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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맹세
델피아의 공녀 크리스티나가 이끌고 간 함선은 나흘 만에 맡은 임무를 완수하고 전원 무사히 항구로 귀환했다.
안심하고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된 사람들은 환호성으로 그들의 귀환을 반겼다.
여동생을 출전시킨 후 한숨도 자지 못했던 알시오스는 바쁜 부모를 대신하여 소소한 축하연을 열었다.
그리고 그 축하연엔 알시오스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들이 참석했다.
“아, 순례의 길을 다니고 계신 중이었군요.”
갑주를 두른 제복을 벗고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크리스티나는 사령관이 아닌 귀족 영애로서 자리에 임했다.
파도의 정령을 만난 협곡에서부터 이틀간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크리스티나와 쥬다스 일행은 함께 대략적으로 각자의 정황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항구에 도착하자 크리스티나는 그들을 델피아 공작성에 초대했고 한 식탁에 둘러앉아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순례의 길이라 함은 제국의 많은 영지를 비롯하여 머나먼 종속국까지 방문하셔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험준한 여정을 잠행이라니요? 이번처럼 위험천만한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시니, 그러다 자칫 해라도 입으실까 염려됩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하나 내 이래 봬도 꽤 도움이 된단다. 그렇지 않누, 크리스티나야?”
“…….”
황망해진 크리스티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안으로 말을 골랐다.
“전하…… 께선.”
“으응?”
여전히 아이 대하듯 부드럽게 응수해 주는 그를 보며 크리스티나는 한숨처럼 말했다.
“예, 전하께오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전멸했을 것이라 감히 확신합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여자인 크리스티나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노래에 홀려 수면상태에 빠졌고 사령은 이들을 해일로 덮쳐 죽이려 했다.
만일 그 시점에서 쥬다스가 적절하게 끊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전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였다.
“하오나.”
크리스티나는 서늘한 눈빛으로 흘끗 그의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도 전하를 말리지 못한 그대들에겐 실망이군.”
“……면목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노래에 홀렸던 날 이후 자신의 불찰을 뼈저리게 에단이 변명 없이 즉각 고개를 숙였다.
같은 심정이던 바이칼도 사과에 동참했다.
“저희가 자만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쥬다스는 호위들이 침울해져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시에 노랫소리를 들은 인간이 사령의 힘에 저항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너희 탓이 아니란다. 다만 세상에는 우리가 예상치 못할 만큼 신비한 힘을 지닌 이들이 존재하며, 타인의 불행을 간절히 염원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려무나.”
쥬다스는 혹시라도 그들이 방심하다 함정에 빠지거나 겉으로 드러난 그럴 듯한 가면에 속아 등 뒤에 칼을 맞을까에 대해 걱정했다.
자신들이 해야 할 걱정을 주군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에단과 바이칼, 콜은 나란히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말을 할수록 더 침울해지는 그들을 보며 쥬다스는 난처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다시 봐도 색깔 진짜 신기하다요.」
그사이 토니는 통통 튀어 크리스티나의 찻잔에 쏙 매달렸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바닷빛 머리카락에 호기심을 느낀 토니는 이번에도 구경에 푹 빠져 있었다.
찻잔에 매달려 빼꼼 고개만 내민 땅의 정령을 발견한 크리스티나는 차를 마시지도 못하고 토니와 어색하게 마주 보았다.
「얘가 진짜. 부담스럽게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핀잔을 던진 유니가 토니 곁으로 날아와 착지했다.
싫은 소리를 듣고도 토니는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씩씩하게 대꾸했다.
「하나도 안 부담스럽다요!」
「너 말고 저 여자애가 부담스러워한다는 뜻이야. 하여튼, 너는 명색이 땅의 정령왕이란 애가 왜 신기한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쓰니?」
「에엥. 그치만 가만있는데? 나요! 반짝반짝하고 특이한 건 다 좋다요. 완전 예쁘다요!」
「어휴, 얘도 보면 은근 외모지상주의라니까…….」
반짝거리고 예쁜 거 최고를 외치는 토니를 앞에 두고 유니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령들이 떠드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실체화하여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테이블 위에서 알짱대는 바람과 땅의 정령이 가장 활발한 편이었고 만사 귀찮아하는 푸른 늑대는 그저 테이블 아래에 길게 누웠다.
마지막으로 불의 정령왕 카니는 유독 쥬다스와 떨어지는 걸 싫어하여 한순간도 그의 주변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그의 무릎에 눌러앉아 옷자락을 부여잡고 아기캥거루마냥 달라붙어 있었다.
정령들이 그러는 사이에도 대화는 훈훈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하다못해 포탈이라도 이용하여 다니심이.”
“필요하다면 포탈을 탈 생각이 있긴 하다만. 그래도 아직까진 필요치 않을 듯싶구나.”
알시오스는 그의 안위를 걱정하여 이것저것 제안을 해왔지만 전부 부드럽게 거절당했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따뜻한 태도로 거절하긴 했지만 이를 본 알시오스는 황태자가 마냥 유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자신이 한 번 하고자 정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위험하고 고난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뜻을 굽히지 않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알시오스는 편한 길을 놔두고 굳이 험난한 길을 고집하는 쥬다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는 더 이상 쥬다스를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알시오스는 서로 원수가 되었으리란 편견을 깨고 쥬다스가 3황자 세이지를 일행에 포함하여 함께 다닌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간 침묵의 궁에 유폐되어 있었다던 3황자는 숫기가 없고 내내 차분한 분위기긴 했으나 선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쥬다스를 형으로 따르며 신뢰하고 있으니 따로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밤이 깊도록 기분 좋게 담소를 나누다 자리를 파했다.
델피아 공작은 바쁜 용무로 인해 출타 중이었으므로 현재 공작성의 총책임자는 후계자인 알시오스였다.
