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그레트-118화 (11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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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맹세

쥬다스 일행은 투르케에 대한 소식도 듣고 끼니도 챙길 겸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식당에 들어가 자리 잡았다.

음식을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뒤돌아 기대며 그를 불렀다.

「이그레트.」

“알고 있단다.”

“예? 뭐가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바이칼이 그의 말에 냉큼 반응했다.

“그 아이가 우리를 따라오는 모양이야.”

“그 아이라 하심은…… 설마 그 가출 소녀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까 각자 갈길 간다고 잘 갈라져놓고 왜 또 따라온답니까?”

쥬다스는 유유자적하게 테이블 위에 손깍지를 끼곤 턱을 괴었다.

웃음기를 담은 금안이 맞은편에 앉은 크리스티나에게로 향했다.

“글쎄다. 아마도 ‘크리스 경’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싶다만.”

짓궂은 농에 크리스티나의 표정에 옅은 낭패감이 드리워졌다.

“하면 제가 직접 만나 돌려보내겠습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인 크리스티나를 부드럽게 제지시킨 쥬다스가 재차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할 말이 있다면 직접 와서 전하겠지.”

그의 말대로 유리엘은 계속 일행의 주위를 맴돌며 어찌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뭐라 말해야 좋을지도 모를뿐더러 통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식사를 끝내고 나와 장에 들러 사막에서 필요한 용품을 구비할 때까지도 우물쭈물하며 어설프게 뒤를 밟았다.

그 때문에 투르케 사막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을 즈음에는 딱히 정령의 감시가 아니더라도 모든 일행이 그녀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을 지경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망설이는 걸까요? 이러다가 사막까지 쫓아 들어오면 위험할 것 같은데.”

세이지가 신경 쓰인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내버려 두십쇼. 아무리 그래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사막까지 따라 들어오겠습니까? 아벨 그 녀석이 관리를 시작했다곤 해도 애초에 투르케가 얼마나 넓고 위험한 사막인데요.”

쥬다스 대신 바이칼이 손을 휘휘 저으며 대꾸했다.

그 와중에도 유리엘은 일행을 줄곧 뒤따라오다가 세이지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짐수레 뒤로 몸을 숨겼다.

상자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굽이치는 금발을 보며 세이지는 찜찜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래도 따라오면?”

“그건 둘 중 하나입니다. 진짜 무식을 넘어 뇌가 순수하거나, 아니면 정말 목숨 걸고서라도 따라오고 싶은 이유가 있거나.”

그리 말한 바이칼은 사막으로 출발하기 전 말들이 차고 있는 보호대와 발굽에 새겨진 마법진을 사막전용으로 수정했다.

그걸로 사막에 진입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정지. 혹시 투르케 사막으로 가십니까?”

도시를 벗어나기 전 출입구를 지키던 병사가 일행의 목적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병사는 그들의 신분을 조사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사막에서 실종 사건이 눈에 띄게 잦아져서 사막 방문객 명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종 사건?”

“일단 멀쩡한 모래언덕처럼 보이다가도 갑자기 늪처럼 쑥 가라앉는 지형이 많이 늘어나서 모래에 빠져죽는 사망 사고가 하루에도 열 건이 넘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거기다 여자와 아이를 노리는 인신매매꾼들이 기승이라고 하니 이 점도 각별히 주의해 주십시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투르케 쪽 문으로 도시를 빠져나가는 인파는 생각보다 적었다.

일행은 사막으로 이어진 모래밭길을 천천히 내달리며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허. 사막의 유사는 자연현상이니 그렇다 치지만 인신매매라니.”

“한 번 멸망했던 땅인데다 일단 환경이 열악하니까. 혼란을 틈타 범행을 저지르는 모양이로군.”

“게다가 모래늪 역시 마찬가지. 자연현상일지라도 평소보다 눈에 띄게 잦아졌다면 그다지 자연스러운 상황은 아닐 수 있다.”

