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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맹세
이른 새벽, 한 폭의 수채화처럼 흐릿하게 빛이 번져 오는 어둔 하늘 아래 일행은 조용히 출발 준비를 마쳤다.
델피아 공작령은 청렴하고 깔끔하게 관리하기로 유명했으며 그 명성대로 영지민들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오래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
민심이 믿고 따를 때에는 그만큼 관리계층이 책임과 의무를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쥬다스는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 시간을 택해 조용히 성을 빠져나갔다.
“흐아~ 암. 그런데 크리스티나 님과는 따로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말없이 몰래 떠나버리면 엄청 서운해하실 텐데요.”
유독 피곤에 찌든 얼굴로 늘어지게 하품한 바이칼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새벽의 성읍은 찬 서리가 내려 공기가 안개처럼 촉촉했다.
어제 낮의 환호와 축제 분위기가 전부 거짓이었다는 양 조용한 가운데 느린 말발굽 소리만이 다각다각 부지런히 울려 퍼졌다.
쥬다스는 바이칼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 답했다.
“그 아이가 그럴 것 같진 않구나.”
“에이, 그러지 않긴요. 서운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 서러워하실지도.”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형님.”
이젠 제법 일행의 편안한 분위기에 익숙해진 세이지도 바이칼의 의견에 동조했다.
“델피아 공녀도 형님과 동문이시라면서요. 형님을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 보였어요. 그 싸늘하던 얼굴에 미소를 지었을 땐 어찌나 놀랐던지.”
“어, 세이지 님. 그거 저도 봤습니다. 꼭 조각품에 표정이 생긴 느낌이었다니까요. 그때 솔직히 좀 소름…….”
“바이칼. 험담은 자제해라.”
“……소름 돋게 아름다우셨다는 뜻인데요.”
에단에게 무 자르듯 말이 잘린 바이칼은 뚱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아무튼 크리스티나 님도 이제 성인이고 하니 애 취급하시면 정말 삐지실지도 모릅니다?”
“흐음. 크리스티나를 애 취급하는 건 내가 아니라 바이칼 너인 듯싶은데.”
“옙?”
예상치 못한 쥬다스의 반격에 바이칼이 놀란 개구리처럼 눈을 껌뻑거렸다.
바이칼에게 동조하던 세이지와 지켜보던 에단도 의아한 얼굴로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쥬다스는 넌지시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자, 보련.”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들은 성읍을 빠져나가는 성벽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어어……!”
평소 잘 관리하여 매끄럽게 흩날리는 재색 갈기와 풍성한 꼬리털, 다른 말들에 비해 길쭉한 다리와 늘씬한 체형을 뽐내는 우아한 백마가 푸릉 콧김을 뿜었다.
놀라 할 말을 잊은 일행을 돌아보며 쥬다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마냥 제자리에서 기다리며 서러워할 아이가 아니지 않느냐.”
긴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모아 하나로 묶고 이동에 편한 여행복 차림으로 백마에 올라탄 크리스티나가 미리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티나 님?!”
일행이 가까워지자 크리스티나는 가벼이 목례하고는 말을 몰아 합류했다.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행태에 바이칼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 명색이 델피아 공녀님이신데 이렇게 마음대로 성을 빠져나와도 되는 겁니까?”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니지, 이유가 있긴 하지 않습니까? 허락은 받고 나오신 거세요?”
“오라버니 앞으로 서신을 남겨두었다. 곧 확인하시겠지.”
당당히 대꾸하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바이칼은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침부터 뒷목 잡으실 알시오스 공자님께 심심한 위로를.’
성문을 빠져나온 그들은 바다를 끼고 해안선을 따라 곧장 이동했다.
아직 어둑한 해안은 낮에 봤을 때와 달리 잔잔한 분위기였다.
바닷가라고는 해도 고운 모래사장이 아니라 바위가 많은 울퉁불퉁한 길이었기 때문에 일행은 속도를 조절하여 천천히 이동했다.
「어?」
겨울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흥얼거리고 있던 유니가 문득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런다요?」
「가만 있어봐.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으응? 소리라뇨?」
토니와 카니도 함께 바다를 바라보았지만 유니와 달리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쥬다스가 탄 말 옆으로 어슬렁어슬렁 함께 이동하고 있던 루니만이 귀를 쫑긋 세우며 이상을 감지했다.
