한 인간에 대한 소문은 정령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본래 정령이었던 소녀도 역시 ‘이그레트’란 이름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소녀는 천천히 그의 곁을 가호하는 유니와 토니, 루니, 카니를 훑어보았다.

평안한 표정의 그들을 보며 소녀는 더욱 비참함을 느꼈다.

「나에겐 없어. 약속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네게 최고로 멋진 이름을 줄게. 조금만 기다려!’

소녀의 기억 속에서 바닷빛 머리카락이 아른아른 흩날렸다.

본래 영혼의 색으로 알아보아야 했지만 타락할 대로 타락해 버린 검은 눈으로는 영적인 시야가 일그러져 구별이 어려웠다.

그래서 소녀는 같은 머리색을 지닌 크리스티나를 보고 라일러스로 착각했다.

타락한 정령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를 버린 널 증오해.」

“우습군. 왜 그 라일러스란 자에게 그리도 집착하는 거지. 이름을 받지 못했다면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닐 텐데?”

크리스티나는 서늘한 얼굴로 정곡을 찔렀다.

소녀는 분노에 잠식된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꼭 계약을 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뭐?”

「계약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네가 좋았어. 내 노래를 들어주고 나를 만나러 와주는 라일러스 네가.」

바람의 속박에 팔다리를 묶인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말했다.

왕의 힘이 그녀를 속박하는 이상 벗어나거나 반항할 방법은 없었다.

「나도 몰라. 언젠가부터 소중해졌어. 그래서 매일매일 기다렸어. 나는 파도의 정령이고 이 바다에 가계약상태로 머물고 있었으니 여길 벗어날 수 없었어. 그래서 라일러스와 계약을 하기로 한 거야. 인간과 계약하면 바다에서 벗어나 늘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너는 나만을 위한 이름을 구해오겠다고 약속했어. 그래서 또 기다렸어.」

인간을 사랑한 정령은 기다리는 시간마저 사랑했다.

「태양이 뜨고 지는 걸 수천, 수만 번……. 얼마나 더 기다려야 네가 올까. 슬퍼져서, 오지 않는 네가 너무 미워서 노래했어.」

너무도 긴 기다림에 지친 정령은 슬픔과 분노를 축적하면서 점차 검게 타락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사령이 되어 주변을 지나는 배를 모조리 홀리기 시작했다.

라일러스를 부르는 파도의 노래는 남성들에게만 효력이 있었고, 일반적으로 뱃일을 하는 선원은 대부분 남자였다.

근처 해역을 지나는 배는 꼼짝없이 이 협곡으로 끌려 들어와 배에 타고 있던 전원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사람을 모두 살해한 사령은 텅 빈 배만 항구로 돌려보냈다.

그 배가 다음번엔 라일러스를 데려올 수 있도록.

“오랜 시간 고통스러웠겠구나.”

「…….」

“하나 아이야. 그 ‘라일러스’란 이가 너를 배신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그가 약속을 어겼으니까!」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약속을 어겼으나 만일 지키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면, 그래도 배신이라 여기느냐?”

「……?」

“인간은 정령과 달라서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많단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기도 하지.”

“아.”

쥬다스의 말에 무엇인가 떠올린 크리스티나가 작게 침음을 흘렸다.

크리스티나는 사령이 되어버린 소녀를 향해 읊조렸다.

“라일러스 델피아. 델피아 계보에 적혀 있던 이름 중 하나로군. 그분은 나의 조상이시다.”

「조상이라고?」

“14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셨다고 들었다. 계보상으로 이미 백 년도 훌쩍 넘은 이야기인지라 바로 떠올리지 못했군.”

비운의 공자, 라일러스.

가문에서 촉망받던 인재였으나 가파른 바위를 오르다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인해 뛰어난 지성과 훌륭한 인품을 뽐내보지도 못하고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뛰어난 마력과 더불어 남들보다 강한 신체를 타고 나는 델피아 가문의 특성상 그렇게 일찍 허무하게 죽어버린 후계는 처음이었기에 아직도 종종 회자되고 있었다.

