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14화 (11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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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맹세

해안에서 벗어나 구릉을 타고 이동하는 사이 본격적으로 봄이 찾아왔다.

갈색과 회색뿐이던 시야에 푸르른 녹음이 지고, 마른 대지에 여린 새싹이 돋고 송이송이 터뜨릴 준비를 하는 꽃망울이 가지마다 맺혔다.

따뜻한 봄바람을 따라 말을 달리던 일행은 드디어 거대한 포탈관리소에 도착했다.

이후부터는 워낙 산맥이 높고 험준하여 안전관리차원에서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었다.

대신 포탈을 설치하여 근방 도시에 바로 입장할 수 있도록 연결해 놓았다.

초장거리까지 지원이 가능한 다른 포탈과 다르게 근거리 이동만 가능한 시설이었기에 평민들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비용이 저렴했다.

그래서 일행이 포탈에 도착했을 때에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따라 줄을 서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군말 없이 대기 줄에 합류했다.

“‘엘리아 비행장’이나 ‘베르젯 지하동굴’. 둘 중의 하나로 이어지는 포탈입니다.”

에단이 본래 가지고 있던 지도와 포탈 대기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가이드맵을 함께 펼쳐 보였다.

그들이 타려는 포탈은 단거리 전용 포탈인지라 행선지가 딱 에단이 말한 두 군데뿐이었다.

“저, 비행장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어요! 엘리아가 페가수스를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한 부족이라고 해서 관심이 많았거든요.”

늘 차분하게 굴던 세이지가 모처럼 고조된 기색으로 엘리아 비행장에 흥미를 보였다.

엘리아는 그만큼 유명한 도시였다.

하늘도시 엘리아.

신의 축복을 받아 구름보다 높은 위치에서도 흔들림 없이 떠 있는 거대한 섬이다.

그리고 이 엘리아에서만 서식하는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는 개체수가 적고 성질이 까다로워 사람이 길들이기 어려운 종이었다.

그들은 교황청 엘리시움에 있는 성녀의 수호견 헤브니시우스처럼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오랜 세월 같은 서식지에서  공존하며 살아온 엘리아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교류하며 그 냄새를 기억하여 따르긴 했지만 모든 이를 다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중 페가수스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그 등에 오를 수 있었다.

높은 고도를 좋아하며 태어난 고향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페가수스의 습성상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또한 엘리아 사람들도 귀한 페가수스를 함부로 다른 곳에 분양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페가수스란 하늘도시 엘리아에서만 볼 수 있는 명물이자 신비로운 환수였다.

“오? 마침 엘리아 쪽으로 죽 직진하면 투르케 사막에도 들를 수 있겠는데요.”

지도를 빤히 들여다보던 바이칼이 손가락으로 엘리아와 투르케를 이어보이며 말했다.

쥬다스가 루바흐를 졸업할 시기에 정령을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아벨도 연구소에서 나와 투르케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투르케의 이름을 걸고 멸망한 대지를 처음부터 다시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벌써 3년이 지났으니 황량하던 사막이 어찌 변했을지 모두가 궁금히 여겼다.

차마 떼는 부리지 못하고 엘리아가 표시된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세이지와 은근히 동조하는 나머지 일행을 번갈아본 쥬다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엘리아로 가자꾸나.”

“예, 형님.”

차분한 척 대답하긴 했지만 세이지는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구름보다 높이 떠 있는 섬이라 하는데 무섭진 않고?”

“아…….”

“어억.”

탄성과 탄식이 엇갈렸다.

“사실 그 점을 제일 기대하던 참이에요. 어릴 때 제일 많이 읽었던 동화책이 페가수스 전설이었거든요. 그래서 뭔가 책 속 세상에 가는 느낌이라. 게다가 구름 위라고 하니 꼭 천국 같기도 하고요.”

세이지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점점 줄어드는 대기 줄을 바라보았다.

이제 포탈이 코앞이었다.

반면 바이칼은 다른 의미로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천국이라뇨? 전 가급적이면 오래오래 이 땅에서 살아 있고 싶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서요. 뭐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깔려 있고 이런 것만 아니라면 버틸 만은 하겠지만.”

“의지로 극복해라.”