「그때 그 꼬마 와이번이로군.」
「울고 있나 본데?」
히히힝!
갑작스레 말을 멈춰 세운 쥬다스로 인해 일행이 전부 우뚝 이동을 멈추었다.
“형님?”
“으음. 지난번에 이곳에서 풀어준 블루와이번을 기억하느냐?”
“그 파란색 뱀대가리, 아니, 꼬마 와이번 말씀이십니까?”
바이칼이 제일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내놓고도 내심 신경이 쓰였던 그는 쥬다스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자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 자식.’
마침 바닷가에서 말을 세웠으니 한 번쯤 더 볼 수 있을까 기대감을 품던 찰나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에 바이칼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많이 다친 모양이다.”
“……예? 다쳤다고요?”
허공에서 파앗 모습을 드러낸 유니가 녹색 궤도를 일으키며 먼저 앞으로 포로록 날아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그 뒤를 따라 파도치는 해변 가까이로 말을 달렸다.
십여 기의 말발굽이 젖은 자갈과 웅덩이를 밟으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멀리 가지 않아 거친 자갈모래밭에 쓰러져 있는 와이번이 보였다.
몰려드는 차가운 파도를 맞으며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와이번은 긴 꼬리로 제 몸을 감싸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야이 멍청한!”
그 처량한 모습에 기가 탁 막힌 바이칼이 제일 먼저 말에서 뛰어내리며 욕지기를 집어삼켰다.
바들바들 떨던 와이번은 일행이 다가오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놀라 도망가려던 포즈를 취했으나 기세 좋게 달려간 바이칼의 외침을 듣고 바로 돌아앉았다.
“좋다고 갈 땐 언제고!”
“푸릉.”
어린 와이번은 콧김을 뿜으며 바이칼을 내려다보았다.
어리다곤 해도 몸집은 집채만큼 거대했다.
가까이서 본 와이번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아름답던 푸른 비늘이 군데군데 뜯어져 나가고 날카로운 발톱에 쓸려 흉터가 잔뜩 생겨 있었다.
등줄기를 따라 자라난 뿔은 몇 개 부러지는 바람에 볼품없었고 날개도 물어뜯긴 자국이 선연했다.
놈은 끝내 동족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바닷가까지 쫓겨났다.
상황이 그리되자 하는 수 없이 얕은 바닷가에서 노닥거리다 사람들을 발견하고 멋모르고 다가갔다.
와이번 입장에서야 사람에게 길들여진 기억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다가간 거지만 갑자기 나타난 블루와이번에 놀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뿐만 아니라 경비대를 불러 공격하기까지 했다.
호의적인 사람들만 보다 갑자기 공격을 받게 된 와이번은 기겁하여 달아났다.
하지만 와이번이 머물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깊은 바다로 들어가면 동족에게 공격받았고, 얕은 해안으로 올라오면 사람들에게 활과 포를 얻어맞았다.
결국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와이번은 맥없이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 누워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끼에에엥.”
바이칼이 화를 내자 와이번은 아기 울 듯 길게 소리 내었다.
그들 사이로 쥬다스가 다가와 부드럽게 와이번의 긴 목덜미를 쓸어주었다.
“미안하다. 이 바다가 너를 더 힘들게 만들었구나.”
“크워엉.”
어린 와이번의 주홍빛 눈망울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와이번은 쥬다스의 따뜻한 손길에 이마를 맞대었다.
다행히 이마 사이에 솟은 뿔은 부러지지 않고 멀쩡했다.
쥬다스는 놈의 이마부터 뿔까지 쓸어 토닥거려 주며 물었다.
“너는 어찌하고 싶은지 이야기해 주렴. 이곳에 남아 너만의 터전을 찾겠느냐, 아니면 우리와 함께 가겠느냐?”
영리한 블루와이번은 언어를 직접 사용하진 못하더라도 뜻을 알아들었다.
선택지를 얻은 와이번은 생기 있게 꼬리를 살랑거렸다. 어느새 떨림이 멎어 있었다.
할짝.
와이번은 뱀처럼 끝이 갈라진 혓바닥으로 곁에 서 있던 바이칼의 얼굴을 훑어 올렸다.
불시에 봉변을 당한 바이칼이 질겁하며 팔뚝으로 얼굴을 벅벅 닦아냈지만 진득한 와이번침이 한가득 머리털까지 묻어 있었다.
