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3 / 0240 ----------------------------------------------
14장. 맹세
바이칼은 정말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잡상인에게 들렀다가 돌아왔다.
돌아온 그의 손엔 델피아령을 상징하는 푸른 유리구슬이 달린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그건 왜.”
에단이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묻자 바이칼은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저놈 저거 그냥 두기 너무 허전해서 말입니다.”
바이칼은 와이번에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러자 확실히 떠돌이강아지 같던 모습에서 보호자가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는 맹수나 몬스터 따위를 길들여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도 많았으니 나쁠 것 없는 액세서리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바이칼은 스태프를 꺼내 목걸이에다 마법진을 겹겹이 복잡하게 깔았다.
마법 효과를 부여하는 인챈트(Enchant)였다.
싸구려 관광기념품이 순식간에 마법 아티팩트로 바뀌었다.
“나중에 크기가 커져도 몸집에 맞게 늘어날 수 있도록 ‘맞춤’ 기능을 입력해 뒀습니다. 또 웬만한 충격에는 끊어지지 않도록 ‘강화’도 같이 걸었고요. 마지막으로 혹시 잃어버려도 위치를 알 수 있는 ‘추적’도.”
“인챈트는 하나만 거는 것도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고 들었어. 이렇게 쉽게 여러 개를 한꺼번에 걸다니 굉장하네!”
세이지도 어느 정도 마법을 다룰 줄 알았지만 침묵의 궁에 갇힌 후로는 이전과 같은 교육을 받지 못해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
같은 마법사로서 진심으로 감탄하는 세이지를 향해 바이칼은 민망해하며 답했다.
“어, 아뇨. 영구적인 인챈트도 아니고 소모성이라 몇 번 쓰다 보면 효과가 날아갑니다. 한 번에 여러 개 입력한 건 천재라서가 아니라 제 특기가 공격 쪽보단 빠른 계산력이라서요.”
“‘정확한’이란 수식어가 빠졌군.”
웬일로 에단이 칭찬에 가담했다.
그 바람에 괜히 찝찝해진 바이칼이 손사래를 쳤다.
“왜들 이러십니까? 아니 뭐……. 아무튼 전 마력 최대 보유량이 적어 고급 마법은 자주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기껏 칭찬해 줬더니 도로 자기 입으로 깎아먹는 그를 보며 에단이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허영이나 허세와는 거리가 먼 친구였다.
“목걸이가 참 잘 어울리는구나. 허면 이 아이의 이름은 생각해 보았느냐?”
“이름…… 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바이칼이 멍하니 굳어버리자 세이지가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계속 이 와이번, 저 와이번 하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허허. 정령에게만 이름이 필요한 건 아니지요. 모든 살아 있는 것이란 서로 이름을 부를 때에야 비로소 특별해지는 법이니 말입니다.”
정령술사인 콜도 동의했다.
그저 내키는 대로 뱀대가리, 이놈저놈 등으로 부르던 바이칼은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어, 그럼. 그냥 퍼렁이나 용돌이 정도로 부르면 안 될까요?”
“…….”
순식간에 싸한 시선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괴악한 작명센스를 뽐낸 바이칼을 야만인 보듯 흘겨 본 크리스티나가 서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대에게 품위까진 바라지 않아. 부디 그 유아적인 범주에서만 벗어나도록.”
“유, 유아적…….”
오랜만에 듣게 된 크리스티나표 독설에 바이칼은 얌전히 찌그러졌다.
시무룩해진 그를 향해 쥬다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바이칼. 저 아이를 보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느냐?”
‘떠오르는 것.’
힐끗, 시선을 주자마자 바이칼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와이번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대뜸 생각나는 단어를 뱉었다.
“비요.”
“비?”
“겨울에 내리는 찬 비 말입니다. 마침 저놈을 만난 계절도 겨울이고요.”