“……왜 거 아예 무좀도 의지로 극복하라고 하시죠?”

에단의 칼 같은 조언에 바이칼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구시렁거렸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포탈에 입장했다.

“신분이 확인되었습니다. ‘엘리아 비행장’, ‘베르젯 지하동굴’ 중 목적지를 선택해 주십시오.”

“엘리아 비행장으로 가겠습니다.”

“목적지를 엘리아 비행장으로 설정합니다. 엘리아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관리인의 사무적인 안내와 함께 포탈이 열렸다.

단거리 이동이라고 해도 포탈의 작동 원리는 같았다.

천둥 치듯 번쩍이는 마력의 물결 속으로 발을 딛자 곧장 반대편 포탈의 좌표로 이동되었다.

고오오오-

도착하자마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옷자락을 휘날렸다.

마치 거대한 고래가 낮게 우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들이 도착한 포탈관리실은 다른 지역처럼 실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아에서 제일 높은 바위꼭대기에 위치했다.

그 덕분에 도착하자마자 한눈에 엘리아의 경관을 내다볼 수 있었다.

“허.”

한숨처럼 경탄이 흘러나왔다.

호화로운 황궁이나 잘 꾸며놓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웅장함이 이곳에 있었다.

우선 깎아 지르는 절벽 사이사이에 새둥지처럼 집을 지어놓았다.

또한 하늘 위에 떠 있는 섬이지만 근처에 부유하고 있는 자잘한 폭포가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강물이 섬 테두리를 돌고 있었다.

포탈관리실이 위치한 장소는 하늘도시의 중앙탑이었는데 페가수스를 관리하는 역할과 더불어 비행허가증 발급 및 분쟁조정 등 관리를 맡았다.

뿐만 아니라 탑에도 층마다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많은 사람이 거주하기도 했다.

‘이곳이 신의 축복을 받은 하늘도시 엘리아.’

감탄하기로는 쥬다스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그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중 이렇게 관광지로 유명한 장소는 일부러라도 걸음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그에게 두려움만 안겨줄 뿐이었다.

당시 그에겐 사람을 품을 용기와 여유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힘에 대한 불안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많은 일행과 함께 편안히 유명 관광지를 방문한다는 건 당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호사였다.

새삼 자신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 쥬다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쥬다스 님?”

“……아.”

다른 일행이 경관에 감탄하는 사이 엘리아를 찾은 다른 관광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쥬다스에게 크리스티나가 말을 걸어왔다.

“혹 무슨 일이라도.”

그녀뿐 아니라 에단과 바이칼, 세이지, 그리고 콜과 나머지 친위대까지 전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어린 따스한 시선을 느낀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란다. 그저 너희와 함께 이런 멋진 장소에 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던 참이야. 정말 기쁘구나.”

“…….”

이번에 말문이 막힌 건 크리스티나 쪽이었다.

그들의 주군은 늘상 어른스럽게 굴다가도 가끔 순진한 아이마냥 지나칠 정도로 꾸밈없이 표현할 때가 있다.

“고맙다.”

바로 지금처럼.

웃음기를 담고 맑게 빛나는 금안을 정면에서 마주한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숙임으로 겨우 허물어지려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포탈관리실 앞은 마침 비행장이었다.

마치 바다의 항구처럼 길게 뻗은 활주로가 탑을 중심으로 꽃잎처럼 뻗어 있었다.

총 8개의 게이트로 이루어진 활주로는 푸드득거리는 날갯짓소리로 가득했다.

주변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페가수스를 보며 문득 바이칼이 안아 들고 있던 블루와이번 플루비를 내려다보았다.

“뱀대갈…… 아니, 플루비. 저기 봐봐. 말도 날개 달면 날아다닌다. 넌 인마 명색이 용족이란 놈이 왜 날지를 못하냐.”

“삐이이?”

플루비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비행을 배우지 못한 와이번은 자신이 날 수 있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바이칼은 답답함에 혀를 쯧 하고 찼다.

“으이그, 아주 날개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지.”

“삐익! 삐이익!”

“어쭈? 이거 눈깔 보소. 너 지금 반항하냐?”

“삐이―!”

비꼬는 말을 알아들은 플루비가 거칠게 날개를 파닥이며 불만을 토로했다.

