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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맹세
신룡 소동은 유니의 바람이 플루비를 멈춰 세우고 나서야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그 와중에도 살겠다는 집념으로 플루비의 뿔을 붙들고 놓지 않았던 바이칼은 지상에 내려오자마자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초췌한 몰골로 픽 엎어졌다.
루니의 도움을 받아 다시 미니 와이번의 형태로 돌아간 플루비도 그 옆에 나란히 엎어졌다.
크리스티나가 한심한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결국 제대로 비행을 익힌 건 아니군요.”
“……그래도 날갯짓은 할 줄 알게 된 것 같습니다만.”
“착륙이 불가능한 날갯짓은 결국 독이 될 뿐이라 생각하지 않나, 그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같은 기사단원인 바이칼을 감싸주려던 에단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러자 쥬다스가 작게 웃으며 대신 답했다.
“크리스티나야, 처음부터 달릴 줄 아는 사람은 없단다. 플루비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와 같으니 큰일을 해낸 셈이야.”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에단을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태도로 시원하게 과오를 인정하는 크리스티나였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세이지는 적응이 되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크리스티나 델피아. 남에게 쉽게 굽힐 여인이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본인은 숨기려고 무던히 애쓰고야 있지만 때때로 드러나곤 하는, 단순히 충의로만은 보이지 않는 눈빛까지.
여러 의미로 자신의 형님은 대단했다.
“세이지 님은 어떠셨습니까?”
“어…?”
“허허. 동화책에서만 보던 엘리아를 직접 방문해보신 소감 말입니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지켜보던 세이지의 곁에 언제부턴가 콜이 서있었다. 세이지는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묻는 콜을 보고 흠칫 놀랐다가 이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엘리아는 상상한 그대로야. 날개 달린 말도 하늘에 떠있는 폭포와 바윗돌도 전부 멋있었어.”
“오, 그렇습니까? 다행이로군요.”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세이지는 나란히 엎어져있는 바이칼과 플루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누군가의 작은 지지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게 제일 신기해. 그러니까, 음. 이 세상엔 아직 환상이 남아있구나?”
까맣게 물든 세상에 형이라는 믿고 따를 빛줄기가 하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빛을 따라 나온 낯선 세상에선 지금껏 본 적 없고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곧 사라질 환상 말고 사람들이 꿈꾸는 환상 말이야. 내가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 같은 거. 그걸 지켜주는 게 우리들 역할이 아닌가 하고.”
“허허, 좋은 생각이로군요.”
콜은 그저 웃었다.
그가 자신을 챙기는 게 형을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지만 세이지는 이마저도 감사히 받아들였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
“소인이 어찌 감히 고귀한 분들께서 하실 일을 판가름하겠습니까.”
“아니. 코르토반, 지금 내가 말한 ‘우리’에는 여기 있는 모두를 포함시켜서 들어줘.”
세이지의 올곧은 금안을 바라본 콜이 소리 없이 감탄했다.
‘영혼과 상관없이 결국 피는 피를 닮는 겐가.’
소년은 정말 놀랍도록 제 형을 닮아가고 있었다.
마치 날개가 있어도 자신이 날 수 없다고 착각하고 살아온 플루비가 비행에 대해 깨치듯 쥬다스를 만남으로 인해 그간 가라앉아 있던 총기와 따뜻함이 서툴지만 확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내심 비뚤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시간이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콜은 이를 공경하는 뜻을 담아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외람되오나 소인은…… 오히려 환상을 지키는 건 꿈꾸는 자들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그러니 세이지 님, ‘우리’는.”
잠깐의 텀을 두고 인자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많은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나이의 어린 황자는 그 뜻을 이해하고 밝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살짝 돌아보고 있던 쥬다스도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특별히 도움 주지 않아도 동생은 충분히 잘 자라고 있었다.
일행은 엘리아에서 사흘간 더 머문 후 발을 떼었다.
섬에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단거리 포탈을 타자 구름보다 높이 떠 있는 섬에서 순식간에 반대편 산맥이 시작되는 낮은 초입의 포탈관리실에 도착했다.
창공이 아닌 평범한 지상에선 쉴 새 없이 푸드덕거리던 페가수스도 하늘에서 떨어지던 작은 폭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잎이 큰 활엽수가 파란 하늘로 가지를 뻗었을 뿐이다.