“크흐흡. 배, 뱀 혀…….”
더러운 건 둘째 치고 파충류를 질색하는 바이칼 입장에선 악몽 같던 한순간이었다.
울상이 된 바이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준 쥬다스가 루니를 불렀다.
“부탁한다, 루니.”
「네 바람대로.」
푸른 늑대는 순식간에 블루와이번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수분을 빼내었다.
잠시 안개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나 싶더니 와이번은 수분이 쫙 빠져 지난번처럼 미니사이즈로 줄어들어 버렸다.
“삐이이.”
오랜만에 작아진 와이번은 오히려 그 모습에서 안정을 찾았다.
쥬다스의 품에 안겨 삑삑 울어대는 와이번을 보며 에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와이번을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음? 그래.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마. 하지만 훈련 적임은 따로 있었지.”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눈빛세례를 받은 바이칼이 수통으로 물을 끼얹어가며 얼굴을 닦다 말고 뭔가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앞으로 불쑥 내밀어진 와이번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삐익?”
바이칼은 미니사이즈 와이번의 오동통한 몸통을 반사적으로 건네받았다.
그리고 놈과 동시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 왜 또 접니까!”
“삐애애액!”
똑 닮은 표정으로 목청 높여 소리친 바이칼과 와이번을 물끄러미 바라본 쥬다스가 푸근하게 웃었다.
“둘이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는구나.”
‘어딜 봐서……?!’
더 이상 따졌다간 에단이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기에 바이칼은 깊은 한숨과 함께 와이번을 내려다보았다.
똘망똘망한 주홍빛 눈을 마주본 그는 이내 쯧 혀를 차고 말에 올라 로브 속에 놈을 넣어주었다.
그 안에 쏙 들어가 그의 무릎 위로 익숙하게 자리 잡고 누운 와이번은 옷자락 사이로 고개만 내밀었다.
“삐잉.”
“그러다 떨어진다, 너. 날지도 못하는 게.”
바이칼의 구박에도 빤히 그를 올려다본 와이번은 주둥이를 쩍 벌려 하품했다.
그리고 도로 로브 안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누웠다.
어린 와이번은 그동안 바다에서 여기저기 다치고 쫓겨 다니며 피로가 쌓인 탓에 금방 잠들었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도 새근새근 잘도 자는 와이번을 슬쩍 들여다본 바이칼이 피식 웃었다.
해안선을 따라 다시 죽 달리자 점심 무렵쯤 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 식사 시간이기도 하고 크리스티나와 와이번의 합류로 인해 간단하게나마 재정비가 필요했기에 그들은 마을에 들러 차분히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델피아 공작성이 있는 중심부에 비하면 인구가 적었지만 아름다운 바다 경관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이 제법 있어 마을은 한산하지 않고 적당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식당 테라스에 자리 잡고 앉아 해산물요리를 주문한 일행은 음식을 기다리며 데리고 다니게 된 와이번을 꺼내놓았다.
수탉 한 마리 크기만 한 푸른 비늘의 와이번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세이지가 신기한 눈으로 와이번을 살피며 물었다.
“상처는 따로 치료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친위기사단 중엔 치유술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점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지만 쥬다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 속성인 블루 와이번은 자체치유력이 무척 빠른 편이야. 잘린 뿔 같은 건 조금 늦게 돋겠지만 상처는 이미 거의 다 회복했을 게다.”
그의 설명대로 와이번은 비늘이 좀 뜯기긴 했어도 상처는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발견했을 당시 상처투성이였던 건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아 회복할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식당 근처에 관광객을 노리고 호객행위를 하는 잡상인이 나타났다.
“시엘 해안 기념품 있습니다! 델피아 성에선 구하지 못할 명화가가 그린 미술작품들 있습니다! 각종 목걸이, 반지 있습니다!”
대부분은 흘낏 보고 관심 없이 지나쳤지만 돌연 바이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쥬다스 님. 저 얼른 저기 좀 다녀와도 됩니까? 정말 잽싸게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거라.”
흔쾌히 수락이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여러 일이 겹치다보니...;;
방생했던 와이번을 다시 주웠습니다. 가랏, 몬스터보ㄹ...쿨럭.
늦었지만 남은 하루 즐거운 불금!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ㅎ
보내주시는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며,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