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7 / 0240 ----------------------------------------------
14장. 맹세
델피아가 특유의 투톤으로 빛나는 바다색 머리색은 자세히 관찰했을 때 특이한 편이긴 했으나 지금처럼 돌돌 말아 틀어 올린 상황에선 티가 나지 않았다.
딱히 남장을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간편한 여행자 차림에 가뿐히 틀어 띠를 두른 머리, 여자치고는 훤칠하게 큰 키 등으로 인해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말달리며 활을 쏘던 모습까지 목격한 유리엘은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멋대로 크리스티나의 성별을 오해했다.
‘크리스 경? 으으, 이름까지 완전 멋있어. 꼭 소설 속에 나오는 백마 탄 기사님 같아……!’
유리엘은 크리스티나를 완전히 미소년 기사쯤으로 단정지어 버렸다.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크리스티나는 갑자기 볼을 붉히는 그녀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상황 설명은 단순했다.
일단 크리스티나가 추측한 대로 유리엘은 가출 소녀가 맞았다.
이유는 집안에서 추진한 정략혼을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전 아직 열여덟 살이라고요!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남자의 재취 자리로 들어가라니, 죽기보다 싫어요.”
유리엘의 가문은 약소한 남작가로 지닌 재산이 빈약하고 지위도 낮았다.
그런 와중에 들어온 혼담은 나이 서른 중후반의 고위귀족 재취 자리였다.
그나마도 상대측에서 웨이브진 금발에 장밋빛 눈동자를 가진 유리엘의 반반한 얼굴에 반해 겨우 들어온 혼담이다.
전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지만 유리엘이 꿈꾸던 결혼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할 거야!’
장녀라는 이유로 집안을 위해 팔려가는 결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유리엘도 이런 자신이 철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생에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가족인 걸요. 내 결혼 상대만큼은 스스로 정하고 싶어요.”
‘이런 일을 당하고서도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건가.’
정략혼을 피해 급히 도망치듯 나온 탓에 여행 자금조차 준비하지 못한 걸로 보였다. 호위도 없이 달랑 혼자 집을 나선 그녀는 출발한 지 하루 만에 도적단을 만나 무력하게 당하고 만 듯 했다.
눈앞에서 마부가 죽었고 예쁘장한 생김새의 유리엘은 납치당해 끔찍한 일을 겪을 수도 있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도대체가 멍청한 건지 용감한 건지 판단이 어려운 상대였다.
그리 여긴 크리스티나는 더 신경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휙 돌아섰다.
“생존자는 다친 곳 없이 상태가 양호합니다.”
“다행이구나. 근처 도시에 신고를 넣어두었으니 곧 처리하러 올 게야. 흠, 굳이 우리가 자리를 지킬 필요까진 없어 보이니 먼저 출발하자꾸나.”
“예.”
도적들은 손발을 꽁꽁 묶었고 통신마법을 통해 신고해 두었기에 그냥 두면 알아서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시신과 피해자에 대한 뒤처리도 지역관리인의 몫이었다.
쥬다스 일행이 떠날 기미를 보이자 유리엘은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가, 가시려고요?”
“곧 도시에서 사람을 보내올 것입니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혼자 이 무서운 도적 떼 사이에 남으라는 말씀이세요?”
“저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그래도 혼자선 무서워요! 차라리 저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네? 다른 도적들이 또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자신을 홀로 두고 갈까 불안해진 유리엘은 급기야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쥬다스의 옷깃을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부탁드려요. 근처 도시까지 만이라도 좋으니 여기서 데리고 가주시면 안 될까요? 네?”
탁!
그 무례한 손길을 뿌리친 건 쥬다스가 아니었다.
유리엘의 손목을 잡아채 그로부터 떼어낸 크리스티나가 차가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타인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무례하군요. 아무리 가문이 약소하다 한들 레이디로서 기초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했습니까?”
“앗. 크리스 경! 이건…….”
너무 불안했던 나머지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인지라 유리엘도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어깨를 움츠렸다.
귀족 가문 사이에선 여자가 타인, 특히 남성의 몸에 함부로 먼저 접촉하는 것을 천박한 행위로 여긴다.
이를 크리스티나가 직설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모시는 주군에게 결례를 범한 상황에서 기사가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유리엘은 훌쩍이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쥬다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듣고 보니 홀로 이곳에 남는 것도 무서운 일일 수 있겠습니다.”
쥬다스는 힘없는 어린 소녀 입장에선 아무리 포박되어 있다고 한들 사람을 죽인 도적단 사이에 혼자 남아 도움을 기다리는 일은 정서적으로 가혹한 처치임을 인정했다.
예전 같았으면 모르고 지나쳤겠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여전히 굳은 표정의 크리스티나를 불렀다.
“크리스.”
“예.”
급조된 가명 아닌 가명을 용케 눈치채고 즉각 써먹는 쥬다스를 향해 그녀의 고개가 공손이 숙여졌다.
싸늘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노곤노곤 녹아내리자 유리엘은 일전 세이지가 그랬던 것처럼 멍하니 그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네가 맡아줄 수 있겠느냐.”
마차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말을 타고 이동하던 일행이 유리엘을 데려가기 위해선 누군가 함께 말을 타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 일행은 크리스티나를 제외하면 전부 남성이었기 때문에 귀족영애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녀가 적격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잠시 불편한 기색을 띠었지만 이를 금방 지워내고 명에 복종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고맙다, 크리스.”
얼결에 댄 가명이긴 했지만 어쩐지 들을 때마다 애칭을 불리는 착각이 일어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멋진 기사로 착각하고 있는 유리엘도 함께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어머! 어떡해. 저 기사님과 같이 말 타고 가는 거야? 왜 하필 저분에게 날? 이쯤 되면 정말 운명 아닐까!’