왜 눈이 아니라 비가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저 녀석을 보고 있자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미의 실수로 낯선 호수에 떨어지고 홀로 자라나 동족으로부터도 배척받게 된 블루 와이번.
놈을 보면 따뜻한 봄비나 너른 바다와는 다르게 차가운 겨울비가 떠올랐다.
“호오, 겨울에 내리는 비라. 좋은 심상이다. 바이칼 네게는 상대방의 특징을 잘 잡아내는 능력이 있구나.”
“옙? 제가요?”
“그래, 겨울비를 뜻하는 말로 ‘플루비’라는 단어가 있단다.”
주군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칭찬을 듣게 된 바이칼이 어색하게 뒷목을 매만졌다.
일행은 만장일치로 와이번의 이름을 ‘플루비’라 짓는 것에 동의했다.
이름을 얻게 된 와이번 역시도 기분 좋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따뜻한 분위기로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떠났다.
이제 해안을 따라 가지 않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다가 멀어지면서 짭조름한 바다 내음 대신 마른 풀 향이 났다.
한참 동안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났다.
저녁이 될 무렵까지 언덕을 오르내리다 제법 높은 정상에 올랐을 때쯤 그들은 정지하여 임시캠프를 꾸렸다.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지친 말들을 쉬게 하고 어둠을 밝히기 위해 불을 지폈다.
슬슬 봄이 찾아오고 있는 계절이지만 아직 밤에는 제법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마법으로 보온을 유지하고 모닥불에 뜨끈한 스프를 데워 몸을 녹였다.
“전하.”
쥬다스는 그들 사이에 끼지 않고 홀로 빠져나와 언덕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를 찾아온 크리스티나가 컵에 담은 스프를 전해주며 말을 붙였다.
“바람이 찹니다.”
“고맙다.”
부드럽게 웃어주는 그를 보고 나서야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헛된 걱정을 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반짝이는 녹색 기류가 쥬다스를 감싸고 있었다.
자연계 정령들이 그를 가호하고 있는 한 세상의 어떤 바람도 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
크리스티나는 민망함을 속으로 감추기 위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기서도 아직 바다가 보이는구나.”
문득 그가 한 손을 들어 언덕 너머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구불구불 자라난 마른 나무와 수풀 사이로 검은 바다가 보였다.
일렁이는 물결 위에 등대불빛이 별빛처럼 깜빡였다.
델피아 성에서 공녀로 태어나 자란 크리스티나에겐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루바흐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공부했던 이들과 함께 바라보는 밤바다는 조금 낯선 느낌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여유로운 분위기인 저 황태자와 있을 때면 꼭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할 필요가 없다 느껴졌다.
쓸모없는 시간은 한 순간도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말없이 서서 잘 보이지도 않는 먼 바다의 파도를 지켜보는 순간조차도 값지게 느껴졌다.
“……형님? 거기서 뭐 하세요?”
편안한 침묵이 감돌던 중 세이지가 그들을 찾아왔다.
어깨에 담요를 두른 채 따끈한 스프가 담긴 컵을 양손으로 모아 쥐고 있는 모습은 황자라기보다 영락없는 여행자였다.
“아, 공녀도 함께 있었군요.”
세이지는 어쩐지 방해한 기분이 들어 다가오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밤바다를 구경하던 중이었단다. 세이지 너도 궁에 있을 땐 보지 못했던 풍경이 아니더냐. 이리 와서 같이 바람이나 쐬자꾸나.”
눈치껏 돌아가려던 세이지였지만 형이 직접 손짓하며 부르는 탓에 쭈뼛거리며 곁으로 다가섰다.
보라는 바다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고아한 분위기로 말없이 서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이 먼저 갔다.
그 시선을 눈치챈 크리스티나가 살짝 목례하며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앞으로는 크리스티나라 불러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크리스티나. 저도 그냥 세이지로 충분합니다.”
“예, 세이지 님.”
이름을 부르는 순간까지 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어조였다.