알시오스는 쥬다스 일행이 최대한 편히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준비를 지시했다.
방에 들어가기 전 쥬다스는 호위를 위해 따라 들어오려던 에단에게 따로 휴식을 권했다.
공작성에 도착한 후로 내내 표정이 좋지 않던 에단은 잠시 망설이다 평소답지 않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다른 친위기사를 붙여두고 자리를 떠났다.
「에궁. 저 꼬마도 어지간히 심난한갑다.」
유니가 멀어지는 검은 뒤통수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럴 만도 하죠. 이그레트를 지켜주는 게 저들의 역할이잖아요. 떡하니 위험한 상황이 됐는데 정작 자신들이 술수에 당해서 보호를 받았으니 오죽 자괴감이 들겠어요.」
「우웅. 그땐 어쩔 수 없다아니다요? 사령의 힘은 정신적인 저주를 거는 데에 특화돼 있으니까.」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저들 스스로 용서가 안 되겠지.」
정령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방 안에 들어온 쥬다스는 모자와 겉옷을 벗고 침의로 갈아입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이 제국 유일의 맑은 은발로 돌아왔다.
취침 준비를 완벽히 마친 그는 침대에 눕는 대신 창가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머무는 방은 3층이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장소는 너른 잔디밭이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아 잔디는 녹색이 아니라 누런 황갈색이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버석거리는 마른 잔디를 밟고 선 인영이 있었다.
“…….”
모처럼 편히 쉬라고 보내놓은 에단이었다.
밖으로 나와 한참 동안 찬바람을 맞고 서있기만 하던 에단은 자신이 차고 있는 도 형태의 검을 꺼내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나는 강해지고자 했다.’
손잡이를 잡은 아귀에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강해진다면, 누구보다 강한 검을 완성시킨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여겼다. 하지만.’
그는 검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기도 했지만 집중력과 지구력이 좋아 무식할 정도로 훈련에만 집중했다.
노력형 천재를 따라잡을 자는 없다는 옛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에단은 괴물 같은 성장을 보였다.
신체형 이능력자라는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이를 키우는 훈련에만 성실하게 매진한 끝에 검술에 한해서만큼은 이른 나이부터 정상급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검으로 무엇을 지킬 수 있지?’
철컥!
에단은 거칠게 검을 도로 갈무리했다.
정령들이 얘기한 대로 그는 지금 극심한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엘리트로서의 삶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패배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얻어낸 패배감에 에단은 향이 지독한 약초를 입안에 잔뜩 머금은 듯했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쓴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머릿속마저 띵해졌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좀 더 강해져야 하나. 강하다면 얼마나? 일단 정신력을 먼저 길러야 하나?’
모든 게 다 혼란스러웠다.
천재라 칭송받고 명예로운 승리를 거머쥐는 일 따위는 아무 소용없었다.
조무래기들을 상대로 강함을 뽐내보았자 정작 위험한 상황에서 손을 쓰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그는 냉철하게 자기 자신을 평가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허헛, 역시 감이 무척 좋군요.”
에단의 뜬금없는 말에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뜬금없이 대꾸하였다.
바람과 불의 정령술사 콜이었다.
바람으로 기척을 감추고 있던 콜은 에단의 앞으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희끗해진 머리와 살짝 주름 잡힌 얼굴이 그가 슬슬 노년기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실제 나이는 일흔이 넘었지만 정령의 도움으로 비교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 잠이 오지 않아 달이나 구경할까 하여 나왔건만. 에단 님 정도 되는 분이 이 늙은이에게 부탁할 것이 대체 무엇이랍니까?”
여유로운 어조로 말하긴 했으나 콜도 역시 에단과 마찬가지로 자책감에 시달리다 찬바람이라도 쐬러 나온 참이었다.
에단은 다른 인사치레나 미사여구는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걸 불쑥 입 밖으로 꺼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술, 판단력은 물론 정신력까지 키울 수 있는 극한훈련 말입니다.”
“허어, 박스를 사용하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부탁드립니다.”
콜은 단번에 에단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리곤 곤란한 표정으로 제법 길게 자라고 있는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훈련용으로는 박스가 최고라 하지만 단점도 있지요.”
콜은 품에서 울룩불룩 각진 주머니를 하나 꺼내 들었다.
짙은 겨자 색깔의 주머니에는 여러 종류의 박스들을 미발동 상태로 넣어 놨다.
“박스는 분리된 차원을 만들어내 지정된 난이도와 맵에 입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이외다. 그러니 신체적으로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지만…….”
콜은 주머니에서 박스 하나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빛이 꺼진 박스는 그저 평범한 장난감상자처럼 보였다.
“정신적으로는 매우 피로를 느낄 수 있지요. 박스훈련을 겸한다면 평소 가볍게 임했던 활동에도 무척 피곤해질 수 있다는 뜻이올시다.”
그러나 에단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정도를 버틸 정신력도 없다면 기사단의 수치겠지.”
“아 나 진짜 타이밍. 어후, 뭡니까? 왜 저를 보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데요? 표정이 영 좋지 않으신데 지금.”
어둑어둑한 그늘 사이로 바이칼이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 나타났다.
그들 셋은 쥬다스의 호위로서 스스로를 자책하느라 잠에 이루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달이 차오른 밤,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같은 심정으로 바깥에 나왔다는 사실에 그들은 함께 피식 웃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14장. 맹세'의 시작입니다!
어느덧 14장까지 오다니 ㄷㄷ 2부 시작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네요!
주인공이 먼치킨이라 자괴감에 빠지는 주변인들...(..)
억울하면 강해져야하느니... 하지만 각자 어떤 방식의 '강함'이 필요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죠.ㅎ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기를 바라며,
늘 보내주시는 응원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