엘리아에서 머무는 동안 비행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플루비와 함께 생사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나든 바이칼은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으로 말에 훌쩍 올랐다.
“크으! 살았다…….”
“왜 그러나, ‘신룡의 기사님’.”
다각다각 그 옆으로 말을 몰고 다가온 에단이 툭 던지듯 말을 건네며 정지했다.
동시에 바이칼의 표정이 곰팡이 핀 빵조각처럼 썩어 들어갔다.
“그거 하지 말아주십시오.”
“뭘 말이지?”
“신룡의 어쩌고 하는 말똥 같은 호칭이요. 저 지금 진짜 소름 돋았습니다.”
“신룡의 기사님 말인가.”
천연덕스럽게 한 번 더 언급한 칭호를 들은 친위대 사이에서 픽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늘도시 엘리아에서 머문 3일간, 바이칼과 플루비는 제법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며 제대로 비행할 줄 모르는 와이번과 그 파일럿이란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굉장한 속력으로 하늘을 가르는 플루비와 그 위에 올라탄 바이칼의 실루엣을 보고 모두들 이를 가리켜 ‘신룡의 기사’라 입을 모았다.
장본인인 바이칼과 그를 아는 일행들이 듣기엔 황당무계한 칭호였지만 굳이 나서서 해명하는 것도 우스꽝스러웠기에 소문은 그대로 굳혀졌다.
진상이야 어찌 되었든 플루비의 비행 속도만큼은 엘리아의 어떤 페가수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또한 균형을 잡고 날갯짓하는 법도 본능적으로 깨우쳐 몹시 안정적으로 날았다.
하지만 아주 어린 새끼 때 어미가 하늘에서 놓치는 바람에 호수로 뚝 떨어진 경험이 있는 플루비는 높이 올라갈수록 두려움을 느끼고 제어력을 잃어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놈은 일단 날아오르는 데엔 수월히 성공했지만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러다 보니 의지대로 방향을 꺾거나 착륙하는 법은 끝내 익히지 못한 채 엘리아에서 내려오게 되고 말았다.
그러니 현재로선 플루비의 비행은 불완전하다 못해 가히 엉망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유니가 강력한 바람 길을 만들어내 거의 반강제로 착륙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체력이 다할 때가지 허공을 떠돌다 추락하고 말 수준이다.
그런 상황에서 붙여진 ‘신룡의 기사’란 칭호는 놀림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에단은 일부러 그 칭호를 사용해 부르곤 했다.
“기사단 내에 위명이 붙는다면 잘된 일이지. 입 막을 생각을 하지 말고 칭호에 걸맞은 존재로 거듭나도록 노력을 함이 어떤가?”
“그럼 단장이 훈련시키십쇼. 직접 거듭나시면 되잖습니까?”
바이칼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했지만 에단은 단호히 이를 묵살했다.
“플루비는 주군께서 직접 네게 훈련을 일임하셨다. 따라서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명예로운 일이지.”
“……예, 뭐. 명예 좋죠. 고공낙하하거나 심장마비로 죽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의 투덜거림을 끝으로 십여 기의 말이 동시에 흙을 박찼다.
산맥의 끝자락인 만큼 숲은 그리 깊지 않았다.
엘리아를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의 통행이 잦았기 때문에 길도 헷갈리지 않게 잘 나 있는 편이었다.
그대로 길을 따라 죽 달리기만 하면 숲을 벗어나 큰 도시가 하나 나올 것이고, 그 도시가 바로 투르케 사막과 맞닿아 있는 델피아 영토의 끝자락이다.
그 수순대로만 말을 달리면 될 여정이었으나 쥬다스 일행은 중간에 발걸음을 묶는 사건과 하나 조우하고 말았다.
「전방에 도적단. 별로 대단한 애들은 아닌데 피해자가 있어.」
숲의 정취를 느끼며 오래된 동요를 흥얼거리던 유니가 문득 몰려든 봄바람을 감지하곤 브리핑했다.
「돈 받고 움직이는 여객마차인가 본데 호위도 없이 마부랑 손님 딸랑 둘? 뭐야, 얘네 이상해. 보통은 용병을 쓰는데 손님이 돈이 모자랐나? 아무튼 마부는 죽었고 손님은 도적이랑 실랑이 중.」
“고맙다, 유니.”