유리엘은 한껏 소녀스러운 망상에 부풀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정말로 크리스티나의 말에 함께 올라탔다.
말도 제 주인을 닮아 다른 말보다 늘씬하고 아름다운 흰털을 뽐내고 있었다.
신기한 눈으로 보들보들한 갈기를 쓸어보던 유리엘은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떨어지지 않기 위해 크리스티나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저기, 크리스 경.”
크리스티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묵묵히 앞을 보며 말을 몰 뿐이었다.
그래도 유리엘은 실망하지 않고 해맑게 질문했다.
“여긴 무슨 일로 지나가던 중이었나요?”
“…….”
“여행? 지령? 아니면 만나러 갈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요?”
계속되는 질문에 크리스티나는 짧게 한숨을 뱉었다.
“주군의 뜻을 따를 뿐. 당신에게 밝힐 의무는 없는 것 같군요.”
“그건, 으음. 그렇죠.”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대꾸에 유리엘은 팍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며 크리스티나의 등을 향해 반짝이는 시선을 보냈다.
“경은 정인이 있나요?”
정인(情人).
이제 막 성년이 된 크리스티나로선 제법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든 단어였다.
델피아의 하나뿐인 공녀인 그녀에게도 제법 많은 혼담이 들어왔다.
정략혼을 강요당한 유리엘과 달리 선택권이 주어졌고 크리스티나는 이를 전부 단칼에 거절했다.
‘바라지 않는다하면 거짓이겠지만.’
순전히 혼자만의 욕심이었다.
드러내 그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철저히 제 감정을 숨기고 대답했다.
“없습니다.”
“어! 정말요?!”
들뜬 어조로 기뻐하는 유리엘의 반응을 접하자 이상하게 속이 울컥했다.
유리엘이 그녀의 비밀스런 감정에 대해 알 리는 없었지만 괜히 놀림받는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한층 싸늘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은 감정놀음 따위에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헤에, 크리스 경은 지금 시간이 소중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거네요?”
철이 없다는 건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만큼 순진하단 뜻이기도 했다.
정곡을 찔린 크리스티나가 입을 다물자 유리엘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부러워요. 전 지금 마냥 제 시간에서 도망치고 싶을 뿐인데.”
장미꽃잎을 닮은 눈동자엔 마냥 웃음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도망간 지 하루 만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한심하죠? 정말 무서운 일투성이네요.”
크리스티나는 답하지 않았다.
슬슬 그녀의 냉대에도 익숙해진 유리엘은 씁쓸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줄곧 침묵이 이어졌다.
말달리는 소리만 사방에서 다가닥다가닥 울렸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게 아니라.”
한창 달리다말고 크리스티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경……?”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야만 할 때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걸 위해서 도망치는 건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으니까.”
유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를 천천히 휘었다.
“고마워요. 친절하신 분.”
다시 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유리엘은 시원스레 웃었다.
출발할 때는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더니 지금은 조금 풀어진 두 여인을 보며 바이칼과 에단이 서로 시선을 교류했다.
“워. 크리스…… 님도 많이 변하셨네요.”
“원래 그녀는 자신보다 어린아이들에게 약했지.”
떠올려 보면 동갑인 바이칼과 한 살 연상인 에단에게는 늘 강하게 굴던 그녀가 자신보다 어린 쥬다스나 리이나 등에게만큼은 그리 모질게 굴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에단의 의견을 듣고 바이칼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취향이신 건가…….”
“바이칼.”
“예, 뭐. 존중해 드리죠.”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보며 에단도 더는 제지하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뱉었다.
도시까지는 금방이었다.
투르케 사막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위치한 큰 도시였기에 이곳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아무래도 사막을 앞둔 지점이다 보니 사막 여행을 할 때 필요한 물품이나 비상식량, 의상 등을 판매하는 장이 열려 있었다.
사막 동물이나 선인장 등 사막에서 볼 수 있는 특산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일행은 다른 걸 살피기 이전에 우선 도시 관리를 담당하는 귀족가 저택으로 유리엘을 데려다주려 했다.
하지만 막상 도시에 들어오니 그녀가 이를 한사코 거부했다.
“도와주신 건 감사드려요. 하지만 전 저택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집으로 안전히 돌아가려면 저택에서 보호를 받는 편이 좋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죠! 저는 아직 집에 들어가선 안 되거든요.”
유리엘은 말에서 내려 옷자락을 탁탁 털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저. 이대로 돌아가면 정략결혼이라고. 제 운명의 상대를 찾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아요.”
“으음…….”
쥬다스마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굳건한 의지 표출이었다. 그리고 그건 동시에 매우 불안하기 짝이 없는 순진한 의지였다.
「쟤가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네.」
「사기 잘 당할 것 같다요!」
「응, 사기보단…… 사고를 몰고 다닐 것 같은 인간이네요.」
정령들마저 짠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유리엘은 그런 줄도 모르고 힘차게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정말 잊지 않을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하려는 일에 행운이 함께하길.”
쥬다스는 더 이상 그녀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가 깔끔히 돌아서자 유리엘은 아쉬운 얼굴로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특히 크리스티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그녀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신이 진정 바라는 걸 위해서 도망친다면…….”
‘크리스 경, 당신도 있나요? 정말 바라는 것.’
유리엘은 멍하니 크리스티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곤 그들이 북적북적한 사람들 사이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 전에 자기도 모르게 따라서 후다닥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본격 삼각관계 로맨스판타지 이그레트... (?)
....가 아니라 별로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오해를 받게 된 크리스티나입니다. ..힘쇼..
이제 내일만 지나면 연휴의 시작이네요! 행복합니다.ㅠㅠ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리며,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