바이칼과 에단, 크리스티나가 하는 대화를 들은 세이지가 제 형을 쳐다보았다.

“형님은 어찌 생각하세요? 갑자기 늘어난 모래늪이 인신매매와 연관이 있을까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대화에 끼지 않고 조용히 있던 그는 평소 쓰던 모자 대신 후드를 눌러쓰며 여상히 대답했다.

“글쎄, 어떨지. 직접 가보고 나서 판단하는 게 어떠하냐.”

“예? 하지만.”

당연히 위험 지형과 인신매매꾼들을 맞닥뜨릴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어조였다.

“그러기 위해 다니는 순례길이니 말이다.”

그의 확신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모습을 드러낸 유니가 까르륵 웃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토니도 모습을 드러내며 한마디 보탰다.

「여기 좀 이상하긴 하다요.」

「뭐가?」

「사막이 사막 같지 않은 느낌? 그러니까, 우웅. 모래가 모래가 아니다요!」

「……얘가 뭐래니.」

유니는 토니의 저질 표현력에 감탄하여 눈을 가늘게 떴다.

「아으우! 나요도 이런 건 처음 봐서 설명하기 어렵다요. 모래긴 모래인데 막 강처럼 흘러다닌다요. 분명 평범한 모래가 아니라!」

「아냐, 됐어. 그냥 직접 가서 볼게. 역시 이그레트 말은 언제나 정답이야.」

심드렁한 반응에 토니는 힝 하고 손가락을 물었다.

출발할 땐 자잘한 풀과 돌멩이들이 중간중간 보이던 길이 이동할수록 점차 거친 모래밭으로 가득해졌다.

나중에는 정말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만이 시야에 남았다.

울퉁불퉁 솟았다 내려앉은 모래언덕은 태양광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낙조가 질 때까지 모래언덕을 넘어 이동했지만 의문의 모래늪과 인신매매꾼은 찾으려 하니 오히려 나타나지 않았다.

시뻘건 화로처럼 변해 지평선 가득 노을을 흘린 태양은 모래언덕에 삼켜지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 그들은 여행객을 위해 지어진 사막휴게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얕은 오아시스를 하나 끼고 넓게 천막을 쳐서 지어놓은 휴게소에선 숙박 외에도 야외에 마련된 공터에 둘러앉아 바비큐를 해먹거나 음유시인의 노래를 감상하는 등 즐길 거리가 많았다.

물론 이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단장, 저기 좀 보십쇼.”

“……?”

공터에 나와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중 바이칼이 턱짓을 하며 질렸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참, 저 정도면 근성 하나는 끝내주지 않습니까? 근성만으로 따지면 기사단 입단도 가능하겠는데요. 설마하니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모른 척해라.”

에단은 힐끗거리던 바이칼의 고개를 텁 붙잡아 억지로 돌려주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시선을 보내던 곳에는 초췌한 몰골이 되어 낙타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난 유리엘이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여기 보리빵 하나요.”

심지어 사막을 건너기 위해 낙타를 구매하느라 모아 들고 온 용돈마저 대부분 소진한 그녀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제일 싸구려 메뉴를 하나 주문했다.

그마저도 쫄쫄 굶다 먹게 된 소중한 식량이었다.

유리엘은 빵이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입안에 우겨넣었다.

하지만 보리빵은 귀족으로 자라난 그녀가 먹었던 하얀 밀빵과 다르게 무척이나 딱딱했고 질겼다.

물도 없이 단단하게 굳은 보리빵만 한가득 베어 물고 우물거리던 유리엘은 어느 순간 컥 소리와 함께 목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큽. 쿨럭! 켁켁.”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기침을 통해 제대로 씹지 않고 삼켰던 빵조각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사레가 들려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가슴을 탕탕 치며 병 걸린 사람마냥 기침을 해대는 그녀의 눈앞에 수통이 하나 내밀어졌다.

“……!”