「요절……? 죽었다고? 라일러스가?」

“인간은 백 년 넘게 살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분은 열 넷에 돌아가셨다.”

「그럴 리가…….」

파도의 정령이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가 바로 그의 나이 14살이었다.

가장 멋진 이름을 지어주겠다며 떠났던 그가 그길로 비명횡사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소녀의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방울 고이기 시작했다.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올 수 없었을 뿐이었다.

빨리 이름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안전한 길을 놔두고 급하게 험한 바윗길을 오른 게 화근이었다.

미끈거리는 바위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진 소년은 며칠 시름시름 앓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바다 너머에서 그를 기다리던 정령에겐 닿지 않을 소식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날 이미 죽었다고? 라일러스가?」

차라리 배신당했다고 느꼈을 때가 나았다.

타락한 파도의 정령은 주체할 수 없는 설움과 경악에 휩싸여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화도 화낼 대상이 있을 때에나 낼 수 있는 것이다.

아예 그 대상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엔 갈 곳 잃은 분노와 상실감이 폭풍우처럼 덮쳐왔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왜 자꾸 나한테 거짓말만 하는 거야. 라일러스…….」

소녀는 어린애처럼 검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이게 뭐야. 전부 의미 없잖아. 너를 기다린 시간도, 내가 불러온 노래도. 아무 소용없잖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고 기다려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령은 허무함에 몸서리쳤다.

검은 기운이 한층 짙어졌다.

“룬.”

그때 크리스티나가 한 단어를 툭 내뱉었다.

소녀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자 크리스티나는 무심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조상께서 눈을 감기 전 남기신 말이라고 들었다. ‘달’을 의미하는 단어로 어두운 새벽 자신의 달이 되어준 이에게 전해주고자 했다고.”

깃털이 조각된 새하얀 활이 소녀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하얀색 몸체 위로 선명하게 새겨져있는 글자가 보였다.

“이 페어리 보우에 기록되어 있군.”

깔끔하게 말문을 맺은 크리스티나와 그녀가 내민 활을 번갈아 쳐다보던 소녀의 몸에서 점차 검은 기운이 옅어졌다.

「‘룬’…….」

잊힌 게 아니었다.

라일러스는 정령을 생각하며 소중히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그걸 알려주기 위해 급히 달려가다 바위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백 년도 넘은 세월이 지나 자신의 이름을 전달받은 사령은 눈물 섞인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라일러스.」

포옹-

소녀의 몸에서 투명한 물거품이 솟아올랐다.

곧 사령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물거품으로 변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봐……!”

“크리스티나.”

당황하여 달려가려던 크리스티나의 손을 쥬다스가 부드럽게 잡아 세웠다.

“저 아이 스스로 소멸을 택한 것이다.”

“전하.”

“더 이상 분노할 이유도 증오할 대상도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쥬다스는 쓸쓸히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있는 사령, ‘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아주겠느냐. 모든 눈물이 무의미하고 절망스러운 건 아니란다.”

「…….」

“눈물도 햇살에 닿으면 빛나는 것임을.”

그의 말을 들은 룬은 작게 입을 달싹여 노래하기 시작했다.

「달도 별도 잠든 까만 새벽에 너만은 깨어있었지. 약속해, 너는 나의 바다가 되고 나는 너의 파도가 되기를.」

본래 파도의 정령이었던 소녀는 부서지는 파도처럼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은은한 노랫소리만이 마지막으로 협곡을 감돌았다.

「혹시 바다를 찾아 헤매는 파도를 본다면 말해주겠니.」

너의 바다는 언제나 네 곁에 있다고.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룬의 모티브는 인어공주입니다....만 저는 어릴 적에 인어공주이야기를 정말 마음에 안들어 했습니다.

인어공주에겐 슬픈 짝사랑으로 새드엔딩,

왕자에겐 이웃나라공주님과 해피엔딩.

...(부들부들) 아마 제가 새드엔딩을 싫어하게 된 계기가 유치원시절 읽었던 인어공주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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