세이지는 새삼스럽게 저런 냉랭한 성격의 여성과 친밀한 학연을 맺은 쥬다스가 대단해 보였다.
‘나 혼자라면 말 걸기도 어려웠을 거야.’
황자라는 신분과 상관없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를 잃고 유폐되면서 세이지는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길은 그저 꿀을 바르고 벌과 나비를 유혹하여 그럴듯하게 포장한 허황된 길이었음을.
‘진심으로 나를 따르고자 한 이는 아무도 없었어.’
그 많던 3황자 추종세력이 그야말로 연기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모래로 쌓은 성이나 다름없었다.
1황자를 따르는 파도가 밀려오자 부질없이 무너져 가라앉아 버리는 거짓된 복종이었다.
어미가 발라놓은 꿀이 마르자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꽃길을 걸어온 세이지는 그 속에서 사람의 진심을 얻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신기하지 않느냐?”
“……네?”
우울하게 발끝을 내려다보던 세이지의 고개가 퍼뜩 올라갔다.
쥬다스는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이지는 그 시선을 따라 함께 멀리 아른거리는 검은 바다를 응시했다.
“저리 늘 한결같아 보이는 파도가 가까이서 보면 매번 높이와 밀려오는 길이가 달라진다는 사실이 말이다.”
즐거운 기색으로 말을 꺼낸 쥬다스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같은 건 그들이 전부 파도라는 점뿐이지.”
“……전부 파도라는 점뿐.”
세이지는 멍하니 그가 한 말을 따라 읊조렸다.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쥬다스는 동생의 머리를 토닥여 주곤 말을 이었다.
“나는 말이다. 사람의 속을 아는 게 제일 어렵더구나. 처음엔 모르니까 피했다. 아예 도망쳐 버린다면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
“아…….”
세이지와 크리스티나는 동시에 그가 ‘백로황자’라 불리던 시절을 떠올렸다.
쥬다스가 뜻한 바는 전생의 경험이었지만 묘하게 들어맞는 상황인지라 두 사람은 알아서 이를 곡해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겁에 질려 등 돌리고 도망가는 모습도 누군가에겐 배신이고 상처였던 게야.”
“형님이 겁에 질릴 때도 있으셨어요?”
“그럼. 사람은 누구나 겁쟁이란다.”
쥬다스는 손주들에게 옛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처럼 허허로이 웃었다.
“그래서 피하지 않고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지. 사람이 사람을 알게 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이니 말이다. 서로 이야기를 해서 잘 풀린다면 상처받을 일도 싸울 일도 없지 않겠느냐.”
“그렇겠네요. 표현하지 않으면 서로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세이지는 이어지는 쥬다스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피해도 상처받고, 표현해도 풀리지 않을 때. 아무리 잘해보려 노력해도 결국 상처만 남는 관계. 그건 말이다.”
쥬다스는 두 아이들의 진지한 얼굴에 대고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냥 서로 맞지 않는 거야.”
“……?”
“네에?”
전혀 엉뚱한 결론이었다.
무엇이든 해결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형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세이지는 벙쪄서 입을 작게 벌렸다.
반면 잠깐 놀란 눈을 했던 크리스티나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지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 각기 취향과 사상이 다르니 어찌 한 사람이 모두를 만족시키겠느냐. 그러니 부딪칠 만큼 부딪쳐 본 후, 그래도 영 나와 맞지 않는다면.”
쥬다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따뜻함을 담은 녹색 온풍이 주변을 휘감았다.
사락 모습을 드러낸 유니가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상처를 주는 걸 두려워하지 말 거라.”
‘프리드.’
그건 이번 순례의 길에서 꼭 제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쥬다스는 그에 관련해서까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엘 해안 근방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ㅎㅎ 벌써 새해의 1월이 지나가버리고 2월이 찾아왔네요.
시간이 정말 빠릅니다...OTL
독자님들 모두 행복한 2월 시작하실 수 있길 바라며,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