마치 활활 타오르는 지옥에서 발견한 생명수를 들이켜듯 유리엘은 정신없이 수통을 입에 대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휴우. 감사합…….”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수통을 건네준 이에게 감사인사를 건네려던 유리엘은 싸악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대가 왜 이곳에 있지?”

그녀 앞에 선 크리스티나가 짜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하니 따라온 장본인에게 들켰으리라 생각도 못했던 유리엘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어차피 한 번은 직접 전해야할 이야기잖아.’

마침 기회였다. 유리엘은 화악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저, 사실 크리스 경을 따라왔어요.”

“왜.”

어찌나 짜증이 났는지 영애고 뭐고 말이 짧아져 있었는데도 유리엘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경이 했던 말대로 기왕 정략혼에서 도망친 거, 제가 정말 원하는 남자를 잡고 싶어졌거든요.”

“……?”

“그러니까 나, 크리스 경을…….”

이런 이유로 자신을 쫓아다닌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크리스티나였다.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미간을 좁히다 이내 숨쉬기를 멈추었다.

곧 조각같이 단아하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 무슨.”

“좋아해요!”

툭.

누군가 들고 있던 포크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일행은 접시를 든 채, 숟가락을 문 채, 모닥불에 불쏘시개를 넣는 자세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전부 굳어버렸다.

주변의 다른 여행객들이 떠들고 노래하는 와중에 그들 일행 사이에서만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

크리스티나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쥬다스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도로 홱 고개를 되돌렸다.

무언가 크나큰 오해가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억누른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도대체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의 무엇을 알고 좋다고 말하는 거지?”

“꼭 많은 걸 알아야만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막무가내로군.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 있는 건가.”

“그럼요! 진심인걸요.”

“진심?”

크리스티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군. 그리고 불쾌해.”

“……크리스 경?”

웃음기가 거짓말인 양 싹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기세였다.

말한 대로 불쾌가 담긴 바닷빛 눈동자를 마주한 유리엘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진심이라고 했나. 그렇다면 너는 그 진심을 위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지?”

“책임이라뇨?”

“자기감정에 책임조차 질 줄 모르는 건가. 한심하군.”

크리스티나는 상대를 깔아보는 오만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답해 보도록. 무엇으로 그 진심을 증명할 텐가.”

“그건!”

“그대가 이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냐는 뜻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품는 것까진 강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고 상대방에게 동등한 사랑을 요구하기 위해선 자신이 그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고 무언가를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유리엘은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허름하게 때 탄 옷과 더러운 손이 보였다.

수중에 돈은 떨어져가 제대로 된 밥 한 끼 사먹지 못하고 보리빵에 목이 막히는 처지였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머릿속이 텅 빈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다 한들 그녀는 그저 약소한 가문의 장녀일 뿐이다.

특별한 재주나 이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평범한 귀족 영애들이 그렇듯이, 유리엘은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답할 수 없다면.”

“…….”

“유감이군.”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돌아서는 크리스티나의 등을 바라보며 유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비틀거리며 일어나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놓고 사라져 버린 유리엘 탓에 일행은 슬슬 크리스티나의 눈치를 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좋다고 따라온 여자애한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조금 부드럽게 대해 주시지.”

“…….”

“뭐 그쪽도 나쁜 뜻은 아니었잖습니까. 그나저나 크리스티나 님도 참 대단하시네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애정공세가……!”

피잉!

눈치 없이 평소처럼 크리스티나에게 말을 걸던 바이칼은 볼을 스치고 지나간 푸른 빛줄기에 멈칫 입을 다물었다.

슬쩍 돌아보자 쇠 냄비에 반쯤 박힌 마력화살이 보였다.

“흐업.”

“삐이이.”

바이칼과 플루비는 동시에 오들오들 떨었다.

신경질적으로 활을 내리고 휙 돌아선 크리스티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그대로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것 참.”

가만히 앉아 엉뚱하게 꼬여 버린 상황을 지켜보던 쥬다스는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안녕하세요! 바로 이어서 119화가 올라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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