에단은 잠깐 사이 또 투닥거리는 둘을 보곤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들었다.

“……차라리 잘됐군. 온 김에 여기서 비행 훈련이나 시켜봐라.”

“예엣?”

그의 한숨 섞인 제안에 버둥거리던 플루비의 목덜미를 잡아 빨랫감처럼 대롱대롱 들고 있던 바이칼이 당황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훈련이요? 이 겁쟁이를 데리고 무슨. 아마 훈련하라고 갖다놓으면 허공에 뜨기는커녕 고대로 추락사할 겁니다.”

“삐애애앵!”

저 욕하는 말은 귀신같이 알아듣고 빼액 울어대는 플루비였다.

그 순간 바이칼이 잡고 있던 놈의 뒷덜미를 허공에서 휙 놓아버렸다.

“……!”

플루비는 날개를 파닥거릴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다.

툭 떨어져 버린 플루비를 가리킨 바이칼이 에단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거 보십쇼. 겁만 무지하게 많다니까요. 이런 녀석을 데리고 훈련을 하라고요?”

“바이칼.”

그러나 대답은 엉뚱한 데서 돌아왔다.

찔끔한 바이칼이 고개를 돌리자 플루비를 향해 쭈그린 쥬다스가 보였다.

플루비는 바닥에 나동그라지기 직전 녹색 바람에 휘감겨 동실 허공에 멈춘 상태였다.

커다란 주홍빛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플루비를 아이처럼 안아 든 쥬다스가 등을 토닥여 주며 일어섰다.

“겁이 많다는 건 ‘할 수 없다’의 지표가 될 수 없단다.”

“그건.”

“너는 지금 이 아이가 날아본 적 없다 하여 앞으로도 날 수 없을 거라고 낙인을 찍은 셈이야. 그 판단을 왜 네가 하느냐.”

“……죄송합니다.”

“사과는 이 아이한테 하려무나.”

쥬다스는 안고 있던 플루비를 다시 바이칼에게 넘겨주었다.

녀석은 두 날개를 추욱 늘어뜨린 채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그 바람에 바이칼은 명령이고 뭐고 정말로 미안해지고 말았다.

“플루비.”

“…….”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

바이칼의 사과에도 플루비는 기운 없이 눈물만 글썽거렸다.

그러자 바이칼도 덩달아 시무룩해져 속으로 자책했다.

‘어우 씨. 그러게 왜 애를 울리냐 울리길.’

답답함에 스스로 머리를 헝클어 엎은 바이칼은 플루비를 바로 눈앞까지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쳤다.

“좋아. 날 수 있게 도와주면 되는 거지?”

“삐이?”

그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면서 축 늘어져 있던 긴 꼬리가 한차례 살랑였다.

쥬다스는 어차피 여러 영토를 돌아다니며 그 생활을 이해하고 감찰하는 게 목표였던지라 흔쾌히 그들의 비행 훈련을 수락했다.

중앙탑에는 넓은 실내 정원도 있었다.

정원을 거닐며 바이칼은 즉각 첫 번째 훈련에 돌입했다.

크리스티나가 귀찮음이 가득 담긴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이지?”

“흠. 혼자 자라서 나는 법을 모른다고 했잖습니까. 일단 다른 날짐승들은 어떻게 나는지 보고 배우는 게 좋겠습니다!”

마침 관광객이 뿌리는 먹이에 퍼덕거리며 달려드는 비둘기 떼가 보였다.

바이칼은 그사이에 플루비를 풀어주었다.

“삐…….”

“구구구구!”

“구국 구구구구!”

통통하게 살찐 비둘기 떼는 날지는 않고 신명나게 뛰어다녔다.

플루비는 먹을 것을 찾아 열심히 바닥을 콕콕 쪼고 다니는 비둘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따라서 바닥에 주둥이를 대고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거지냐―! 그딴 걸 배우라고 풀어둔 게 아니야!’

한 번 플루비를 울린 전적이 있는 바이칼은 머리를 싸매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과연 바이칼은 플루비를 비행포켓몬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사족이지만 포켓몬게임할 때 날지 못하는 리자몽 때문에 고통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날개가 있는데 왜 날지를 못하니!ㅠㅠ)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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