「이 정도로 뭐얼.」
말은 그러면서도 유니는 기쁘게 웃었다.
마주 미소 지어준 쥬다스는 천천히 달리던 말의 고삐를 살짝 당겼다.
“에단.”
“예.”
“이 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야. 조금 서두르자꾸나.”
쥬다스가 상황을 간단히 전달하자 에단은 그의 뜻에 따라 손짓으로 나머지 일행에게 속도를 높일 것을 지시했다.
얼마 가지 않아 유니의 말대로 반파된 마차와 칼에 베여 즉사한 마부, 그리고 살아남은 여행객을 끌고 가려는 도적단이 발견되었다.
“살려주세요!”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은 여행객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갑작스런 다수의 등장에 도적단은 똥 밟은 표정으로 무기를 들었다.
흉흉한 기세로 번뜩이는 날붙이를 발견한 크리스티나가 제일 먼저 활을 꺼내 말을 탄 채 겨누었다.
하얀 손가락 끝에 맺힌 마력화살이 자비 없이 시위를 떠났다.
피잉!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여행객과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도적의 허벅다리를 꿰뚫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도적을 선두로 빠르게 날아온 다음 화살에 앞쪽에 있던 도적들이 차례로 허벅지를 맞고 나뒹굴었다.
“후, 후퇴!”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도적단은 과감히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나려 하였다.
하지만 에단이 이끄는 기사단은 단 하나의 도망자도 허용하지 않고 모조리 그들을 쓰러뜨렸다.
치명상을 피해 팔이나 다리를 공격하여 무력화시킨 후 속박마법진을 설치해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런 다음 즉사한 마부의 시신을 수습하고 겁에 질린 여행객을 안정시키는 등 모든 상황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눈물콧물 흘려가며 공포에 떨었던 여행객은 위기상황을 너무나도 손쉽게 해결해 버린 그들을 보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특히 가장 먼저 활을 쏘며 난입한 크리스티나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평소엔 풀고 다니던 머리카락이었지만 편의를 위해 틀어 올려 머리띠로 고정시킨 그녀는 품격 있는 기사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네, 네. 구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다른 기사의 질문에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한 여행객은 뒤늦게 몰려오는 안도감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았다.
차림새는 남성복이었고 맨 얼굴에 긴 머리를 질끈 묶긴 했으나 누가 봐도 여자가 남장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는 외관과 목소리였다.
말을 탄 채 그 앞에 다가온 크리스티나가 서늘한 어조로 물었다.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가.”
“……!”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해 낸 인형 같은 외모의 그녀를 가까이서 보게 된 여행객이 흠칫 숨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두려움에 떠는 거라 판단한 크리스티나는 일단 자신부터 소개했다.
“우리는 캘런가의 두 도련님을 모시는 가신들이다. 큰도련님의 명으로 상황에 끼긴 했으나 정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설명해 보도록.”
“아! 역시 기사님들이셨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유리엘이라고 해요.”
유리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인사부터 했다.
어설픈 남장부터 티가 났지만 화장을 하지 않았어도 잡티 하나 없이 고운 얼굴에 고생이라곤 해본 적 없는 하얗고 보드라운 손이 그녀가 귀족가 영애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정상 남장을 하긴 했지만……. 시즈 가문의 장녀예요.”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자기소개였지만 유리엘은 배시시 웃으며 민망함에 볼을 붉혔다.
상황을 설명해 보라 했더니 묻지도 않은 신상정보를 제 스스로 홀랑 털어버린 유리엘을 보며 크리스티나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철없는 가출 소녀로군.’
그러나 상황조사는 해야 했기에 모른 척 다시 질문하려던 순간 유리엘의 수줍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경의 이름은요?”
“……크리스.”
본명을 밝히기엔 여러모로 귀찮았던 크리스티나는 대충 둘러 대답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해는 오해를 낳고.... (?)
오늘 커피를 머그컵으로 7잔쯤 마셨는데 도저히 잠이 안깨네요. ㄷㄷ
후, 이제 카페인도 소용없는 것인가... 크큭... 나의 이 왼손에 깃든 흑염룡을 깨워야할 때가 온 모양이로군....
...는 제가 졸리긴 많이 졸린 모양입니다. 쿨럭;
벌써 한 주의 반을 지나왔네요!ㅎ 오늘 하루도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리며,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